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신작

나무난로 앞에서(84)

윤근택 2020. 1. 11. 02:05

작가의 말)

제 신실한 애독자님들께서도 혹시 잊으신 건 아니겠지요?

저는 아직도 오지 않은 미래의 외손주와 노변담화(爐邊談話)를

이렇듯 끊임없이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요.

 

                   나무난로 앞에서

            -여든 세 번째, 여든 네 번째 이야기-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83.

  나무난로 앞에서 따뜻한 불기운에 의자에 앉은 채 깜박 잠이 들었던가 보다. 맞은편 접의자에 앉은 외손주녀석이 외마디소리를 한다.

  “손!”

  깜짝 깨어나 녀석을 보니까, 왼손 검지손가락에 피가 흘러내린다. 내가 따스한 난롯가에서 여러 과일나무에 봄날 접을 하고자, 접도(椄刀)며 전정가위며 톱이며 온갖 연장을 숫돌, 사포, 줄 등으로 갈고 쓸고 있었는데, 녀석이 자발없이 그 접도로 이 할애비가 접수(椄穗)를 깎듯 연필을 깎듯 나뭇가지로 흉내를 내다가 벌어진 일. 녀석의 피나는 손가락 부위를 꼭 눌러 쥐고 피가 멈추게 한 다음, 데리고 농막 안으로 들어선다. 얼른 ‘후시딘연고’를 찾아 바르고 일회용 밴드로 상처 난 부위를 처매준다. 그나마 다행히 상처가 그리 깊지 않다.

  조손은 다시 나무난로 곁. 안정을 되찾은 듯 녀석이 말한다.

  “한아버지, 그러고 보니 으뜸이의 손가락도 이젠 접(接)이 된 거네? 접하는 칼로 벴고, 테이프도 탱탱 감았으니깐.”

  녀석의 연상력(聯想力)도 알아줘야겠다.

  “으뜸아, 그래 상처를 아물게 하는 과정은 똑 같지. 그 이야기는 잠시 후에 마저 들려주겠는데, 그러기에 앞서 ‘후시딘연고’이야기부터.”

  나는 녀석한테 후시딘연고에 관해 아래와 같은 요지로 설명해준다.(아래 단락의 이야기는 ‘상처치료제에 관해’라는 본인의 수필에서 일부 그대로 따온다.)

  후시딘’은 일본식 표기인 듯하다. 이 후시딘은 어느 일본인이 최초 원숭이 똥에서 얻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시 원숭이가 먹은 식물을 거꾸로 추적해본즉,‘비단초(땅빈대)’.후시딘은 ‘Fusidin’을 일컫고, 이는 다시 ‘Fusidin acid natrium(푸시딘산나트륨)’에서 왔음을 알게 되었다. 푸시딘산나트륨이 몸속에 침입한 병균을 죽이는 효능이 있어, 이를 주성분으로 해서 종기나 상처에 바르는 약제로 개발한 것임을.

  ‘마데카솔’은, ‘madecassic acid(마데카식산)’에서 온 말. ‘동국제약’은 그 주성분을 약제명으로 약간만 변형해서 쓴 셈이다. 이 마데카솔은 ‘센텔라 아시아티카(centella asiatica)’라는 학명(學名)을 지닌 식물의 추출물에서 얻었다는데... . ‘centella’는 ‘병풀[甁草;병 모양으로 생겨서(?) ’병꽃나무‘에 대응한 말로 쓰인 듯.)]’을 일컫고, ‘asiatica’는 ‘아시아의’를 의미한다. 그러니 ‘센텔라 아시아티카‘는 ’아시아에서 주로 나는 병풀’인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 남쪽 지방을 비롯한 인도, 중국 등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식물임을 알게 되었고, 그 생김새도 식물도감을 통해 익혔다. 이 ‘병풀’은 ‘호랑이풀’이라고도 일컬어지며,‘피막이풀’이란 식물과 함께 그 추출물이 마데카솔의 주성분인 셈인데, 인간들이 그 상처치유의 효능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 비밀은, 인도의 호랑이가 풀어주었다니, 흥미롭지 아니한가. 인도에 사는 호랑이들 가운데 상처를 입은 호랑이들이 그 병풀숲에 자주 뒹구는 걸 그쪽 사람들이 목격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호랑이들이 얼마 아니 가서 상처가 치유되는 걸 보고서... . 꼭히 마데카솔은 아니지만, 내가 추측컨대, 중국 여행에서 다녀오는 분들이 가끔씩 나한테 선물로 건네주는 그 ‘호랑이고약(병에는 호랑이 그림까지 붙어 있다.)’도 실제로는 호랑이한테서 얻은 게 아니라 병풀에서 얻은 게 아닐까 싶다. 사실 내가 근지러운 신체 부위에 그 ‘호랑이고약’을 바르기만 하면 따끔거린다 싶을 만치 시원하였고, 상처가 잘 낫기도 하였다. 그런 까닭에 그 ‘호랑이고약’을 즐겨 쓰는 편이다.(이상 본인의 수필, ‘상처치료제에 관해’에서 따옴.)

  제법 장황한 위의 후시딘과 마데카솔 이야기를 듣던 녀석이 나름대로 요점정리를(?) 잘도 한다.

  “ 한아버지, 후시딘은 원숭이가 즐겨먹는 땅빈대풀에서, 마데카솔은 호랑이가 상처를 부빈 병풀에서 얻는다?”

  이 할애비는 미뤄뒀던 ‘상처 아물기 메커니즘’ 이야기를 녀석한테 아래와 같이 들려준다.

  손가락이든 나뭇가지든 상처가 나면, ‘삐오!삐오!삐오!’ 119구급차가 그곳으로 달려가야 하는 이치. 우리네 상처 난 부위가 욱신거리는 것은, 호르몬 등 상처 아물기에 유용한 물질이 그곳에 집중되는 생리현상이다. 마찬가지로, 식물들도 상처 난 부위에 그렇듯 ‘옥신’ 따위의 호르몬이 집중된다. 이 할애비의 나무접하기, 휘묻이 하기, 꺾꽂이 하기 등은 그 메커니즘을 그대로 응용한 것이다. 식물도 인위적이든 자연적이든 상처 난 부위를 아물게 하고자 영양분을 그곳에 보내 물사마귀 모양의 조직(組織)을 만들어 낸다. 그걸 ‘유상조직(癒傷組織;상처 아물게 하는 조직)’ 혹은 ‘칼루스(callus)’라고 부른다. 이 유상조직의 능력은 부정아(不定芽)·부정근(不定根)·형성층(形成層 ;부름켜)를 만들어낸다는 점. 이 할애비가 왕보리수와 왜철쭉을 꺾꽂이하여 개체수를 늘리는 것은 부정아를 얻는 일,이 할애비가 슈퍼뽕나무와 왜생사과나무의 발치 등걸에 상처를 내어 휘묻이와 더북나기를 일삼는 일은 부정근을 많이 얻는 일.

  위와 같은 이야기를 듣던 녀석은 대체 누구 새끼인지 모르겠다.

  “한아버지, 그라뭐(그러면) 상처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네?”

  정말로 학습능력이(?) 뛰어난 녀석이다.

  “옳은 이야기야! 나무는 상처 난 곳을 속히 아물게 한다는 것이, 그만 새로운 개체로 그 수효가 늘어나게 되는 거야! 이는 종족번식의 본능과 맞닿아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녀석의 반응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한아버지, 어른들은 아가야들이 넘어져 무릎을 깨면 늘 하는 말씀이 있었어. ‘오냐,우리 아가 쑥쑥 잘도 큰다!’하고서 말이야!”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84.

  제법 그 굵기가 꽤 굵은 장작은 도끼로 패지만, 나는 가급적이면 장작을 톱으로 써는 것으로 만족해한다. 그러면 나무난로의 땔감으로서 ‘불감’ 즉, 화력(火力)이 좋아지기에.

  맞은편 접의자에 앉은 외손주녁석이 그렇게 톱으로 자른 소나무 장작을 하나 들고, 그 절단면(切斷面)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묻는다.

  “한아버지, 이 비뚤비뚤한 동그라미들은 왜 생기는 거야? 언젠가 으뜸이한테 이미 알려준 것도 같은데 잊어버렸어.”

  녀석은 ‘나이테’에 대한 질문을 그렇게 한다. 참으로 좋은 궁금증이다.

  “으뜸아, 그걸 나이테라고 해. 어른들은 ‘연륜(年輪)’이란 말을 즐겨 써.”

  그러자 녀석은 그 동그라미 개수를 세며 말한다.

  “ 한아버지, 그라뭐(그러면) 이 동그라미가 한 해 하나씩 생긴다는 말이야? ”

  해서, 이 할애비는 녀석한테 아래와 같은 요지로 좔좔 알려준다.

나이테는 한 해 두 개가 생긴다. 봄에 하나, 가을에 하나. 봄에 생기는 걸 ‘춘재(春材)’라 하고 가을에 생기는 걸 ‘추재(秋材)’라고 한다. 나이테는 부름켜[形成層]의 성장흔적으로, 봄에는 왕성하게 세포가 분열하고 가을에는 쇠약해진다. 해서, 춘재의 폭은 추재의 폭보다 넓다. 물론 겨울에는 나무의 생장이 멈춰 나이테가 생겨나지 않는다. 나무의 나이를 셀 적에는 전체 동그라미 개수의 절반으로 잡아야 한다. 춘재,추재,춘재,추재...... 교대로 나타나기에.

  내가 여기까지 이야기를 하자, 녀석이 긴급질문을(?) 한다.

  “한아버지, 만약에 요즘처럼 이상기후로 겨울에도 따뜻하면 나무는 자랄 테고, 그러면 나이테가 뒤죽박죽 더 생길 수도 있겠네? ”

  고놈 참 영리하다.

  “으뜸아, 맞는 말이야. 충분히 그럴 수도 있거든. 해서, 이 할애비의 노은사(老恩師)께서는 나무의 나이테가 그 나무의 살아온 역사를 고스란히 지녔다고 말씀하시곤 했어.”

  사실 어느 노거수(老巨樹)의 나이테만 잘 연구분석해도 100년간 아니 1000년간 그곳 기상정보를 다 취득할 수 있을 것이다. 추위, 더위, 장마, 가뭄 등 온갖 정보가 거기 다 들어 있으니까.

  녀석은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이 할애비는 흥이 나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더 보태어 준다. 4계절이 뚜렷한 곳에서 자라는 나무일수록 나이테도 뚜렷하지만, 같은 나무일지라도 열대지방에서 일 년 내내 일정한 기후 조건에서는 나이테가 아예 생기지 않는다는 거. 열대지방이라도 건기(乾期)와 습기(濕期)가 교차되는 곳 나무는 나이테가 생긴다는 거. 나무의 나이테는 해가 거듭될수록 그 동심륜(同心輪)의 중심부 세포는 활력을 잃고 자신이 도맡아 하던 물관[水管] 체관[篩管]의 기능을 바깥쪽의 나이테한테 맡기게 된다. 그리고 나이테의 중심부는 여러 물질로 채워져 바깥쪽 나이테들에 비해 진하고 아름다운 빛을 지니게 된다는 거.

  위와 같은 이야기를 듣고 있던 녀석이 뭔가 짚이는 게 있는지 마치 어른처럼 말한다.

  “한아버지, 으뜸이한테 방금 전에 ‘나이테가 늙어갈수록 진하고 아름다운 빛을 띠게 된다’고 말했어. 그러니 한아버지 한머니가 되어가는 것도 우리들 아이들보다 더 아름답게 되어가는 거잖아? 글고(그리고)... .”

  녀석이 대체 무엇을 더 말하려는 걸까? 혹시 우리네 노인들이 너무도 자주 너무도 흔히 쓰는 말, ‘연륜(年輪)’이란 낱말이 퍼득 떠올랐을까? 아니면, 일년 내내 자라는‘늘푸른잎뾰족나무[상록침엽수]’보다는‘잎떨이넓은잎나무[낙엽활엽수]’의 나이테가 더 곱고 뚜렷하며 재질이 야무질 거라고 이내 떠올린 걸까?

  이 할애비는 녀석한테 다시 힘주어, 나이테가 기후의 변화가 뚜렷한 곳에서 자라는 나무한테서만 뚜렷하고 아름답게 나타난다는 걸 일러준다. 마찬가지로, 이 할애비의 고향인 경북 청송에서 나는 ‘청송꿀사과’도 일교차(日較差)가 심한 그곳 산골 기후 덕분에 얻어지는 것임을 알려준다. 마침 녀석이 이 할애비의 고향에서 부쳐온 사과를 베어먹고 있는 터. 사실 그 사과의 속도 나무의 나이테처럼 ‘켜’가 겹겹 생겨 있지 않느냐고. 그리고 내가 녀석한테 막 사과를 깎아주고 손에 쥐고 있는 이 과도(果刀)마저도 대장장이가 ‘담금질’과 ‘풀림질’을 거듭하여 만들어내었다고.

  여기까지 귀 기울여 듣고 있던 외손주녀석. 녀석은 마치 우등생처럼 나름대로 요점정리를 이번에도 잘도 한다.

  “한아버지, 그러고 보니 모두 다 나이테야! ‘나이트’가 아니고 나이테!”

  하더라도, 이 할애비는 녀석의 그 어린 나이테가 마냥 부러운 걸.

 

(다음 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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