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깨의 노래
도리깨의 노래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네 뙈기 밭, 연면적 1,000여 평 들깨 탈곡(脫穀)을 오늘에야 마쳤다. 얼추 알곡이 10말[斗]은 되겠다. 탈곡에 도와준 농기구들은 도리깨, 테가 달린 둥근 체[篩], 여러 장의 가빠 [kappa], 고무 바가지 등이다. 이것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일을 수월히 할 수 없었으리라.
문득, 탈곡을 끝내고 나니, 내 양친이 살아생전 즐겨하던 말이 떠오를 게 뭐람?
“야들아, 사람과 그릇[皿]은 보이는 대로 다 쓰인대이(쓰인다).”
인간의 소중함과 도구의 두루쓰임을 아울러 강조한 듯도 한데... .
위 농기구들 내지 농자재들 가운데에서 도리깨에 관해서만 이야기 꾸려가고자 한다. 사실 그 도리깨는 몇 해 전에 철물점에서 산 것이다. 전통적인 도리깨와 그 생김새며 재질이 달랐다. 도리깨 자루 즉 ‘도리깻장부’는 철제 파이프였으며, 비녀같이 생겨먹었던 전통 도리깨의 나무로 된‘도리깨 꼭지’는 볼트와 너트와 와셔로 바뀌어 있었고, 셋손가락의 ‘도리깨열’은 철선(鐵線)을 비닐계 합성수지로 코팅하고 있었다. 하여간, 그렇게 생겨먹은 개량도리깨(?)를 철물점에서 사기는 샀으되, 별로 쓸모없어 광에 넣어두고 지냈다. 사실 나는 지난해에도 들깨농사를 하였으나, 그때는 탈곡할 양이 적고 해서 그 도리깨를 사용할 생각을 미처 못 했다. 그냥 대나무 작대기를 도리깨열처럼 세 개 갈라 움켜잡고 마구 두드려댔을 뿐이다. 그러나 올해는 천상(←天生) 그렇게 놀고 있던 개량 도리깨를 꺼내서 사용할밖에. 그랬더니 생각밖에 작업능률이 올라갔다. 마당 대신에, 밭자리에다 여러 개의 가빠를 널찍하게 펴 가을마당으로 삼고, 들깨를 사정없이 도리깨질을 해댔다는 거 아닌가. 그러면 ‘좌르르좌르르’ 소리를 내며 들깨알이 쏟아졌다. 참, 하나 빠뜨릴 뻔했다. 셋 손가락처럼 갈라진 그것을 도리깨열이라고 불렀다. 모르긴 하여도, 본디말은 ‘도리깨렬[-裂, '손가락이 갈라지듯하여 생긴 말(?)]’은 아닐까 싶다.
다시 한 번 내 양친의 말이 떠오른다. 이번에는 아예 패러디를 해 보아야겠다.
“ 사람과 도구는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쓰인다.”
사실 지난 날 내 아버지가 가을마당에서 즐겨쓰던 그 도리깨에 비하면, 내가 쓴 개량도리깨는 한 수 아래다. 그 모양새에서도 훨씬 뒤쳐진다. 내 아버지 당신의‘도리깨’는 뭔가 달라도 크게 달랐다. 그 도리깻장부는 쪽 곧은 노간주나무로 만들었다. 그 노간주나무는 줄기가 곧게 긴원뿔형으로 자라기에, 당신은 그 나무를 택했던 듯하다. 손잡이 쪽은 가늘고 도리깨꼭지 쪽은 제법 묵직하게 굵었다. 그리고 그 도리깻장부의 길이는 꽤나 길었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리치(reach)’가 적용된 예다. 그래야만 힘을 덜 들이고 타작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도리깨꼭지는, 위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내 어머니의 비녀같이 생겨먹은 것으로, 나무를 깎아 만들었다. 그 도리깨꼭지는 쇠꼬챙이를 불에 달구어 뚫은 도리깻장부 끝 구멍에 꽂혀 뱅글뱅글 잘도 돌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도리깨열은 언제고 물푸레나무의 가지를 칡으로 엮어 만들었다. ‘도리깨채’로 일컬어지는 손바닥에, 셋 손가락을 지닌 도리깨열. 물푸레나무가 하고많은 나무를 젖히고 도리깨열로 뽑힌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명색이 임학도(林學徒) 출신인 당신의 아들이 그걸 모를 리 없다.
여기서 잠시, 물푸레나무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자. 물푸레나무는 ‘(잘라서) 물에 넣으면 물이 푸르게 된다.’는 특별한 성질에서 따온 나무이름이다. 사실 그 비취빛 물은 들여다보기만 하여도 눈이 맑아지는 듯한데, 실제로 각종 안질(眼疾)에 특효약이라고 알려져 있고, 통풍(痛風)에도 탁월한 효능을 발휘한다고도 알려져 있다. 아버지 당신은 세숫대야에다 ‘물푸레나무 우려낸물’을 만들어, 눈곱달린 일소[役牛]의 눈에다 넣곤 했다.
내 이야기는 다시 도리깨열에 쓰인 물푸레나무 이야기로 돌아온다. 물푸레나무는 그 많은 타격에도 갈라지지 않고 부러지지도 않기에 도리깨열로 쓰였다. 게다가 탄력이 좋아, 도리깨질할 적에 반동력(反動力)이 생겨났다는 거. 그러한 물푸레나무 특유의 반동력으로, 프로야구선수들의 방망이 재료로도 쓰인다는 사실을 내 신실한 애독자들에게 덤으로 알려드린다. 야구방망이에 쓰이는 물푸레나무는 죄다 ‘유럽물푸레’ 즉 ‘구주물푸레나무’라는 사실. 나아가, 물푸레나무는 스키의 재료로도 쓰인다지 않는가.
내 아버지가 가을마당에서, 콩이며 메밀이며 나락북데기며 온갖 곡식을 두드려 패던 그 도리깨가 그립다. 아니, 당신이 양손에 침을 ‘퉤퉤’뱉어가며 움켜잡고서 “으샤!으샤!”기합까지 넣어가면서 두드려대던 그 도리깨가 그립다. 아니아니, 수건으로 머리를 질끈 두르고 도리깨질을 하던 당신의 그 노고(勞苦)를 기린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신은 벌써 아주 오래 전에 저 세상에 가고 없다. 지금은 고향에 가도, 전문농사꾼인 백씨(伯氏)네 집에서나 중씨(仲氏)네 집에서나 내 선친(先親)이 쓰던 그러한 도리깨를 볼 수가 없다. 선진화, 현대화된 농법(農法) 덕분이라고는 하지만... .
이 늦가을, 들깨 타작은 마쳤으나, 더 효율적이던 내 아버지의 그 목재도리깨가 아쉽다. 내가 왜 진작에 그 도리깨열 제작방법을 익혀두지 못했던고? 이미 저 세상에 가 있는 내 아버지. 당신한테서 ‘도리깨질 노래’도 배워둘 걸 그랬다. 허공을 돌다가 타작마당에 깔린 콩대에 순간적으로 세차게 내리치던 그 타악(打樂). 언제고 리드미컬하던 내 아버지의 도리깨 노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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