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신작

대전역을 지나며

윤근택 2018. 12. 23. 03:50

                                대전역(大田驛)을 지나며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서울 막내누님의 발인제(發靷祭)에도 참례(參禮)치 못하고, 이른 새벽 KTX를 타고 대구를 향해야만 했다. 내가 어렵사리 새로 잡은 직장인

어느 아파트의 경비원으로, 지각치 않고 출근하기 위해서는 부득이 그리해야만 했다. 내가 사는 경산의 우리 집에서, 큰딸아이는 스마트폰으로 기차표를 예약해주었다. 뿐더러, 녀석은 도착예정 시간이며 대전역에서 기차를 갈아타야 하는 거며 ... 온갖 사세(些細)한 사항까지 낱낱이 일러 주었다. 특히, 녀석은 전화상으로 재차삼차 당부했다.

   “ 아빠, 그 기차는 꽁무니를 물고 두 대가 달려올 거야. 그러니 대전역에서 다른 차로 갈아타야 해. 아니면 아주 엉뚱한 곳으로 가게 돼. ‘명심! 또 명심!’ 그곳을 지나날 때에는 잠에서 깨어나야 해.”

   참으로, 편한 세상이다. 환갑,진갑 다 지난 나는 아직 ‘3G을 고집하고 있으며, 문자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조차 번거로워 통화만 하는 터에.

나를 태운 이른 새벽의 KTX는 차내방송을 통해, 내가 조치원(鳥致院)’을 지나고 있음을 알려준다.

  ‘, 조치원!’

   그게 벌써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의 일이다.

   때는 창밖에 눈 내리는 1. 야간열차를 타고 길을 나섰던 나는 조치원역에서 내렸다. 역 앞에는 낯선청주(淸州)’로 가는 시내버스가 서 있었다. 사실 충청북도와 충청남도 도계(道界)를 달리함에도, 시내버스가 그렇게 존재했다. 시내버스에 오른 나는 아직도 눈에 선한 그 플라타너스 도로로 청주를 향했으며, 여인숙에서 자는 둥 마는 둥 하고 충북대학(당시는 단과대학이었다.) 입시 고사장에 들어섰다. 그로부터 4년간 그곳 청주시 개신동 산 48번지(지금은 그 주소마저 바뀌었으려나?)’에서 내 젊음을 한껏 누렸다.

   내가 이런저런 추억을 더듬고 있자니, 그야말로 쏜살같은 기차는 차내방송을 통해, 내 기착지(寄着地)인 대전역이 가까워졌음을 알려준다.

  ‘, 대전역!’

   그곳엔들 내 추억이 왜 서려있지 않을라고? 청주에 소재한 대학 재학중에 잘도 지나쳤다. 웬만한 열차는 대전역에서 정차시간이 넉넉했다. 플랫폼에는 가락국수가 있어, 승객들이 줄줄이 내려, 그 뜨끈한 가락국수를 사먹곤 했다. 사실 대전역이면 가락국수, 가락국수면 대전역이었거늘, 그 언제부터 그리되었는지는 몰라도, 요즘은 그 전통이(?) 사라졌다. 바삐 사는 것만이 대단한가. 쌩쌩 달리는 이 KTX도 제법 편리하기는 하지만,‘생각할 겨를추억 더듬기마저 앗아간 점 또한 있으니... .

   대전역이면 빼놓을 수 없는 나의 추억. 사실은 그곳이 서대전역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열차를 타고, 저기 전라북도 이리역으로 향한 적이 있다. 정읍에 살았던 그녀. 그녀는 단순히 문우(文友) 내지 문학적 동반자로만 머물기만을 원치 않았다.

낯선 전북의 이리역 1번 개찰구. 그곳에는 영원한 문학 동반자이길 서로 바랐던 여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딸아이가 하나 있었으며, 남편도 버젓이 살아 있었다. 그녀는 참으로 정열적이었으며 참말로 영민하였다. 그녀의 남편한테서 훔쳐 업고서라도 그 먼 길 돌아오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탄 기차가 이리역을 떠나 서대전역을 향할 적에 그녀는 마치 달리기라도 하듯 플랫폼을 달려 손을 흔들어댈밖에. 나는 서대전역에서 기차를 바꾸어 타고 대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사정. 그녀는 정말로 슬피 울었다. 진작에 서로 만나지 못했던 걸 매우 슬퍼하였다. 그랬던 그녀를 지금은 이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다시 볼 수 없게 되었으니... .

   대전역이면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나의 추억. 그분은 나보다 여덟 살이 많은 부인이었다. 그분은 서울에 현재도 살고 있으며, 나의 문학작품에 매료된 문우(文友)였다. 당시 나는 30대 중반이었으며, 당시 이 대한민국에서 유일했던 통신회사에 몸담고 있었다. 그것도 300:1 경쟁에서 당당히 공채로 합격했던. 그곳괴정동에는 연수원이 소재하며, 나는 그곳에서 1개월가량 연수를 하고 있었다. 머리 터지게 공부하여 95점 이상 점수를 받아야 대리로 승진할 수 있는,이를테면 마지막 찬스였건만, ‘89.25’밖에 획득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홧김에 서방질(?)’이라고, 그분한테 전화를 걸어 데이트 신청을 덜렁 하게 되었다. 얼굴도 한 번 뵈온 적 없는 그분은 위로를 겸해서 대전역까지 시간을 맞추어 잘도 내려왔다. 이윽고, 우린 헤어져야만 했다. 플랫폼을 향한 대전역 지하통로. 나는 그 큰 가방을 내팽개치고, 그분을 지하도 벽면에 밀쳐 뽀뽀, 아니 키스를 하고 말았다. 반항할 틈도 주지 않고서. 행인들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러한 경범죄를(?) 짓게 되었다. 그러했건만, 그러했건만, 어느새 내 머리도 완백(完白).

  ‘, 지나간 시절이여!’

   세월이 꽤 지난 다음, 나는 우여곡절 끝에 대리로 승진할 수 있었고,‘과장까지 오를 수 있었다. 해서, 그곳 대전에 자리한 회사의괴정동 연수원에 연수차 수차례 더 가게 되었다. 그곳 대전역에서 내려, 택시를 잡아타고 가곤 했는데, ‘89.25’만은 내내 맘에 걸렸다. 연필 석 자루를 닳게 해가며 3년 여 예습을 했던 공부였건만... .

하더라도, 25년 여 몸담았던 직장에서 명예퇴직을 감행하고, ‘퇴직자를 위한 라이프(life) 설계(?)’프로그램으로 연수를 갔을 때만은 또 다른 감회가 있었다. 그 동안 내 갈 길 바빠, 태무심(殆無心)했던 사물들 하나하나를 가슴 속에 새기려고 무던히도 애썼다. 대전역에서 내려 역광장에 나서자, 비둘기들이 떼를 지어 오르내렸다. 그 녀석들은 어찌나 그리 행동이 민첩하던지. 오로지 먹고사는 문제에만 매몰(埋沒)된 듯. 때로는 녀석들이 구구대며, 이른바 구수회의(鳩首會議)’를 하기도 했고. 그 또한 먹고 살아가는 문제에 대한 토의 같았다. 하지만, 하지만 대전역 광장, 그 앞에는 이전에 제대로 본 적 없는 노래비(노래)’가 그때서야 보였다는 거 아닌가. 바로 대전 사랑 추억의 노래비가 그것이었다.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

떠나가는 새벽열차 대전 발 050

세상은 잠이 들어 고요한 이 밤

나만이 소리치며 울 줄이야

아 붙잡아도 뿌리치는 목포행 완행열차

기적소리 슬피 우는 눈물에 플렛트 홈(플랫폼)

무정하게 떠나가는 대전 발 050

영원히 변치 말자 맹서했건만

눈물로 헤어지는 쓰라린 심정

아 보슬비에 젖어 우는 목포행 완행열차

 

 

   살펴본즉, 이러하다. 때는 1959년 어느 날. 대전역 플랫폼에서 청춘 남녀 한 쌍이 두 손을 마주 잡고 애절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기관차가 들어오자 남자 혼자서 열차에 올라탔다.

  “대전발 050분 목포행 완행열차가 곧 출발하겠습니다.”

  안내방송이 역사에 울려 퍼지면서 목포행 완행열차는 천천히 플랫폼을 빠져 나갔다.

홀로 남겨진 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배웅한 후, 열차가 더나간 후에도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맞으며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작사가 최치수는 이 장면을 가사로 썼다.

[출처] [악보작업] 대전부르스|작성자 찐교스

 

   나를 태운 KTX는 어느새 대전역에 닿았다. 이곳에 머무르는 것도 잠시. 얄밉게끔 이 녀석은, 이 철마(鐵馬), 새하얗게 닳은 두 가닥의 철로(鐵路) 위를 미끄럼 타듯 달려갈 테지. ‘청송 - 경산 - 대구 ... 대전 - 조치원 - 서울로 이어진 나의 삶도 켜켜이 추억으로 남긴 채로 그렇게 달음질칠 테지.

   어제 그녀도 갔다.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하며 그렇게 갔다. 그 여자는 우리 나이 66, 비교적 젊은 나이에 그러한 자기 집을 두고 홀연히 떠났다. 위암으로 시작된 암이 전이되어 발병 2년여 만에 온갖 내장 다 들어내고 약액으로만 견디다가 떠났다. 그 여자는 이승에서 마지막 날 말없이 뜨거운 눈물만 흘리다가 숨을 거두었단다.

내 청춘도, 내 살붙이들도 그 무엇이 그리 바빠 하나하나 떠나가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 제행무상(諸行無常)이여! , 사고팔고(四苦八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