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듣기/음악듣기

쿠스코 악단의 연주곡 듣기

윤근택 2017. 10. 29. 14:45

제 2신)

사실 그들 '쿠스코' 악단의 연주곡은,

대한민국의 윤근택 수필가로 하여금

명품 기행수필 '잉카의 석공'을 비롯한 여러 편의 기행수필을 쓰도록

영감을 주었다는 거 아닙니까?

가지도 않은 외국 명승지에 대한 기행수필을 적도록 하였어요.

그러니

악단 '쿠스코'의 다른 음악도 마저 들어보세요.

너무 황홀하니,

차례차례 들어보세요.

그들은 세계 여러 곳을 묘사한 음악도 꽤나 만들었어요.

Cusco - Andes

쿠스코 Alcatraz,Galapagos, Tupac Amaru

Island of dreams - Cusco ..*^^*

Africa - Afrika by Cusco

잉카 Cusco 음악 / Nanga Parbat

Cusco - Catalina

Cusco ........ 한 곡 한 곡 클릭하면, 무수히 그들의 연주곡을 들을 수 있네요.



제 1신)

1. 좋은 주일(일요일) 보내세요.

저는 다시 어느 아파트 전기실.

지금부터 또 무엇이 되었든 글을 써서 님들께 부치고 하고요.

2. 쿠스코 악단의 음악 듣기


3. '잉카의 석공' 다시 읽기 : 가지도 않은 외국 명승지에 대한 기행수필인 거 아시죠?

잉카의 석공

윤근택(수필가/문장치료사/수필평론가)

나는 지금 잉카의 수도 쿠스코, 그곳에 자리한 ‘사크사우아만 요새’에 와 있다. 태양신전, 주거지 등 돌 건축물이 이곳에도 어김없이 장관(壯觀)으로 펼쳐져 있다. 이 큰 돌들을 어디에서 옮겨 왔으며 또 어떻게 들어올려 저 높이만치 쌓았는지. 시내 좁은 거리를 걸을 때 양옆의 돌담들도 이런 모습이었다. 사진으로 미리 가본 ‘마추픽추’도 ‘돌 도시’라는 별명에 걸맞게 이랬다.

참으로 신비스럽다. 잉카의 석공들은 천재들이었다. 그들은 마치 아이들이 동물 그림의 퍼즐을 맞추듯 다면체의 대형 암석을 자유자재 맞추어 나갔다. 이음새에 접착제인 회반죽을 전혀 바르지 않고도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진다. 뿐더러, 표면은 사포(砂布)로 갈아놓은 듯 매끈하다. 하여간, 그들의 손재주는 빼어나다.

잠시 생각에 잠긴다. 손재주가 그렇게 뛰어난 그들이, 그들의 제국이 약 1세의 영광 끝에 에스파냐 정복자들한테, 그것도 200여명에 불과한 적들한테 나라를 내어줬다니... . 그들은 정복자 피사로한테 1,533년 제국을 빼앗겼다. 그들의 손재주는 석물에 그치지 않고 금세공에도 뛰어났던가 보다. 왕궁 정원의 조각상에다 보석을 달고, 성벽에다 금박까지 입혔다고 하지 않던가. 이 무슨 아이러니냐. 그들의 뛰어난 금세공술이 나라를 잃는 데 일조(一助)를 한 셈이니까. 본디 피사로 일당은 ‘엘도라도(황금의 땅)’를 꿈꾸며 침략했다지 않던가. 약탈자들은 금세공품을 남겨놨을 리 만무하다. 자기네 나라로 빼돌리되, 부피를 줄이려고 녹여 금괴로 만들어 가져갔단다. 빼앗아 가다라도 원형을 유지했더라면, 500여년이 지난 지금 어디에서라도 그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으련만.

이곳 쿠스코의 비극은 피사로의 약탈로 끝나지 않았다. 1,650년 대지진으로 인하여 그나마도 온전했던 도시가 거의 파괴되었단다. 이처럼 크고 작은 난리를 겪었음에도 석공들의 역작들은 비교적 원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니 놀랍다. 이미 둘러본 시내 곳곳에는 그들이 쌓은 중후한 돌 토대 위에 침략자들은 바로크식 건물을 얹었음을 알 수 있었다. 쿠스코 아르마스광장에 서 있는 ‘라 꼼빠니아 데 헤수스 성당’도 그러했다. 내가 즐겨 하는 나무의 접(接)처럼 문명도 그렇게 접이 되는 모양이다. 돌이 불에 타지 않는 등 내구성이 뛰어난 재료인데다가, 수 톤에 가까운 무게라서 천하의 피사로라도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었으리라. 그가 돠살아나 현대를 산다면, 이 석조물까지도 자기 나라에 빼돌리려나 모르겠다. 지금은 황금보다 더 진귀한 석조기술이기에.

가이드의 설명은 이 여행객을 더욱 놀라게 한다. 그들 잉카인들은 수레를 사용할 줄 몰랐다. 이 육중한 화강암들을 어떻게 옮겼더란 말인가. 저 마추픽추 ‘정원도시’의 사정은 더욱 놀랍다. 600미터 가파른 산 아래에 채석장이 있다는데, 그 큰 돌들을 어떻게 옮겼더란 말인가. 잉카인들은 문자도 사용하지 않았다는데, 설계도 한 장도 없이 어떻게 건축을 할 수 있었더란 말인가. 교본도 없이 어떻게 정교한 기술이 다음 세대로 이어져 나갔더란 말인가. 하기야, 초보적인 문자인 ‘결승문자’가 있었다고는 하나, 일부 상위층만 사용하였을 뿐이란다. 그 이후 정복자들이 해독 능력자들을 모두 죽임으로써, 그나마도 소량의 유물에 남아 있는 결승문자가 이젠 영원한 수수께끼로 되어버렸다. 석공들은 돌망치, 돌도끼만 사용했다는데, 어찌 이처럼 깔끔하게 다듬었더란 말인가. 불행하게도, 나라에 철광석이 부족해, 그들은 쇠를 다루어 볼 기회가 없었단다. 쇠 공구를 썼더라면 더욱 효율적으로 작업을 할 수 있었을 텐데... . 그들은 제법 야금술도 익혀 청동으로 장식까지 했으면서도, 정작 쇠 무기는 만들지 못했다. 이는 패망의 원인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니 이 또한 아이러니다. 석공들은 석조물의 표면을 반질반질 깎아두었다. 모래로 문질렀단다. 사포(砂布)도 아닌 모래로 가능한 일이었던가.

자, 이쯤 해두고 잉카 석공들의 삶을 들여다보자. 진심으로 내켜서 한 일인지 의구심이 생긴다. 잉카인들은 기록문을 남기지 못했으니, 그저 상상할 따름이다. 석공들은 대개가 피지배 계층의 인간들이었으리라. 노예들은 원석(原石)을 옮기는 데 주로 동원되었으리라. 대부분 골병이 들거나 깔리어 죽어나가거나 했을 것이다. 현장에는 원석을 재단하는 이, 다듬는 이들, 표면에 광을 내는 이들이 따로 있었을 것이다. 이들 가운데 원석을 재단하는 이는 ‘석공장(石工長)’이라고 불렸을 테지. 진정한 기술자는 석공장으로, 그는 이미 쌓은 돌과 아귀가 맞지 않는다고 수차례 퇴짜를 놓으며, 아랫사람들에게 맞닿는 면을 수정케 하였을 것이다. 석공들은 얼마나 열불이 터졌겠는가. 석공들은 강제노역에 동원된 사람들이었을 것이고, 뙤약볕 아래서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었으리라. 한편, 소수의 지배계층은 호의호식을 위해 그들의 왕을 태양과 동일시하며 ‘태양의 아들’ 즉, ‘잉카’라 떠받들었을 것이다. 그들은 왕권 강화를 위해 몽매한 백성들을 꼬드겼을 것이다. 때마침, 안데스 산록에 수년째 가뭄이 들자 주곡(主穀)인 감자와 옥수수 농사를 망쳤다. 알파카와 라마도 뜯어먹을 풀이 없어 죽어나갔다. 이를 기화로, 신의 노여움 때문이니 신전을 지어 제사를 올려야 한다고, 백성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필요하다고 선동했을 것이다. 본디 선량한 백성들이었다. 그들이 ‘위대한’, ‘훌륭한’, ‘고귀한’, ‘관대한’, ‘행복한’ 따위의 어휘를 즐겨 썼던 것으로 미루어 이를 짐작케 한다. 시작은 그렇게 되었으되, 석공들은 마치 집단최면이라도 걸린 듯 순치(馴致)되어 점차 태양신을 신봉하게 되었을 것이고, 자신들의 작업을 성사(聖事)로 여기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토록 장엄한 석조물을 정성을 다해 빚게 되었으리라. 그리고는 일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구원자 ‘비라코차’의 강림을 기다렸을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백성들 사이에는 예언이 퍼져 나갔다. 석공들 사이에도 퍼져 나갔다.

‘구원자 ‘비라코차’가 나타나 오랜 기근에서, 만연한 천연두에서 구해 주실 것이다. 그분은 하얀 낯을 하고 여럿이 함께 오실 것이다.’

때마침 국왕은 천연두로 사망하고 왕위를 두고 싸움이 한창이었다. 백성들은 구심점을 잃어버렸다. 게다가 천연두의 창궐로 백성들은 수없이 죽어 나갔다. 안데스산록의 해발 3,399미터에 자리한 쿠스코. 청정지역에 사는 백성들인지라 면역력이 있을 리 만무하다. 더군다나 감자, 옥수수, 콩, 키노아, 오카, 코카, 유카 등 그들의 농작물도 수년째 흉작이었으니 기근도 들어 있었다. 잠입자(潛入者) 피사로 일당이 거짓예언과 천연두를 일부러 퍼뜨리지는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이에 관해서는 증언해줄 이 하나 없다. 역사는 항상 승자의 기록인지라 더더욱 그렇다. 내가 살펴본 바, 에스파냐 정복지 몇 군데서 정복 당시 천연두가 공교롭게도 창궐했다. 어쨌거나, 피사로는 지방 토호세력을 부추겨 이간질 하는 등 혼란기를 틈타 아주 손쉽게 잉카제국을 거머쥐었다. 고작 200여명의 군사로 거대 잉카제국을 무너뜨렸다. 잉카의 전사들이 그렇게 허약한 존재도 아니었다는데, 비라코치의 강림으로 여기며 나라를 헌납했단다.

잉카 석공들의 거대한 작품인 돌 도시 마추픽추는 ‘세계 7대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그리하여 나도 이처럼 세계의 수많은 여행객들 서리에 덩달아 서 있다. 우리가 요란을 떠는 사이에도 정작, 잉카 석공들의 후예들은 그다지 나아진 게 없는 듯하다. 그들은 양 갈래 머리를 땋고, 모자를 쓰고, 인디오 특유의 복장으로 길거리에 있었다. 앵무새점을 치는 이, 노점상을 하는 이, 짐을 나르는 이, 전통민요를 부르는 이 등이 그들이다. 아직도 힘있는 자리는 스페인계 사람들이 죄다 차지하고 있단다. 나는 앵무새점을 치는 아낙에게 자기네 조상에 대한 찬사를 보냈다. 그러자 그녀는 해쓱히 웃으며 대답했다. 자기네 조상은 워낙 착하게 살았기에, 천사가 내려와서 석조 공사를 도와주었노라고. 인디오 원주민들은 대개 그녀처럼 말한다. 과학자들 가운데 더러는 마추픽추가 외계인들의 작품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잉카의 유물들은 죄다 수탈자 에스파냐인들이 가져갔단다. 그나마 저 마추픽추의 유물들은 정복자들한테 산길을 들키지 않아 원형 그대로 간직해 왔다. 심지어, 원주민들한테도 들키지 않고 해발 2,490미터 ‘늙은 봉우리’ 마추픽추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1,911년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미국의 고고학자 ‘하이렘 빙엄’이 산 아랫마을 노인의 증언을 토대로, 마을 꼬마를 앞세우고 그곳을 찾게 되면서부터다. 그는 400년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던 ‘공중도시’를 발견하였다. 2억5천년 지령(地齡)의 돌산에 펼쳐진 ‘돌 도시’였다. 물론, 그의 업적은 높이 평가받아야겠지만, 그가 연구를 하겠다며 가져간 유물이 자그마치 40,000점이란다. 이 또한 그들만의 논리로, 선진문명을 앞세운 약탈이 아니겠는가. 에스파냐에서 미국으로 그 약탈자의 국적만 바뀌었을 뿐. 피사로가 쿠스코에서 석조물만 남기고 다 가져갔듯, 그도 마추픽추에서 석공들의 석조물만 남기고 죄다 가져갔다고 보면 옳다. 최근에 페루 정부는 예일대와 유물 반환 건에 관해 협상중이라니 그나마 다행스럽다. 예일대가 아닌 미국 정부와 다투어야 마땅한 일이겠지만, 내가 간여할 일은 아니다.

이제 이야기를 접기로 한다. 여하튼, 잉카의 석공들은 대단하다. 그들은 가고 없지만, 그들의 숨결은 이 석조물을 통하여 천년 아니 만년을 이어져 갈 것이다.

* 이 글은 2011. 4. 적었습니다. 전자도서관(네이버> 윤근택>전자도서관> 미발표작)에서도 다시 읽을 수 있습니다.

* 힌트 : 시인 유치환은 ‘울릉도’를 간 적도 없이 ‘울릉도’란 명시(名詩)를 적었다고 합니다. 미국의 포스터는 지도책을 펴서 이곳저곳을 찾다가 ‘스와니강’을 작곡했다고 합니다. 윤근택은 해외여행이라고는 간 적이 없습니다. 윤근택은 악단 쿠스코(CUSCO)의 연주를 좋아했습니다. 전통적인 기행수필에 대한 도전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