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신작

나문난로 앞에서(79)

윤근택 2020. 1. 7. 09:20

 

                       나무난로 앞에서

                  -일흔 아홉 번째, 여든 번째 이야기-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79.

  나무난로 맞은편 접의자에 앉았던 외손주녀석.

  녀석은 잠시 어디 다녀올 데가 있다면서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 할애비는 잠자코 기다린다.

  이윽고, 녀석은 제 자리로 돌아왔다. 그 작은 손에는 ‘아이스바’가 들려 있다. 녀석은, “한겨울에 먹는 아이스바가 짱이야!”하며 엄지를 치켜세우며 포장지를 뜯고 그걸 한 입 베문다. 사실 이 할애비의 유년시절엔 한여름에“아이스께끼! 얼음과자과자!”외치며 마을 내 또래 조무래기들 애를 태우던 아저씨가 찾아들곤 했고, 우리는 몇 톨의 마늘이나 헌 고무신 등으로 그걸 바꾸어 먹곤 하였는데... . 아무튼, 녀석은 농막 안으로 가서 냉장고 냉동실에 간직하던 아이스바를 그렇듯 꺼내왔을 터.

  아이스바를 먹던 녀석이 아주 엉뚱한 말을 건네온다.

  “한아버지, 근데(그런데) 냉장고 냉동실에 ‘적치마 상추’·‘청치마 상추’· ‘알타리무’ 따위가 적힌 봉지도 여러 개 들었던데 ‘와이(why)?”

  해서, 나의 노변담화(爐邊談話)는 또 이어갈 수 있게 생겼다.

  “으뜸아, 우선 냉동 보관된 시신에 대한 이야기부터 들려주어야겠구나. ”

  녀석의 눈이 반짝인다. 나는 다음과 같은 요지로 이야기를 들려준다.

  <1967년 1월 12일, 캘리포니아대학의 심리학 교수를 지낸 베드퍼드 박사가 74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사인은 간암. 베드퍼드는 불치 사실을 알게 된 직후부터 냉동을 자처했다. 훗날 의학이 발전하면 소생해 병을 고치겠다는 희망에서다. 그가 최초의 냉동 인간이다. 시신을 특수 처리하고 영하 196도의 액화질소 탱크에 보관하고 있다.>

  녀석은 역시 총명하다.

  “한아버지, 갑자기 생물을 얼리면 생명활동이 멈춰지는 모양이야? 농막 안 냉장고 냉동실의 상추씨도 그런 이유로?”

  맞는 말이다. 지난봄에 그것들 씨앗을 여러 봉지 사왔으나, 또 어떤 이가 선물도 여러 종류의 씨앗을 주었기에 남아서 그리하였다. 사실 상추의 ‘발아보증기간’은 2년으로 적혀 있었다. 이 할애비는 여러 종류의 작물 씨앗을 곧잘 냉동실에 보관하곤 한다.

  녀석은 턱을 두 손으로 괴고 자못 진지하게 이 할애비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더욱 흥이 난 나는 이미 적어 인터넷 매체에 발표한 ‘신비스런 씨앗’ 등 수 편의 수필작품의 내용을 다시 요약하여 녀석한테 다음과 같은 요지로 들려준다.

  ‘저 캐나다의 이탄늪(泥炭늪)에서는 ‘루핀(lupine; 층층이부채꽃)’이 무려 10,000년여 지난 다음에 싹을 틔운 예가 있다고 한다. 저 만주의 어느 호수 바닥에서는 연자육(蓮子肉; 연꽃 씨앗)이 마찬가지로 10,000년여 지난 다음에 싹을 틔우기도 하였단다. 그밖에도 100년여 전 종자가 발아한 예도 심심찮게 보고되는 모양이다. 사실 ‘종자학(種子學)’에서는 씨앗의 수명을 그렇게 멀리 잡지 않는다. ‘단명종자(短命種子)’는 그 수명이 1~2년이고, 고추•양파•메밀•토당귀•옥수수 등이 여기에 속한다. ‘상명종자(常命種子)’는 그 수명이 2~3년이고,벼•쌀벼•완두•목화•토마토 등이 여기에 속한다. 그리고 ‘장명종자(長命種子)’는 그 수명이 4~6년이고,콩•녹두•오이•배추•수박 등이 여기에 속한다. 그러나 이 또한 단정적으로 말할 수도 없단다. 환경조건, 즉 습도•온도•광선 등의 요소에 따라 그 수명이 사뭇 달라진다고 한다. 대체로, 목본류(木本類 ; 나무)의 씨앗은, 초본류(草本類;풀)의 그것보다 장수한다고 한다. 또 그 씨앗 껍질[種皮]의 견고함 정도에 따라서도 그 수명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위에서 소개한 ‘연자육’의 경우, 종피가 아주 견고하여, 싹을 인위적으로 틔우자면, 오히려 그 껍질을 펜치 등으로 잘라주어야 한다. 누가 일러주기에, 호기심에 나도 연(蓮)을 발아시키고자 그리 해보았다. 진실로 그러하였다. 마치 계란을 깨어먹을 때처럼 그 여문 ‘연’의 껍질을 펜치로 도려내고 물컵에 담가두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싹을 파랗게 틔웠다. 씨앗의 수명을, 농사에 적용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첫째, ‘춘화처리(春化處理;vernaliztion)’다. 가을보리를 봄에 파종해도 결실을 볼 수 있는 걸 이르는 말이다. 저 유명한 우크라이나 학자, ‘리센코(Lysenko)’가 약품 처리 등으로 이를 개발하였다.

  둘째, ‘발아촉진법’이다. 위에서 살짝 ‘연꽃씨’ 발아촉진법을 소개하였다. 이는 ‘기계적 발아촉진법’ 또는 ‘물리적 발아촉진법’에 해당한다. 종자 껍질에 발린 파라핀류의 발아저해물질을, 약한 황산 등으로 녹여, 잠을 깨우는[休眠打破] 방식도 있다. 이를 ‘화학적 발아촉진법’이라고 한다. 이밖에도 여러 가지 방식이 더 있다. 이 모두가 본디 종자가 지니고 있던 고유의 ‘라이프 플랜(life-plan)’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것이기도 하다.

  끝으로, ‘보다 오래도록 종자의 활력(活力)을 유지하려면?’이란 새로운 문제에 다다르게 된다. 씨앗에 따라서 그 발아의 메커니즘은 천차만별이다. 씨앗은 자기의 후손인 싹이 무럭무럭 자라기에 가장 적합한 시기를 골라, 수분•온도•산소 등의 필수요소가 최적이라고 느낄 때만 발아한다는 걸 지나쳐 보았을 리 없다. 그래서 수분도,온도도,산소도 최대한 공급하지 않으면 될 거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건조한 암실(暗室)에, 저온으로, 진공상태로 보관하게 된 것이다. 소위, ‘종자은행’이란 게 있다. 바로 그러한 곳이다. (이상 본인의 수필 ‘신비스런 씨앗’에서 따옴.)

  위와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자, 녀석은 다소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듯하면서도 매우 흥미롭게 받아들인다.

  “한아버지, 참으로 신기해. 으뜸이는 앞으로 냉장고 냉동실 문을 함부로 자주 열지 않을 거야. 그 안에 잠자는 채소 씨앗들이 잠을 자니깐.”


  80.

  벌써 여러날째 내 ‘만돌이농장’ 과목(果木)들 전정작업(剪定作業)을 하고 있다. 그 쇄설물(瑣屑物)들을 대형 커터(cutter) 내지 로퍼(lopper)로 몽땅몽땅 잘라 당해 과목 발치에다 수북수북 쌓아 두곤 한다. 그 쇄설물 가운데에서도 제법 굵은 것들은 따로 모아 나무난로 땔감으로 쓰곤 한다.

  오늘은 또 그렇게 자두나무 등걸(장작)을 안고 와서 나무난로에 집어넣는데, 녀석이 한마디 한다.

  “한아버지, 저 아랫마을 할아버지들은 과일나무 전정한 우죽들을 모두 모아 불사지르고 그 나무 아래가 깨끗하던데, 한아버지는 왜 그렇게 지저분하게 남겨? 그러다보니 보기도 안 좋고 말이야!”

  고 녀석, 그저 겉보기로만 과일나무 발치마다가 깨끗하면 좋은 줄로 아는 모양이다.

  “으뜸아, 이 할애비는 다 생각이 있어 그리한단다. 너 ‘배일호’라는 가수의 ‘신토불이(身土不二)’란 뽕짝가요 알고 있니?”

그러자 녀석은 이내 앞 소절을 불러댄다.

  ‘ 너는 누구냐 나는 누구냐/이 땅에 태어난 우리 모두 신토불이... .’

  신토불이란, 몸과 땅은 둘이 아니라는 뜻으로, 자신이 사는 땅에서 나는 것을 먹어야 체질에 잘 맞는다는 뜻이다.

  “으뜸아, 아가 가시고기는 어버이의 살점을 뜯어 먹고 자란다지 않던? 고둥은 자기 뱃속에 알을 품고, 아가 고둥들은 깨어나 자기 엄마 살점을 다 뜯어먹고 밖으로 나온다지 않던?”

  녀석은 어디서 들은 것 같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해서, 할애비는 아가고둥 형제가 물속을 헤엄쳐 다니다가 빈 껍질이 되어 물 위에 떠다니는 엄마 광경을 보고 나눈 이야기도 곁들여준다.

  “형아야, 저 게 뭐야? ”

  “음, 저거 빈 배가 떠다는 거야!”

  그 우화(寓話)를 듣던 녀석은 양미간을 찌푸린다.

  이 할애비가 과일나무 전정을 하면서 그 쇄설물을 당해 과일나무 발치에다 짧게짧게 잘라 깔아주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해준다.

  여러해살이 나무들은 한해살이 작물들과 달리, 그 발치가 걸리적거리지 않는다. 우죽 등 쇄설물은 한 몸체였던 관계로, 나무의 성장에 필요한 자양분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러니 여타 유기질 비료성분보다 유용하다. 그러한 걸 생각없이 불살라버리거나 땔감으로 모조리 써버리는 것은 어리석다. 내가 과일나무 발치를 다소 어지럽게 두는 것도 신토불이의 실천이다. 또한, 농부인 내가 과일을 얻었으니, 그 잔해물만이라도 과일나무한테 되돌려주어야 한다. 그 잔해물들은 해마다 쌓이고 또 그것들은 시나브로 삭아 흙으로 돌아가도록 한다는 거.

  “한아버지, 그런 깊은 뜻이?”

  ‘그런 깊은 뜻’이라니! 녀석의 말버릇하고는...

  이번에는 녀석이 자두나무한테 되돌려주자고 함에도 불구하고, 자두나무 장작을 하나 집어 나무난로 불문[火門]에 집어넣는다.

 

 

 

(다음 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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