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난로 앞에서(94)
나무난로 앞에서
-아흔 세 번째, 아흔 네 번째 이야기-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93.
조손은 또 다시 나무난롯가. 맞은편 접의자에 앉은 외손주녀석은, 커다란 유리창 밖 뜨락에 선 나무를 가리키며 묻는다.
“한아버지, 저 나무 이름은 뭐야? 이 한겨울에도 늠름하게 푸른빛을 띠고 서 있네!”
녀석이 ‘구상(具常)나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때마침 이야기꺼리가 달리는 터에, 아주 잘 되었다.
“으뜸아, 저 나무 이름은 ‘구상나무’인 걸! 세계에서 우리나라에서만 자라는 나무.”
그러자 녀석은 저 구상나무의 내력을 낱낱이 캐묻는다.
그러고 보니, 저 구상나무의 나이가 대략 20살 정도 된다. 우리 내외가 이 산골짝 외진 이 곳에 노후를 생각해서 농토를 마련하자, 아내는 당시 산악회 지리산 등산 가방에 한 뼘 크기의 유목(幼木) 한 그루를 캐 와서 기념식수를 했다. 그랬던 것이 저렇듯 키가 훌쩍 커서 감나무들 서리에 의초롭게 서 있다.
“으뜸아, 저 구상나무에 관해 이 할애비가 아는 데까지 다 들려주련?”
그러자 녀석은 “파팅(파이팅)!”한다. 이하는 내가 녀석한테 주절주절 들려주는 이야기다.
‘구상(具常)’나무의 솔방울같이 생긴 열매를‘구상과(具常果)’라고 하여, 한방에서 ‘산체(散滯)’와 ‘이기(理氣)’약제로 쓴 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한라산·지리산 ·가야산 등 해발고도 1,000미터인 곳에서만 자란다. 그 ‘자람터’가 모두 높은 산꼭대기. 본디부터 따뜻한 곳을 좋아하지 않는 나무다. 위에서 이미 밝혔지만, 구상나무는 미선나무와 개느삼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만 자라는 나무다. 그 잎들이 소나무류와 마찬가지로 사철 푸르고 기름기가 많아, 생으로도 잘 탄다. 해서, 예전 제주도 사람들은 그 많은 구상나무를 베어다가 땔감으로 썼다고 한다. 해서, 지금은 그 개체수가 현격히 줄어들었다고 한다.
한편, 구상나무의 학명(學名)이 ‘Abies koreana, Wilson’인 내력이다. ‘Abies’는 ‘전나무속(-屬)’을 일컫고, ‘koreana’은 ‘한국’을 나타내는 동시에 ‘하나의 독립된 종(種)’임을 나타낸다. 이들 속명과 종명은 국제규범에 따라 이탤릭체로 표현한다는 것도 놓치지 말기를. 그리고 학명 맨 나중에 나오는 ‘Wilson’은, 최초 명명자가 ‘윌슨’임을 뜻한다. 자, 에피소드로 이어진다. 사실 우리나라 식물 대개는 안타깝게도, 일본의 식물류학자 ‘Nakai’가 명명하였다. 정말로 이는 안타까운 일. 그러한데 미국 아놀드 수목원의 연구원이었던 ‘Ernest Henry Wilson(1876~1930)’이 1915년 한국에 와서 한라산에서 그때까지 본 적 없는 그 구상나무를 보고서, 화들짝 놀라(?) 자기이름을 위와 같이 붙여 국제학회에 보고 했다는 거 아닌가. 전나무속에 든 나무임에는 틀림없으나, 전나무도 아닌 것이 분비나무도 아닌 것이 가문비나무도 아닌 것이 그렇게 존재했으니... . 그 일로 한국의 나무들 모두한테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생각했던 ‘Nakai’가 꽤나 억울해했다고 한다.
외손주녀석 으뜸이가 오늘 뜨락의 구상나무를 가리키며 나무이름을 물은 덕분에, 우리 내외의 손길이 머물고 있는 이 ‘만돌이농장’의 나무들한테 다시 애정을 가지게 되었다.
이번에는 밖에 나서서 구상나무 잎겨드랑이[葉腋]을 하나 자르고, 그 옆에 선 구상나무 모양같이 생겨먹은 키 작은 나무의 옆겨드랑이 하나도 잘라 들고, 나무난롯가로 돌아온다. 사실 나는 구상나무의 잎 생김새는 익히 알아 쉬이 식별할 수가 있다. 하지만, 겉보기에 구상나무와 비슷한 저 나무 이름을 아직도 정확히 모르고 지낸다. 그때 내가 어디에서 유목을 캐와서 옮겼는지 기억도 희미하고.
“으뜸아, 이 할애비랑 오늘은 이 할애비가 40여 년 전에 익힌 <수목학(樹木學)> 교재를 펼쳐, 찬찬히 살펴보자꾸나. 이 할애비는 아직도 저 키 작은 나무가 ‘개비자’인지,‘비자’인지,‘가문비’인지 식별이 아니 되거든.”
내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그 많은 호기심을 지닌 녀석이 이번만은 웬일로 어른처럼 대꾸한다.
“한아버지, 저 나무가 ‘비자’이면 어떻고, ‘VIZA’이면 어떠하며, ‘개비자’이면 어때? 그냥 우리나라에서만 자란다는 구상나무면 되었지!”
사실 혼미(昏迷) 속에 살아온 내 60평생이 부끄럽기도 하지만, 녀석의 어른 같은 말이 다소 위로가 된다. 해서, 녀석한테 덤으로 알려준다.
“으뜸아, 저 구상나무의 모양이 너무 아름다워, 서양사람들이 묘목을 가져가서 자기네 정원에 심는대. 그래서 ‘크리스마스트리’로 삼는다는 거 아니니! 구상나무는 서양에서 크리스마스트리로서는 으뜸이라는데?”
이 말을 듣던 녀석이 금세 반응한다.
“한아버지, 올해는 이미 지나가버렸지만, 내년 크리스마스 때에는 우리도 저 구상나무를 크리스마스트리로 장식하면 좋겠다? ”
“참, 좋은 생각! 그런데 기왕에 내친걸음에 우리 꽃 ‘원추리’가 팔자를 고친(?) 이야기도 마저 들려주어야겠구나.”
이하는 본인의 또 다른 작품 ‘원추리’에서 일부 따온 것임.
< 하여간, 원추리는 자칫 지나쳐버리기 쉬운 우리네 야생화다. 많은 이들이 이와 같이 생각을 하여 왔을 것이다.
그러한 원추리가 팔자를 뜯어고친(?) 일이 생겨났다. 우리나라 자생종은 학명상 ‘Homeroscallis coreana,Nakai’ 인데, ‘코리아나’는 ‘한국’을 나타내며 ‘나카이’는 일본의 식물학자가 명명했음을 나타낸다. 그런 ‘원추리’가 졸지에 ‘데이 릴리(day lily)’란 영어식 이름을 갖고 신분이 바뀌게 된 것이다. 1930년대, 안목 있는(?) 미국인들이 한국 야생 원추리를 관상가치가 높다고 여기며 반출하여 육종 개량하였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육종 개량한 원추리를 다시 들여와 외래종인양 귀히 여기며 우리네 화단에 심고 있다지 않은가. 사실 국가간 종자싸움은 치열하다. 하나의 실례(實例)다. 내가 알고 지내며 평소 존경해 마지 않고 내 애독자이기도 한, 세계적인 콩 박사 정규화 박사. 그분은 전남대 여수캠퍼스에 재직 중이고, 미국 ‘일리노이 주 국립 대두(大豆) 연구소’에서도 근무한 바 있다. 그분은 우리네 야생 돌콩이 전세계 모든 메주콩[大豆]의 원조인데, 그 종자를 미국에 빼앗기고 다시금 우리가 비싼 대가를 지불하며 수입하고 있는 사정을 몹시 안타까워 한다. 다시 원추리 이야기로 돌아간다. 우리네가 그저 산야에 지천이라 관심을 크게 두지 않았던 원추리가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화훼로 거듭 태어났다는 것만 하여도 참으로 자랑스럽다. 원추리야말로 어느 국악인의 광고 멘트, “우리 것은 참 좋은 것이여!”에 딱 어울린다.>
나무난로 불문을 열고, 아까 따온 구상나무 잎과 개비자인지 비자인지 가문비인지 모를 잎을 넣는다. 타는 그 향기가 어지간하다.
94.
나무난롯가 맞은편 접의자에 앉은 외손주녀석. 내가 갈퀴로 불쏘시개 삼으려고 한 삼태기 담아온 솔잎 하나를 집어 들어 찬찬히 들여다보며 말한다.
“한아버지, 이 잎은 마치‘쪼개머리핀’ 같이 생겼어. 신기해.”
하여간, 녀석의 연상(聯想)과 관찰력은 알아주어야 한다.
“으뜸아, 그러고 보니 그렇네! 네 엄마와 네 하나뿐인 이모가 여중생일 적에 아침마다 앞머리에 꽂던 그 머리핀이 떠오르는 걸!”
참말로, 소나무잎은 두 갈래로 갈라진 쪼개머리핀. 녀석의 색다른 연상은 오늘 노변담화(爐邊談話) 이야기꺼리를 마련해 준 셈.
“으뜸아, 소나무류의 잎들이 모두 두 장은 아니다? 석 장짜리도 있고 다섯 장짜리도 있는 걸!”
그러자 녀석은 의자를 바짝 당겨 이 할애비의 강의에(?) 몰두한다. 이 할애비는 다음과 같이 녀석한테 일러준다. ‘소나무과 소나무속’에는 소나무류와 잣나무류로 크게 가른다. 소나무류와 잣나무류를 구분하는 핵심 포인트는 그 잎 개수. 소나무류는 2~3개 잎, 잣나무류는 3~5개. 많은 이들은 이를 토대로 ‘이엽송(二葉松)’,‘오엽송(五葉松)’으로 부르기도 한다. 소나무는 2개의 잎을 지니나,‘리디다소나무’와 ‘테에다소나무’와 ‘리기테에다소나무’는 3개의 잎을 지닌다. 그리고 잣나무류는 5개 잎으로 갈라져 있다.
녀석이 이처럼 소나무과 수목들의 잎 특징을 듣고 있다가 한마디 한다.
“오, 천지를 창조하신 하느님, 저마다 특징지을 수 있게 만들어내셨군요.”
이에, 나는 맞장구를 친다. 그러면서 강의는(?) 이어진다. 본디 우리나라에는 소나무·금강소나무·처진소나무·곰솔·반송(盤松) 등의 두 장짜리 잎을 지닌 소나무가 존재했다. 그러다가 일본식민지 시절인 1907년, 북아메리카 동북부 원산(原産)으로 알려진 ‘리기다(Pinus rigida, Miller) 소나무’가 일본으로부터 들어 왔다. 그 생장속도와 맹아력(萌芽力; 잘라도 새순이 돋는 성질)을 감안하여 그들이 산림녹화를 위해 들여온 것. 그 잎 수는 3개이고, 그 잎과 줄기의 성질은 뻣뻣하기 그지없다. 그런가 하면, 우리나라에는 미국의 남쪽에 주로 자라는 ‘테에다소나무(Pinus taea,L)’도 우리나라에 시험삼아 들여오게 되었다. 그 테에다소나무 잎도 석 장.
외손주녀석 으뜸이가 어인 일로 다소 지루한 듯 급브레이크를 밟는다. 태클을 거는 듯도 하다.
“한아버지, 리기다소나무와 테에다소나무 이야기는 왜? ”
고 녀석, 임학도(林學徒)였던 이 할애비가 아주 귀중한 이야기를 할 참인데... .
“으뜸아, 사실 리기다소나무와 테에다소나무는 자연상태에서도 교잡(交雜)이 이뤄져 ‘트기’인 ‘리기테에다’를 낳거든. 그런데 말이야, 우리나라에는 이처럼 위대한 업적을 이룩한 분이 계셨다는 거 아니니?”
아래는 본인의 또 다른 작품, ‘소나무에 관해’에서 일부 따온 것이다.
< 사실 소나무에 관해서는 우리네 선조들이 다양하게 예찬했으므로, 내가 새삼스레 읊기에 마땅찮다. 하지만, 명색이 임학도였던 나는 소나무와 관련해서 도저히 잊을 수 없는,꿈결에서도 잊을 수 없는 인물을 소개 아니 할 수가 없다. 그분이 바로 현신규(玄信圭. 1911~1986) 박사이시다. 당신은 세계적인 임목 육종학자였다. 당신은 ‘은수원사시’를 육종해 내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그분의 업적을 기려, 당신의 성 ‘현(玄)’을 따 ‘현사시’라는 별칭을 붙였다. 당신이 재직 중이던 서울대 수원 농과대학 캠퍼스. 그곳 수원지방에 자생하는 ‘수원사시나무’와 ‘은백양나무’를 인공교잡한 후 후대검증(後代檢證), 우수개체선발 등의 여러 복잡한 과정을 통해 육종해 내었다. 당신은 1950년대 초 미국연수시절 ‘리기다 소나무 암꽃’과 ‘테에다 소나무 수꽃 꽃가루’를 교배시켜 수백 개의 종자를 만든 후 국내에 가져오게 된다. 그러고서는 당신은 제자들과 함께 거듭거듭 육종절차를 밟아, 우수한 개체를 선발했다. 그렇게 해서 육종해낸 소나무가 바로 ‘리기테에다’다. 두 나무의 장점만 물려받아, 추위에 강하고 척박한 토양에도 잘 자라며 생장속도가 빠른 나무로 새롭게 태어났으니... . 미국인들은 그 ‘리기테에다’를 ‘Wonder tree(경이로운 나무)’라고 부른다는 사실. 그리고 그 ‘리기테에다’는 정작 국내가 아닌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주요 경제수종(經濟樹種)으로 각광을 받고 있으니,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이냐! 나는 대한민국 제1호 임학박사이시도 한 당신을 늘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당신은 정부가 선정한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도 올라 계신다. >
위 현신규 박사 스토리를 듣던 녀석. 이번에도 그 작은 손으로 박수를 짝짝 친다.
“ 현신규 박사님, 파팅(파이팅)! 우리는 역시위대한 한민족!”
이 산골 농막에는 어둠이 내리고, 조손(祖孫)은 다시 농막 안으로 자리를 옮겨야 할 시간.
(다음 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