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신작

나무난로 앞에서(92)

윤근택 2020. 2. 12. 14:16



              나무난로 앞에서

            -아흔 한 번째, 아흔 두 번째 이야기-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91.

  조손은 또 다시 나무난롯가. 맞은편 접의자에 앉은 외손주녀석도 봄을 무척 기다리나보다.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커다란 유리창 창턱에 기대서서 저기 註1)선의산(仙義山)을 내다보며 말한다.

  “한아버지, 저 능선을 한번 봐. 능선에 늘어선 나무들이 마치 백마(白馬)의 갈기같애.”

  녀석은 잔설(殘雪)로 말미암아 산은 백마처럼 보이고, 그 능선에 늘어선 참나무류의 낙엽활엽수들은 어우러져 말의 갈기처럼 보인다고 말하는 것이다. 도대체 누구의 새끼인지 그저 놀랍기만 하다.

  “으뜸아, 정말 그런 거 같구나. 내가 보기에도 저 능선의 나무들은 말의 갈기 같은 걸! 또,참빗의 살처럼 까칠해 보이기도 하고 말이야!”

  녀석은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와 앉으며 또 말을 이어간다.

  “한아버지, 저 능선의 나무들은 참으로 춥겠다? 우리와 달리, 난로도 없고... .”

  이 할애비는 문득 애국가 제2절이 떠올라 부르게 된다.

  ‘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바람 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그러자 녀석도 그 제2절을 다시 부르자고 제의한다. 녀석이 애국가를 제4절까지 언제 다 익힌 것인지... .

  하더라도, 그 노랫말을 지은 분한테는 다소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내 귀여운 외손주녀석한테만은 다소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어야겠다.

  “으뜸아, 애국가 제2절에서 말한 대로 ,‘바람이나 서리’가 되었든,‘바람서리’ 즉 ‘ 폭풍우로 인하여 농업이나 어업 등이 피해를 입는 일’이 되었든, ‘바람등쌀’이 되었든, ‘여럿 가운데 사이’를 일컫는 ‘서리’ ‘바람 서리(사이)’가 되었든 그러한 환경에서도 불변하게 기상을 지닌 게 소나무만은 아니란다. 또 그렇게 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야! 오히려 웃자란 소나무는 저 선의산 능선에 설 수도 없는 걸!”

  이 말을 듣고 있던 녀석이 눈이 휘둥그레진다.

  “으뜸아, 그게 말이다. 그게 말이다. 한라산 높이 ‘한번 구경 오십이오(1,950미터)’, 백두산 높이 ‘이질사사[2,744미터; 시골 내 백시(伯氏)의 일반전화 뒷 번호와 동일함.)’. 그 높은 산꼭대기에는 키 큰 소나무 따위의 나무가 없는 걸! 왜? 그야말로 ‘바람등쌀’에 살아남을 수 없기에 그러하지. 대신, 그러한 산꼭대기로 올라갈수록 차츰 키 작은 나무들이 무리지어 산다? 높이 올라갈수록 아예 ‘나 죽었소!’하면서 몸을 낮추고 산다? ”

  이 할애비의 강의가(?) 이어지자, 녀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한아버지, 으뜸이는 무슨 뜻인지 금세 알겠다? 굳이 ‘나 잘 났소!’ 하지 않더라고 높은 산봉우리에 선 나무는, 그 산 높이만큼 키를 따먹고 들어가니, 그 산에서 가장 키 큰 나무가 되잖아.”

  참말로, 녀석은 대단히 영리한 아이다. 신명이 난 이 할애비는 ‘생태종(生態種)’의 개념과 더불어 그에 해당하는 몇몇 나무를 알려준다.

  생태종이란, 같은 종(種)에 속하나, 사는 곳에 따라 다른 형태나 성질을 가지며 그 특징이 유전적으로 굳어지는 무리를 일컫는다. 사는 장소의 환경조건에 적응되나, 종 분화에까지 이르지 않으며 교배가 가능하다. 향나무 가운데에는 ‘누운 향나무’, 주목 가운데에는 ‘누운 주목’이 바로 생태종에 해당한다. 설령, 이들을 환경조건이 좋은 곳에 옮겨 심어도 바로 서지 않는다. 한라산을 비롯한 북한 고산지대에서만 자라는 진달래과의 ‘들쭉나무’도 일종의 생태종이라고 할 수 있겠고, 땅거죽에 기다시피하며 자란다. 들쭉나무 열매로 빚은 ‘들쭉술’은 북한당국이 자랑하는 술.

  영리한 나의 외손주녀석은 이번에도 나름대로 오늘의 노변담화를 요점정리(?)한다.

  “누구든지 자기 잘 났다고 뻐기면 다친다? 화살이나 총탄이 마구 날아 올 적에는 ‘마카 다 수그리(‘모두 다 수그려라.’라의 경상도 사투리.).”

  이 할애비는 한바탕 호방하게 웃어젖히고, 녀석한테 질문을 하나 던진다.

  “으뜸아, 어른들이 이런 말씀도 하시곤 했어. ‘콩나물시루에서 버르장머리 없는 콩나물은 누워서도 잘 자란다.’하고서. 이 말은 또 어떻게 생각해?”

  그러자 녀석이 그 답을 다음 기회로 미루겠다고 하고 한마디 한다.

  “한아버지, 에이, 잘 나가다가 웬 일?”

  머쓱해진 나는 불문[火門]을 열어 장작개비 하나를 더 넣는다.


  註1)선의산(仙義山)

  내 ‘만돌이농장’이 자리한 경산시 남천면 송백리와 청도군 매전면 두곡리의 경계인 산. 해발고도 756미터이며 이름난 산으로 알려져 있다. 마침 정상의 암석이 평탄하고 넓어 말의 안장과 같다고 하여 ‘마안산(馬鞍山)’으로 부르기도 한다. 오늘 내 외손주녀석은 그 ‘말의 안장’을 생각하여 산 능선 광경을‘백마와 갈기’를 떠올렸을까?


  92.

  낮에 아랫녘 ‘한(韓) ㅇㅇ’씨가 다녀갔다. 이제 나무난롯가에는 다시 조손이 나무난로를 사이에 두고 오붓하게 마주 앉아있다.

외손주녀석이 말을 걸어온다.

  “한아버지, 아까 다녀간 그 아저씨는 겨울 내내 복숭아나무 가지치기를 한다면서? 글고(그리고) 그 아저씨는 한아버지가 작업한‘씨 없는 쟁반감[盤柴]’가지치기가 너무 강해서, 나무가 반발하는 등 뒤탈이 생길 거라던데?”

  고 녀석, 호기심하고는... .

  해서, 이 할애비는 오늘 개조식(個條式)으로,가지치기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어야겠다.

  가. ‘전정(剪定)’과 ‘정지(整枝)’차이점 전정(剪定)은 과수원에서 세부적인 가지를 솎아주거나 잘라주는 일련의 행동을 의미한다. 과일재배에서 수형(樹形)을 형성하기 위해서 가지를 자르는 행동을 나타내는 정지(整枝)와는 차이가 있다. 보통 ‘가지치기[剪枝]’라고 부르지만, 전정은 보다 ‘시스템적 개념’ 내지 ‘과수원 경영의 개념’인 셈이다. 그러니 적어도 과수농가 등 전문가들은 ‘전지’또는 ‘정지’라는 말 대신, 그 외연이 넓은 ‘전정’으로 불러버릇해야 한다.

  나. 전정의 목적

  부러지거나 약해서 이상이 발생한 가지를 제거한다. 또한 혼잡한 부분의 가지를 정리해 나간다. 열매가 열릴 가지 수를 제한함으로써 지나치게 많이 열리는 현상을 방지한다. 어미가지 끝에 새 가지를 많이 발생하게 한다. 이를 통해, 결실부(結實部) 위치가 높아지고 기부(基部) 쪽이 텅 비는 현상을 방지한다.

  다. 전정의 종류

  가지의 기부를 잘라내는 행위를 ‘솎음전정’이라고 한다. 가지의 중간을 잘라서 튼튼한 새 가지를 만들어 나가려는 행위를 ‘자름전정’이라고 한다. 보통 이 두 가지를 혼용하는 경우가 많다.

과일의 종류에 따라 가지의 발생이나 자라는 방식, 결과가 다르다. 따라서, 전정방법도 각각 그에 따라 차이가 난다. 대표적으로 감귤류 같이 가볍게 전정하는 경우가 있고, 반면 포도와 같이 매년 크게 전정하는 경우가 있다.

  라. 강전정(强剪定)과 약전정(弱剪定)

  나의 경험상, 같은 감나무 수종(樹種)이지만, 쟁반감 내지 떫은감은 약전정, 단감은 강전정이 바람직하다. 감나무는 이른바 잠아력(潛芽力)이 빼어나서, 굵은 줄기를 마치 ‘마루타’처럼 잘라도 거기서 새순이 터져나온다. 외손주녀석이 아랫녘 ‘한 ㅇㅇ’씨가 들려주고 간 우려(?) 즉,‘나무가 반발하는 등 뒤탈’을 다시 들먹인 이유와 관련이 있다. 사실 나는 그 이론을 잘 알면서도 해마다 감나무 전정을 할 적에 다소 강하게 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자 감나무가 ‘한씨’말마따나 반발하여 햇가지를 내어놓되, ‘더북나기[叢生;徒長枝]’로 내어놓곤 하였다. 그러면 열매를 충실하게 해야 할 자양분을 도장지들이 빼앗아 소비하게 된다.

  마. ‘기부 우세성(基部 優勢性)’과 ‘정부 우세성(頂部 優勢性)

  기부 우세성은, 가지의 아랫부분에 난 눈 또는 가지가 왕성하게 자라는 성질을 말한다. 복숭아 등 핵과류는 기부 우세성이다. 정부 우세성은, 가지의 끝에 있는 눈 또는 가지가 왕성하게 자라는 성질을 일컫는다. 이러한 나무의 성질은 전정과 맞물려 있다.

  바. 꽃 피고 열매 맺는 습성

  ㅇ 그해 생겨나는 가지에 과일 달리는 과수들 : 감·대추·포도·밤·오디 등.

  ㅇ 1년생 가지에서 과일 달리는 과수들 : 복숭아·자두·매실·살구 등.

  ㅇ 2년생 가지에서 과일 달리는 과수들 : 사과·배·모과 등.

이 할애비가 전정과 관련해서 여기까지 이야기를 하자, 외손주녀석은 머리가 지끈댄다며 이맛살을 찌푸린다. 대신, 나름대로 이렇게 요점정리를 한다.

  “한아버지, 가지치기도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네? 프로, 맞어, 프로들만이 할 수 있는 게 가지치기! 함부로 자르면 절단!”

  이 할애비는 전정과 유사한 개념의 작업들에 관해 마저 들려준다.

  “으뜸아, 적심(摘心)은 이 할애비가 콩이나 들깨를 재배하면서 원순을 막는 일. 그러면 ‘잎겨드랑이’에서 여러 새순이 나와 열매를 많이 맺은 일. ‘꽃따기’는 꽃이나 열매의 품질을 좋게 하기 위해 알맞은 수의 꽃만 남기고 나머지를 뽑아내는 일. ‘알솎기’는 과수 재배에서 너무 많이 달린 열매를 솎아 내는 일. 으뜸아, 그런데 그런데 이 할애비는 말이다. ‘알솎이’를 생각할 적마다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거든. 뜨거운 눈물이 막 쏟아질 것 같거든.”

  맞은편 접의자에 앉은 외손주녀석은 고개를 연신 갸우뚱댄다.

  “으뜸아, 너도 잘 알잖니? 이 외할애비는 열 남매 가운데 아홉 번째로 태어났잖니? 만약에 만약에 네 외종모님이시자 내 어머니이신 그분이 알솎이를(?) 했더라면, 나는 이 세상에 남아 있지 못했을 테니까 말이야!”

  이 말을 듣고 있던 녀석이 아이답잖게 말한다.

  “한아버지, 이 세상에 아니 계시는 큰외한머니(외종조모님)는 참으로 훌륭한 분이셨어. 그 많은 아이들을 다 탈 없이 키웠으니깐. 글고(그리고) 이렇게 으뜸이도 대를 이어 이 세상에 태어나도록 하셨으니깐.”

  참으로 기특한 아이다. 해서, 녀석한테 살아생전 내 어머니가 자주 하던 말을 마저 들려준다.

  “으뜸아, 네 ‘큰외할머니(외종조모)’께서는 이웃집 아이들이나 젊은이들이 비록 잘못 있어도 너그럽게 봐 주셨어. ‘남의 집 장순(長筍;자라는 햇순 가지)을 함부로 잡을(꺾을) 수는 없어. 나도 자식 키우는 사람인데... .’하시면서 말이야! ”

  말귀를 알아차린 외손주녀석은 그 작은 손으로 손뼉을 치며 말한다.

  “아주 훌륭한 말씀! 그렇지만 농부가 나무에 전정가위를 대는 것은, 그 나무를 사랑하기 때문이기도 한 걸!”

  그러고 보니, 내 어린 외손주녀석은 어느새 ‘꼬마 철학자’ 경지에까지 닿은 것 같다.

 

 

(다음 호 계속)

 

 

 

* 이 글은 본인의 블로그, 이슬아지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본인의 카페 이슬아지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