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신작

예술이란, 예술가란

윤근택 2018. 12. 4. 18:41

 

                       예술이란, 예술가란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예술이란, 도덕적 잣대로 따지자면, 불륜(不倫)인 경우가 많다. 따라서예술가, 더러는 불륜을 일삼는(?) 이라고 봐도 될 터. 동서고금 빼어난 예술작품을 빚어낸 예술가들은 숫제 바람둥이들. 클래식 마니아인 나는 요즘도 그 예를 작곡가들한테서 자주, 아주 자주 발견하곤 한다. 리스트, 드뷔시, 파가니니 등.

 

   자, 우리네 고전문학에서도 그 예를 찾아보자. 여태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저-기 남원(南原). 그곳에는 두 명기(名妓)가 각기 살았다. 그 한 여인은 춘향(春香)이고 당시 16세 안팎이었으며, 또 한 여인은 강아(江娥;紫微花;眞玉)이며 당시 10대 초반이었다. 이들 양인(兩人)은 각각 이몽룡의 춘향’, ‘송강(松江)정철(鄭澈)의 강아, 빼어난 문학작품에 각각 등장한다. 여기서 잠시. 그렇다면 수필작가 윤근택한테는 남원의 여인네(?)’가 없었냐고? 당연히 있었지! 하지만 하지만... 한 평생 문학 동반자이길 바랐으나, 나한테 끊임없이 문학적 영감을 주던 그 여인네는 난치성 희귀병을 앓아, 투병 중이라는 안타까운 소식을 전해온 지 한 두 해.

 

   이번에는 위 남원의 명기들 가운데 송강의 강아에 관해서만 다루어보도록 하겠다. 위에서 이미 밝혔지만, 그녀는 당시 10대 초반이었다.그러했던 그녀가 관기(官妓)였다니... . 한심스럽게도, 당시에는 이른바 미성년자 보호법따위도 없었다는... . 송강이 전라관찰사로 남원에 나섰을 때 나이는 대략 40대 초반. 그들 나이 차이는 30살 안팎. 송강은 본디 술과 여자를 아주 좋아했던 모양이다. 해서, 선조임금으로부터 대신으로서 주색에 빠졌으니 나랏일을 그르칠 수밖에 없다.”는 논척(論斥)을 받고 파직된 일도 있다. 하더라도, 송강은 그 젖비린내 나는 여자아이를 곧바로 취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대신, ‘강아에게 머리를 얹어 주고 하룻밤 같이했으나, ‘명예로운 첫 서방의 이름을 빌려준다. 이에 반한 강아는 어린 마음에도 그가 큰 사람으로 느껴졌다.

 

   정철은, 비록 어리지만 영리한 강아를 마음으로 사랑하며 한가할 때면 옆에 앉혀 놓고 틈틈이 자신이 지은 사미인곡을 외어 주고, ‘장진주사를 가르쳐 주며 정신적인 교감을 나누었다.

 

강아는 문학인 정철한테 폭 빠지고 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도승지로 임명받은 정철은 열 달 만에 다시 한양으로 떠나게 된다.

 

강아는 그를 붙잡을 수도, 쫓아갈 수도 없는 자신의 신분과 처지에 낙담한 채, 체념의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그러한 강아의 마음을 눈치 챈 정철. 바로 이때 바람둥이 문학인인 송강의 명작(名作),‘詠 紫薇花(자미화를 읊다)’가 탄생한다.

 

 

 

 

 

一園春色紫薇花(봄빛 가득한 동산에 자미화 곱게 피어)

 

纔看佳人勝玉釵(예쁜 얼굴은 옥비녀보다 곱구나)

 

莫向長安樓上望(망루에 올라 장안을 바라보지 마라)

 

滿街爭是戀芳華(거리의 사람들 모두 다 네 모습 사랑하여 다투리)

 

 

 

   어린 소녀의 마음을 그렇게 다 녹이고 간 정철. 사실 그는 이미 아내와 슬하에 42녀를 두고 있었으며, 기방(妓房)에도 수없이 드나들었던 처지. 그러함에도, 순진무구한 강아는 끝끝내 떠나간 문학인 정철을 잊지 못한다.

 

 

 

   두 사람 사이에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 어느 날, 정철이 북녘 끝 강계로 귀양을 갔다는 소식을 들은 강아. 이제야 그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과 귀양살이를 하는 정철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서둘러 행랑을 꾸리고 길을 나선다.

 

   강계로 달려온 강아는, 위리안치(圍籬安置) 되어, 하늘 한 자락 보이지 않게 가시나무로 둘러싸인 초라한 초막에 홀로 앉아 책을 읽는 정철의 초췌한 모습을 보는 순간, 진주 같은 눈물만 뚝뚝 흘렸다.

 

정철은, 자기 앞에 엎드려 우는 어여쁜 여인을 보고 당황하며 누구인지 물었다. 10년 전 강아는 십여 세 안팎의 어린 소녀였으니... .

 

   울음을 그친 강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를 몰라보시는지요? 10년 전 나으리께서 머리를 얹어 주셨던 진옥이옵니다.”

 

   강아는 그를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는 것과 귀양소식을 듣고 적거(謫居) 생활을 보살피고자 부랴부랴 달려왔다는 것을 고백했다.

 

침침한 호롱불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정철은 강아를 볼수록 여인의 향기에 마음이 어지러웠다. 말을 잃은 두 연인. 방안엔 정적만이 무겁게 가라앉는데... .

 

   그때 조용히 강아가 입을 열고, 어린 시절 정철로터 듣고 외웠던 사미인곡장진주사를 읊기 시작했다.

 

   정철은 감격해 했다.

 

  “그것을 네가 아직도 외우느냐?”

 

   강아는 야무지게 대답했다.

 

    ", 나으리께서 가르쳐주신 것을 어찌 잊을 수 있겠사옵니까? 나으리가 그리울 때면 가야금을 타고 마냥 불렀던 노래이옵니다.”

 

   강아의 뺨은 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술상을 마주하고 거나해진 정철이 입을 열었다.

 

   “진옥아, 내가 한 수 읊을 테니, 너는 화답하거라. 지체해서는 아니 되느니라.”

 

 

 

 

 

  옥()이 옥이라커늘

 

  번옥(燔玉)만 여겼더니,

 

  이제야 보아하니 진옥(眞玉)일시 적실(분명) 하다.

 

  나에게 살송곳 있으니 뚫어볼까 하노라.”

 

 

 

  강아는 이내 화답했다.

 

 

 

  “()이 철()이라거든 석철(錫鐵)만 여겼더니

 

  이제야 보아하니

 

  정철(正鐵)일시 분명하다

 

  마침 내게 골풀무 있으니 녹여볼까 하노라."

 

 

 

  강아의 시는 당대의 대문장가인 정철을 깜짝 놀라게 했다. ‘眞玉(그녀 이름)’에 대해 鄭澈(같은 음)’로 그렇게 화답하다니!

 

 

 

  시조집 <권화악부(權花樂府)>에 위 두 글은 남아 있단다.

 

그날 이후, 정철의 유배생활은 조금도 괴롭거나 우울하지 않았다. 마음이 울적할 적이면, 강아는 늘 그의 곁에서 기쁨을 주었고, 가야금을 연주해 주었다.

 

  정철은 유배지에서 부인 안씨한테 서신을 보낼 때면 강아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적어 보냈다고 한다. 부인의 서신 속에도 강아에 대한 투기나 남편에 대한 불평보다는 남편의 적소 생활을 위로해 주는 강아에 대한 고마움이 적혀 있었다니... .

 

  그러나 두 사람의 애정관계는 오래 가지 못했다. 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정철을 한양으로 부른다. 정철은 유배지의 생활을 청산하는 기쁨과 나라에 대한 우국, 강아와 이별 등으로 마음이 산란했을 터.

 

   정철을 떠나보내면서 강아는 아쉬운 마음을 이렇게 읊었다.

 

 

 

오늘밤도 이별하는 사람

 

, 많겠지요. 슬프다 !

 

밝은 달빛만 물 위에 지네 애닯다 !

 

이 밤을 그대는 어디서 자오 나그네 창가엔

 

외로운 기러기 울음뿐이네.

 

 

 

  부인 안씨는 질투는커녕 남편인 정철에게, 강아와 함께 한양에 올 것을 권했지만, 강아는 이를 거절하고 강계에서 혼자 살면서 정철과 그 짧은 사랑을 되새기며 외로운 세월을 보냈다.

 

  이듬해 선조 26(1593) 1218, 정철이 강화에서 우거(寓居)하다가 58세로 생을 마쳤다는 이야기를 들은 강아. 이 세상에 정철이 없다는 가혹한 슬픔 앞에 몸부림치다가 홀연히 그녀도 강계를 떠났다. 그 후, 강아의 소식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시 나이 서른 안팎에 불과했던 강아. 일설에 의하면, 그녀는소심(素心)’이란 법명(法名)으로 비구니가 되었다가, 고양 신원의 송강 묘소를 찾아 한 평생을 마감하였다고 한다.

 

  오늘날 고양시 덕양구에 위치한 송송강마을에는 송강을 기리는 송강문학관과 더불어 강아의 무덤이 모셔져 있고, 무덤 앞의 묘비 전면(前面)에는 義妓江娥墓다섯 글자가 새겨져 있다는데... .

 

 

 

  사실 인터넷상 정철과 강아의 애틋한 러브 스토리는 여러 버전이 있다. 해서, 이미 내 신실한 애독자들께서는 실감나는 버전의 그들 양인(兩人)의 러브 스토리를, 나보다 더 많이 알고 계실는지 모르겠다.

 

  다만, 나는 정식으로 문단 데뷔 이후에도 이미 작가의 길을 30여 년째 걸어오는데, 그들 양인의 러브 스토리를 되새기면서, 가슴이 아파 뒈지겠다’. 아무리 사랑은 국경 불문, 나이 차이 불문이라고들 하지만, 기혼남이, 더군다나 나이 지긋한 남정네가, 나이 어린 여성의 마음을 그렇게 고스란히 녹여 버렸다는 거. 그건 도덕적 잣대로 따지자면, 커다란 죄악 아니냐고? 장래가 구만리 같은 젊은 여성을... . 사실 최경창(崔慶昌)’의 여인, ‘홍랑(洪娘)’의 사연도 너무도 가슴 미어지고. 이미 내가 적어 인터넷 매체에 유포시킨(?) ‘멧버들 갈해 것거에도 있는 이야기지만... .

 

 

 

 ‘멧버들 가려 꺾어 임에게 보내노니,

 

  임께서 주무시는 창문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나거든 외로운 나인가 여기소서.’

 

 

 

   나는 더 이상 그들 선배 문학인들을 막무가내로 부러워하지는 않으리. 참말로, 더는 그들 예술가들을 부러워하지는 않으리. 설령, 온몸과 온 마음을 내게 던져오겠다는 소녀가 나타나더라도, 더는 가슴 아픈 사랑만은 하지 않으리.

 

  ‘, 나의 하느님, 나의 성모님, 어린 저희한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