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신작

'뒷걸음질'

윤근택 2017. 12. 27. 05:16

 

                                           뒷걸음질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염소를 멕여 본 적이 있다. 냇가에서 투망질을 해 본 적도 있다. 냇가에서 정치망(定置網)을 쳐 본 적도 있다. 겨우내 산길에, 철사나 와이어철사로 고라니 올가미와 산토끼 올가미를 놓아 본 적도 있다.

첫째, 염소는 고라니나 산토끼처럼 성마르고 외골수라, 자살 아닌 자살을 한 예가 있었다. 염소는 고삐를 묵되, 고삐의 중간중간에 요리도리를 채우는 걸 잊지 않았다. 고삐가 꼬이면, 염소가 죽을 수도 있기에 그리하였다. 나아가서, 고삐가 나무 그루터기 등의 장애물에 걸려도 아니 되기에, 고삐가 끝닿는 거리만치 둘레를 말짱하게 베어내고, 오로지 그 녀석들이 즐겨먹는 풀만 남게 하곤 하였다. 그러했건만, 한 번은 밭둑에 염소가 죽은 채 발견되었다. 살펴본즉, 아주 작은 나무의 그루터기에 고삐가 배배 꼬여, 그 멍청한(?) 염소가 헤어나려고 발버둥치다가 자살 아닌 자살을 한 거였다.

 

둘째, 투망질과 정치망에 걸리던 물고기들. 그것들은 지능지수가 얼마인지 알 길 없다. 헤엄을 치되, 뒷걸음질은 태생적으로 배운 바 없는 듯. 붕어의 기억력은 3초라던가. 해서, 입술이 찢어진 채 다시 낚시에 물려나오는 예도 있었다. 고통스러웠던 걸 금세 잊고서. 물고기들은 그물을 뚫고 앞으로만 달아나려다가 온 몸이 그물실에 얽혀 어부한테 잡혀온다. 대개 유선형(流線型)의 몸매를 지닌 물고기들은 가장 너비가 큰 몸뚱이가 그물에 걸린 예가 많았다.

끝으로, 고라니와 산토끼도 위 두 족속들처럼 융통성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후각이 발달되어, 철사에서 나는 쇠냄새를 용케도 안다. 그러기에 올가미를 풀로 문지르거나 소죽솥에 삶든가 하여 그것들이 다니는 길목에 놓게 되었는데, 나는 겨우내 산토끼를 그렇게 잡아 팔아서 공책이나 연필을 사는 데 보태어 쓰기에 충분하였다. , 고라니나 산토끼의 올가미를 놓되, 평지가 아닌 급경사지 길목에 놓아야 되더라는 거. 사실 고라니의 경우, 평지에 올가미를 놓게 되면, 용케도 자기가 즐겨 다니던 그 길을 피해 가는 예가 많았다. 그 앙징맞은 발자국을 하얀 눈[] 위에 남긴 걸로 보아,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때로는 올가미가 홀쳐진 일도 있었다. 대개 평지 길목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 모르긴 하여도, 일단 목에 감긴 올가미를 궁리 끝에 뒷걸음질로 빠져나갔으리라 짐작되곤 했다.

그런데 누런 개만은 위에서 소개했던 녀석들과 크게 달랐다. 한 번은 남의 산 온 데에다 와이어철사로 만든 고라니 올가미를 놓은 적이 있었다. 잡히라는 고라니는 아니 잡히고, 그 누런 개가 며칠째 걸려 있었다. 그 개는 살아 있었고, 크게 나부댄 흔적이 없었다. 지혜로운 개 같으니라고! 막상 풀어주려 들자, 앙칼지게 이 낯선 이한테 대들지도 않았다. 그 녀석은 구세주를 만난 듯 조용히 굴었다. 구사일생으로, 몇 몇 날을 굶주림과 추위를 견뎌낸 그 녀석한테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남의 집 개였지만, 대견하기만 하였다.

내 신실한 애독자들한테 이 글을 통해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는 대체 무엇일까? 모름지기 인간은 대기만성(大器晩成)’이 아닌,‘(좋은 때를) 대기(待機)(하는 데)에는 만성(慢性)이 되어야한다는 거. 종종 조급증은 일을 그르치게도 한다. 어쨌든, 위험의 국면을 달아나고자 애쓸수록 위험은 더해진다는 거. ‘내달림보다는 뒷걸음질이 유익할 때도 많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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