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리비를 만들다가
제가 스스로 생각해보아도 저는 빼어난 수필작가 같아요.
감히 부쳐드려요.
온 가슴으로 읽어주세요.
관련되는 작품 또 빚을 것만 같아요.
싸리비를 만들다가
윤근택(수필작가/ 문장치료사/ 수필평론가)
지금은 저승에 가 계신 아버지, 당신. 나는 오늘 낮 내 농막 바로 뒤에 자리한 산에 올라 싸리를 베 내려 왔습니다. 미리 봐 둔 ‘비싸리’입니다. 그곳 한 군데만 군락(群落)을 이뤄 자라는 ‘비싸리’. 나는 이것들을 간추려 칡으로 묶어 빗자루를 곧 만들 텐데요. 문득, 당신이 떠올라 뜨거운 눈물이 양 볼을 타고 흘러내릴 게 뭡니까? 아마 또 농주(農酒)로 마신 낮술 막걸리 탓인가도 여겨집니다.
살아생전 당신은 그러한 종류의 싸리를 ‘비싸리’로 일러주었고, 해마다 겨우내 집에서 20여 리 떨어진 국유림‘미싯골’까지 산길을 걸어, 지게에 잔뜩 베 지고 오곤 했습니다. 당신은 그 ‘비싸리’를 간추려 빗자루를 만들곤 했습니다. 해마다 그리하여 이듬해 마당쓸기와 가을마당 탈곡에 쓰고도 남을 만치 되었습니다. 당신은 가을마당에서 나락 즉 벼를 탈곡한 다음 그 빗자루로 북데기를 잘도 쓸어내곤 했습니다. 사실 그때에도 당신은 싸리비를 개울에 며칠 담가두었다가 씀으로써 빗자루숱을 부드럽게, 쉬이 닳지 않게 하더군요.
잠시 또 다른 생각이 겹쳐지네요. 후일, 당신의 다섯 아들 가운데 넷째이며, 열 남매 가운데 아홉 번째인 이 아들은 유일하게 4년제 대학에 보내졌습니다. 그 아들은 대학이되, 농과대학 임학과에 다녔지요. 해서, 전공필수과목인 ‘수목학(樹木學)’에서 콩과식물 씨리속에 든 수목도 익혀야만 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싸리속에 든 수목만 하더라도 100여 종이며,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싸리속의 수목도 꽤나 많았어요. ‘식별(識別)’이 기본인 그 학문을 익히자니, 얼마나 헷갈리던지요. 사실 당신이 그때 일러준 ‘비싸리’가, 내가 오늘 그때 당신이 베 왔던 싸리와 똑 같이 생겨먹은 ‘싸리’가 정확히 어떤 싸리인지조차 헷갈려요. 해서, 이 글을 쓰기에 앞서, 다시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에 공부하였던 전공 ‘수목학’ 교재를 펼칠 수밖에 없었어요. ‘싸리속의 식별 요령의 핵심은, 한 군데 꽃이 몇 개 달리느냐다.’하고서, 그 페이지 여백에 육필로 적어두었네요. 지금은 고인(故人)이 되었을 나의 은사(恩師)는 평소처럼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일러주었다는 이야기지요. 지금은 저승에 가 계신 당신께 이 아들은 좔좔 읊어드릴 게요.
‘ 콩과> 싸리속>싸리·참싸리·조록싸리·개싸리·땅괭이싸리·비수리.’
‘ 콩과> 족제비싸리속> 족제비싸리.’
‘콩과> 전동싸리속> 전동싸리·흰전동싸리.’
‘콩과> 땅비싸리속>땅비싸리·큰땅비싸리.’
‘대극과> 광대싸리속> 광대싸리.’
‘장미과> 양지꽃속> 물싸리.’
‘?과>?속>댑싸리[비싸리, 공쟁이 , 코키아(kochia).’
아버지, 당신이 들어보아도 아주 헷갈리지 않아요? 그러함에도 이 아들이 위와 같이 말씀드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어요. 당신과 마찬가지로, 내가 지금 싸리빗자루로 만들고자 하는 싸리는 ‘참싸리’이거나 ‘조록싸리’일 겁니다. ‘싸리’는 살아생전 당신이 윷을 만들거나 산적(蒜炙)꽂이로 삼았던 나무일 테지요. 또 그 ‘싸리’는 곧아서, 당신이 결었던 종다래끼 재료로도 쓰였을 테고요. 어디 그뿐이겠어요? 열 남매 자녀들 훈육(訓育)에 회초리로도 쓰였겠지요.
한편, 싸리도 아닌 녀석이 싸리인 척 광대노롯을 한다고 해서,‘광대싸리’라고 이름 붙였다는 거 아닙니까? 위 도해(圖解)에서도 보여주듯,‘대극과’에 속하지만, 내가 얼핏 보기에도 언제고 싸리 같기만 하더군요. 이들 가운데‘비수리’는 냇가에 잘 자라곤 했어요. 여름날 아버지, 당신은 우리더러 ‘소 풀 뜯기러’ 곧잘 내몰곤(?) 했어요. 그 소가 ‘이녁소(당신의 소)’도 아닌 ‘풀밟히기소(배내기소)’였건만... . ‘남의 집에서 일부리러 빌려온 소’ 말이지요. 흥이 나지 않았지만, 그 비수리로 빗자루를 곧잘 만들어댐으로써 그나마 행복했지요. 나중에, 아주 나중에. 내가 성인이 되어서야 알 게 되었지만, 그 비수리가 바로 ‘야관문(野關門)’이며 ‘토종 정력제’ 재료더군요.
아버지, 당신께 ‘족제비싸리’에 관해서도 보고 드려야겠군요. 유럽 원산의 족제비싸리는 그 햇순을 자르면, 즙액이 나와요. 그 즙액을 손톱에 바르면, 매니큐어 이상으로 반질반질 윤기가 나더군요. 어린 우리는 곧잘 그 놀이(?)를 하곤 했어요. 내 백씨(白氏)와 중씨(仲氏)는 그 족제비싸리를 베 와서 ‘보온절충못자리’ 비닐 터널을 만들 때에 골재(骨材)로 쓰더군요. 곧고 갸름하여 만판이더군요.
아버지, 당신께 위에서 소개한 싸리 가운데에서 내 아릿한 기억과 맞물린 녀석을 소개 아니 할 수가 없어요. 내가 비교적 자세히 적은‘?과>?속>댑싸리[비싸리, 공쟁이 , 코키아(kochia).’이 바로 그 녀석인 걸요.
내가 ‘국민-학교’ 저학년이었을 때였어요. 고향 청송에는 그제나 이제나 5일, 9일 오일장이 서지 않아요? 마침 일요일과 장날이 겹쳐지는 날이었어요. 아버지, 당신의 알뜰한 아내이자 내 자애로운 어머니가 이른 아침에 이르더군요.
“근택아, 니 오늘 이 에미랑 장에 가지 않으련? 느그 어른이 지난 삼동(三冬)에 ‘매어놓은’ 싸리비가 몇 년을 쓰고도 남겠는 걸. ”
아버지, 당신은 곱게 만들어 ‘도끼모탕’으로 지질러, 소성(塑性, plasticity)을 유지토록 한 그 빗자루들 가운데 열 개 정도를 골라 묶어주었어요. 걺바(지게 없이 질 수 있도록 한 멜빵을 우리 쪽에서는 그렇게 불렀다.)도 만들어주었어요.
내다팔 곡식을 이고, 내다팔 계란꾸러미를 든 어머니. 나는 당신이 만들어놓은 싸리비를 ‘걺바’에 메고 비포장도로 신작로를 걸어갔어요. 이 세상에 태어나 단 한번 장돌뱅이가 되었던 날. 어머니는 목이 좋은 난전(亂廛) 한 자리를 나한테 찍어주데요. 나는 그곳에 내가 지고 간 싸리비를 진열했어요. 초조하게 기다려도 바이어(buyer)는 나타나질 않았어요. 그런데 이번엔 어느 얌체같은(?) 아지매 하나가 내 점방(?) 옆에 와서, 그 문제의 ‘댑싸리비’를 진열한 겁니다. 내가 보아도 크고 비질이 잘 될 성싶던 그 댑싸리비. 당신이 정성들여 만든 ‘싸리비’와 달리, 그 ‘댑싸리비’는 단 한 그루로써 만들어진 것이었어요. 요즘 식으로 말해, 그 아지매는 경쟁사인 ‘근택 회사(?)’ 아니, ‘송호(당신의 택호였지요.)’에 ‘상품 차별화’가 된 거였어요. 그 아지매한테는 바이어가 몇 다녀가더군요. 그 바이어들이 조용히 사가기만 해도 좋았을 텐데, 말이나 하지 않으면 밉지는 않았을 텐데... .
“ 이 빗자루, 아주 잘 쓸리겠는데... .”
아버지, 그날 이 아들은 판매실적 ‘꽝’이었어요. 미안한 터에 어머니는 나를 위로해주었어요.
“근택아, 괜찮대이. 이 어미는 이고 들고 온거 다 팔았다. 어여(어서) 집으로 돌아가자. 참, 그러기 전에 저기 가서 찐빵을 사 먹자꾸나.”
판매실적이 꽝인 이 아들한테 찐빵까지 사주었어요. 너무도 미안한 터에.
지금은 저승에 가 계신 당신, 당신의 수고를 생각해서 그 싸리비를 도로 지고 오려고 했어요. 하지만, 당신의 알뜰한 아내이자 내 자애로운 어머니는 이 아들을 먼저 생각하더군요. 읍내 ‘신약방(新藥房) 7촌댁’에 들러, 그 아까운 빗자루를 몽땅 거저 건네주었다는 거 아닙니까?
아버지, 이제 당신이 우리한테 손수 보여주었던 방식대로 싸리비를 묶어야겠어요. 적당한 개수를 가지런히 모으되, 그 키들을 달리 해야겠어요. 그래야 향후 시나브로 숱이 닳을 테니까요.
그렇게 한 후 갈라서 가위를 펴듯, 대문자 X자로 만들 듯 갈라야겠지요. 그런 다음 ‘X’로 교차하는 부위를 칡으로 가로가 아닌, ‘아래 위로’ 두어 번 감아 꼭 묶을 겁니다. 그런 다음 다시 가위를 접듯 하여 싸리의 가슴 부위를 탱탱하게 묶어야겠지요. 마치 당신의 넷째 며느리아자 내 아내인 이가 브래지어 끈을 탱탱 묶듯. 나는 당신과 달리, 만들어진 싸리비의 숱을 돌 따위로 지질러 눌러놓지는 않겠어요. 곧바로 낙엽 따위를 쓸어야하니까요.
아버지, 그런데요, 환갑을 넘은 이 아들은 아파트 경비원으로 재취업해 있다는 거 아녜요? ‘마데 인 치나(made in china)’라벨이 붙은 수수 빗자루 및 대나무 빗자루로 아침저녁 아파트 외곽을 청소해야만 해요.
‘아버지, 어쨌든 당신을 한없이 사랑해요. 명복을 빌어요.’
작가의 말)
수필은 생활이요, 생활은 수필입니다. 저는 늘 이야기하여 왔지만, 저는 글을 쓰는 게 아니라 못다 쓴 연서를 쓰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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