농부 수필가가 쓰는 미술 이야기(8)
농부 수필가가 쓰는 미술 이야기(8)
- 꼬맹이 아들의 말에 자존심 상했던 작가-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아빠, 내가 장담하는데, 아빠는 이렇게 잘 그리지 못할 거야!”
그의 꼬맹이 아들은 맹랑하게 말했다. 사실 그는 풍선껌을 싼 종이의 그림을 아들한테 매번 베껴 그려주고 있었다. 그의 아들은 만화를 즐겨보는 아이였다. 그는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으며, 그림 솜씨도 있었으나 빛을 제대로 보지 못한 무명의 작가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날 어린 아들의 말에 자존심이 상해, 만화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가 이른바 ‘팝 아트(pop art)’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된 동기는, 다른 데에도 있었다. 어느 대학에서 미술학과 강사로 지낼 때 만난 선배 교수 ‘카프로’가 그에게 일러준 그 한 마디 덕분이다.
“보시게나. 미술을 꼭 미술로 보아야 할 이유는 없다네.”
그는 그 말을 지나쳐 듣지 않았다. 그는 그 말이 곧 팝 아트를 일컫는 말임을 알아차렸다. 일상적인 것, 대중적인 것, 소비문화와 관련된 것 등으로 요약되는 게 팝 아트다. 달리 말하자면, 아무 의미 없이 소비되는 공산품과 대중문화를 소재로 하는 게 팝 아트다. 그는 마흔이 넘은 이후, 꼬맹이 아들의 자극과 선배 교수의 충고에 힘입어 늦깎이로 팝 아트에 본격 매진하게 된다. 그는 행운아였다. 마침 뉴욕 백화점 본윗 텔러(Bonwit Teller)의 광고판을 그려줄 이를 찾고 있던 ‘아트 딜러(art dealer)’ ‘카스텔리’의 눈에 띈 게 전환점이었다. 뒤늦게 계약서를 들고 갔던 팝 아트의 대가, ‘앤디 워 홀(Andy Warhol,미국, 1928~1987, 코카콜라 병의 그림을 그린 이)’는 카스틸리한테서 퇴짜를 당한다. 명성이 있던 그로서는 자존심이 무척 상하는 일이었다. 무명에 가까운 그에게 맡겼다고 하니, 그럴밖에. 그러나 아트 딜러 ‘카스틸리’는 정말로 사람을 제대로 보았던 셈이다. 이 글의 주인공인 그는 그 길로 일약 스타가 된다.
그가 도대체 누굴까? 이번에는 독자님들께 힌트를 드려보아야겠다. ‘행복한 눈물’, ’ 우는 소녀(Crying girl), ‘공놀이 소녀’, ‘빵!Balm’, ‘타카타카’, ‘이것 봐 미키’, ‘키스’, ‘알로하’, ‘차 안에서’ 등의 만화를 그린 이? 그래도 모르겠다면 더 힌트를 드리겠다. ‘루이비똥’에 색을 입힌 이? 에라, 모르겠다. 확 불어버리자. 그가 바로 ‘로이 리히헨슈타인(Roy Lichienstein,미국, 1923~ 1997)’이다. 그는 만화를 그리되, 종전의 만화가 아니었다. 굵은 윤곽선으로 그렸고, 말 풍선을 그렸다. 만화의 원색을 살리고 망점(網點)을 꼭 넣었다. 특히, 말 풍선을 넣음으로써 그림의 매력을 한층 드높였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에 그의 작품 특징을 적으라는 문제가 나온다면, ‘망점’하나만 적어도 썩 괜찮은 점수를 딸 것이다. 그의 그림은 원색의 찬란함을 더해, 긴장감이 넘쳐 만화보다 더 만화다운 그림이 되었다. 언뜻 생각하기에,그가 ‘앤디 워 홀’처럼 실크 스크린으로 대량 생산할 성 싶으나, 한 장 한 장 캔버스에다 유화(油畵)로 그렸다는 것도 특징 중의 특징이다. 그는 그 동안 서점의 가판대에 자리하던 만화책을 미술화랑으로 옮겨간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는 만화나 광고판을 허투루 본 적이 없다. ‘뉴욕타임즈’ 신혼여행 광고를 보고 영감을 얻어, 명작인 ‘공놀이 소녀’를 그렸다. 전쟁만화를 보고 영감을 얻어 ‘타카타카’를 그렸다. 월트 디즈니 ‘이것 봐 미키’에서 영감을 얻어 ‘이것 봐 미키’도 그렸다. 그리고 DC 코믹스 만화책에서 영감을 얻어 여러 만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사실 그가 졸지에 스타가 된 것은 아니다. 그는 위에서 소개했듯 어린 아들의 말도 귀담아 들었고, 선배 교수의 조언도 귀담아 들었고, 오하이오 주립대학 수학시에도 ‘셔먼’ 교수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셔면 교수는, 암실에서 카메라 셔터를 누르듯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라고 그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는 그러한 것들을 그대로 실천하였다. 그러기 훨씬 이전 유년시절부터 붓을 놓지 않았다는 점과 생계를 위해서라도 붓을 놓지 않았다는 점도 지나칠 수가 없다.
그는 대성하였다. 살아생전 무려 2조 달러의 수입도 거둔 작가다. 그는 행운아였다. 그러나 그 행운을 거저 얻은 이는 분명코 아니다. 어린 아들의 자극마저도 고스란히 자기의 것으로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었던, 그 그릇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사실 작가인 나는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내내유혹을 떨칠 수가 없었다. 어떤 유혹? 수필 이까짓거 돈도 아니 되고, 종이책 기준으로 수십 권에 달하는 원고를 썼음에도 어느 독지가 내지 출판사가 자기네 부담으로 책을 만들어 주겠다는 이도 없는데… . 차라리 독자들 말초신경이나 자극할 수 있는 삼류소설을 쓴다면 어떨까 하고서. 하지만 내가 영혼을 팔아 그렇게까지야 할 수 없지 않은가. 대신, 남의 충고와 자극도 제대로 새겨들었던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그 자세와 그 정신만이라도 본받아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다음 호 계속)
l 이 글은 ‘한국디지털도서관( 한국디지털도서관>윤근택> 작품/논문>미발표작)’으로 찬찬히 따라가시면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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