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노비들 이야기
어느 노비들 이야기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제 1화(話)
<Daum백과 한국사 인물열전>에는 그분의 생애에 관해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내 편의상 간추려 옮기겠다.
<광주 반씨 가문의 족보에 따르면 ‘ㅇㅇㅇ’은 서얼(庶孼) 출신인데 13세 때 아버지가 사망하자 어머니 회미 장씨가 아들 3형제를 이끌고 서울에 이사했다고 한다. 양반이 양첩으로부터 얻은 자식이 서(庶)이고 비첩으로부터 얻은 자식이 얼(孼)이다. 그렇다면 장씨가 서울 양반가의 노비로서 ‘ㅁㅁㅁ’의 비첩이었는데, 남편 사후 상전에게 신역을 지불할 능력이 없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상전의 집으로 들어갔다는 뜻이 된다. 유몽인의 《어우야담》으로 그 기록을 이어보면 상전의 정체는 서울의 이 참판으로 드러난다.
‘ㅇㅇㅇ은 본래 이 참판 댁 가노였다. 비록 노비였지만 두뇌가 명석하고 배움에 대한 열정이 지극해서 상전의 아들 이오성이 글을 배울 때 밖에서 도둑공부를 했다. 한데 어느 날 이오성이 공부하던 《통감절요》를 훔쳐보다 이 참판에게 들켰다. 이 참판은 그의 학문이 예사롭지 않음을 알고 노비문서를 불태워 면천시킨 뒤 후손이 없는 친척집에 양자로 입적시켰다. 과연 그의 기대에 걸맞게 ‘ㅇㅇㅇ’은 과거에 급제한 뒤 출세를 거듭하여 형조 판서에 이르렀지만, 이 참판의 집안은 몰락을 거듭했다. 훗날 초헌을 타고 입궐하던 그는 길거리에서 거지꼴로 배회하던 이오성을 발견하고 집에 데려와 후히 대접하면서 그 동안 양반 행세한 사실을 사과했다. 며칠 뒤 반석평은 임금에게 나아가 자초지종을 자백하면서 나라를 속였으니 처벌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임금은 그를 기특하게 여겨 사면해 주고 옛 주인 이오성에게 사옹원 별제 자리를 내려 주었다.’>
‘ㅇㅇㅇ’로 처리된 그분이 대체 누구일까? 바로 ‘반석평(潘碩枰, ? ~1540, 중종35년)’이다. 그리고 ‘ㅁㅁㅁ’처리된 그분의 부친은 ‘반서린’이다. 그분 업적 등에 관해서는 생략코자 한다. 다만, 그분은 참으로 겸손한 분 같으며 정직했다는 사실을 위 요약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는 거. 위에서 등장하는 분들 또한 대단한 분들인 거 같고. 그분의 본디 주인이었던 ‘이오성’의 부친도, 앞을 내다볼 줄 아는, 탁견(卓見)을 지녔던 분이다. 장래가 구만리 같은 젊은이의 길을 열어주었다는 거 아닌가. 중종 또한 그분, 반석평의 재능과 정직함을 끝끝내 인정해주었다지 않은가. 그분, ‘반석평’은 요즘 우리가 자주 하는 말로, ‘지난 날 은혜를 베푼 가족에게 배신 때리지 않았다’는 점도 존경스럽다.
나는 위 요약분을 읽으면서 또 짚이는 게 하나 있다. 바로 살아생전 내 양친(兩親)이 늘 일러주던 말씀이다.
“야들아, (인간) 될 놈은 청석(靑石) 끝에 붙여놓아도 산다 했대이. 얼음구덩이에 넣어도 살 놈은 산대이.”
다시 생각해보아도 옳은 말씀인 듯하다. 반석평의 입지전적(立志傳的) 스토리는 이를 뒷받침한다. 하더라도, 많은 양반들이 그분의 신분수직상승을 질투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기왕에 내친걸음에, 수필작가의 길을 걸어가는 나는, 더 보탤 게 있다. 바로 대한민국 헌법 제22조’에 명시된 사항.
① 모든 국민은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
② 저작자·발명가·과학기술자와 예술가의 권리는 법률로써 보호한다.
‘표현의 자유’와 관련된 사항이다. 수필작가인 나는 위 조항이 맘에 쏙 든다. 해서, 내가 존경해마지 않는 세 분의 정치인들마저 소개해야겠다. 상업계고등학교밖에 아니 나온 고(故) 김대중 대통령, 마찬가지로 상업계고등학교가 최종학력이었던 고(故) 노무현 대통령, 그리고 소년공장원으로 중학교, 고등학교를 내리 검정고시로 통과하고, 중앙대 법대를 4년 내내 장학생으로(자기 모교로부터 월급받는 대학생이었다.)나와, 사법고시를 통과하여... 현재 경기도지사를 지내는 이재명 도지사. 나는 그분들 삼인(三人)을 참으로 존경하는 정치인으로 꼽는다. 특히, 그분들 가운데에서도 고 김대중 대통령을 최고로 존경하다. 왜? 그분은 권좌(權座)에 오른 다음에도 정적(政敵)들과 그들 후손들까지도 전혀 보복하지 않았다는 거, 그들의 손끝 하나 다치지 않게 했다는 거. 다시, 그분들 삼인들 공통점이란, ‘못 배우고 ... ’로 많은 ‘가진 이들(?)’의 깔봄과 헐뜯음이 있었고, 현재도 있다는 걸.
제 2화(話)
위‘제 1화(話)’와 마찬가지로,<Daum백과 한국사 인물열전>에서 일부 따다 붙이겠다.
<기록에 따르면 ‘ㅇㅇㅇ’의 아버지는 원나라 소항주 출신의 귀화인이다. 그가 살던 시기는 중원에서 원나라가 축출되고 명나라가 기세를 올리던 때이다. 중국에서 왕조가 흥망하면 수많은 망명객들이 조선으로 몰려오곤 했다.
‘ㅇㅇㅇ’의 아버지도 그런 사람들 틈에 끼어 조선에 들어왔으리라 짐작된다. 그렇다면 양반은 아니더라도 양인 정도의 신분을 얻었을 것이다. 그런데 자식인 그도 어찌하여 천민이 되었을까? 그 해답은 바로 《조선왕조실록》에 나온다. 어머니가 동래현의 기생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어머니가 관기(官妓)였으므로 관청에 소속된 관노가 된다.
조선의 엄격한 신분제도에 따르면 일천즉천(一賤則賤), 즉 부모 중 한 명이라도 천민이라면 자식은 무조건 천민이 된다. 시대적 상황에 따라 이 조건은 완급을 되풀이했지만 어머니가 천민이면 자식은 천민의 신분을 갖는 천자수모(賤者隨母)의 법칙은 고려 시대부터 조선 말기까지 바뀌지 않았다. 그러기에 조선시대에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무수한 홍길동들이 많았다. 이런 고통스런 환경 속에서도 ‘ㅇㅇㅇ’이 과학자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기술자였던 아버지의 자질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그분이 대체 누구? 세종이, 동래현의 어느 위인의 천거로 전격발탁한(?) 과학자, 장영실(蔣英實,?~1442). 그분의 업적과 발명품에 관해서는 내가 구구이 설명하지 않아도 내 신실한 애독자들께서는 다 이실 터.
다만, 나는 위 요약분 가운데에서 주목하는 구절이 있다. 바로 그 글 끝 부분에 적힌, ‘장영실이 과학자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기술자였던 아버지의 자질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가 그것이다.
요컨대, 피는 못 속인다는 거. 지난날 내 양친께서는 이런 말씀도 곧잘 하였다.
“야들아, 왕대밭에 왕대 나고 쫄대밭에 쫄대 난다고 카더대이.”
해서, 당신들은 당신의 자녀 열한테, 연애를 하더라도 집안내력을 알아보고, 중매결혼을 하더라도 그 집안내력을 알아보기를 원했던 거 같다. 사실 이따금씩 돌연변이를(?) 통해서라도 후대에 우수형질이 나타날 수는 있으나... .
천부적이랄까, 천성이랄까, 우리한테는 그러한 게 있을 테니, 일찌감치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진로를 정해주는 교육 프로그램이 아쉽다는 생각을 문득 하게 된다. 현재 독일의 교육방식이 그러하다는데... .
그러한 점에서도 세종께서는 사람을 보는 눈이 탁월했던 것 같다. 심하게 말하자면, 세종대왕 없는 장영실은 없었을 테니.
이제 위 예화들 둘을 아울러보아야겠다. 나는 무지렁이 양친으로부터 위 두 종류의 격언과 속담을 종종 들었다. 그리기에 이들 둘을 수시로 새긴다. 특히,‘외조모- 친모 - 나’로 이어져 온 예술적 재능을 요즘도 갈고 닦는 데 여념이 없다. 아울러, 아예 근본조차 아니 되는 이웃은 경계하게 된다. 왜? 그는 쫄대밭에 자라는 쫄대인 까닭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