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신작

‘끝끝내 띄우지 못할 편지’

윤근택 2020. 8. 14. 01:52

                                                        ‘끝끝내 띄우지 못할 편지’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육필(肉筆)로 반듯반듯 적은 나의 편지는 끝끝내 띄우지 못하고 오래오래 간직하게 될 것 같다. 나는 내 신실한 애독자들과 공유코자 그 육필편지를 여기 그대로 베껴 적는다.

 

                                                                   책 返品을 하며

   반품은 소비자 내지 고객의 고유권리입니다. 님으로부터 받은 마지막 그 짧은 e메일 속에도 ‘知的誤謬’가 있군요. 일부러라도 님의 ‘메일보관함’에서 그 글 다시 살펴보시길. 어설프게 아는 것은 지식이 결코 아닙니다. ‘부주’는 ‘부조(扶助)’입니다. 늘 습관적으로 쓰는 어휘도 국어사전을 통해 살펴보아, 각별히 신경써야합니다. 모국어를 제대로 쓰는 습관. 그리고 ‘(그만) 하십시요.’로 그 글 맺고 계시는데,‘서술형 종결어미(종결형 서술어미)’는 ‘-요’가 아닌 ‘-오’입니다. 다만, ‘'ㅣ'모음 순행동화’라는 음운현상으로, 그 발음상 ‘-요’일 뿐입니다. ‘-요’는 ‘-고’에 해당하는 ‘연결형어미’인 걸요.

   이상은 나의 문장기술론 ‘마지막 수업’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2020.8.12. 윤근택

 

 

                                                           문장치료사 윤쌤의 終講詞

 

   공자께서 이르셨지요.

   “ 三人行必有我師. 其不善者而改之. (사람 셋이 길을 가면, 그 가운데 스승이 한 분 있다. 좋은 점은 가려서 좇고, 좋지 않은 점은 고쳐야한다(고치면 된다).”

   - 출전 <<論語>> <述而>편

   나는 그 짧은 기간, 님한테 내가 빚은 수필폭탄을(?) 집중투하함으로써 님을 ‘돈오(頓悟;갑자기 깨달음.)’케 하고자 하였으나... .

   요컨대, 대실망이며 큰 절망입니다. ‘하마나 하마나 ... .’하면서, 몇 번씩이나 마음 고쳐먹고 자극을(?) 드려보았으나... .

   해서, 정말로 이젠 또 다시 길을 나섭니다. 나설 밖에요. ‘정신 똑바로 박힌 ‘글짓기 제자’ 하나 얻으러.

   ‘종지그릇’에 낟알을 과연 얼마나 담을 수 있을까요? 미물(微物)한테서도 나는 늘 배우고 있건만... .

   끝으로, ‘나의 기다림은, ‘기린아’가 나타나길 기다림’은, 그래도 끝끝내 버릴 수 없다는 비원(悲願)을 지닌 채.

 

                                                      ---------- 2020.8.12. 02:10.

                                                      어느 아파트 경비실에서 윤쌤

 

 

  내 신실한 애독자들은 나한테 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지 궁금해 할 것 같다. 달포 전 어느 여성으로부터 시인 겸 수필가라는 자기소개와 함께 두 권의 각각 다른 책을 택배로 한꺼번에 받은 바 있다. 나는 그 두 책 가운데 한 권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문장치료사’란 직함을(?) 손수 붙여 즐겨 쓰는 나. 저기 전주의 김학(金鶴) 수필가께서 이미 30여 년 전 <月刊文學> 수필월평을 쓰면서, 생면부지인 나를 두고 ‘족집게 도사’로 지칭하며 ‘수필계에도 몰래 카메라가 있다’는 소제목하에 소개한 바 있다. 그러니 내가 위에서 소개한 그 여인의 글인들 그냥 지나쳤겠는가. 더군다나 그는 자신이 서울 소재 한국 최고인 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출신인데다가 국어교사였던 데다가 작가가 되고 싶어 교직도 팽개쳤다는 이야기를 전화상으로 전해온 터. 그리고 조금만 일찍 나를 알았더라면, 교정 등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 거라고 다소 아쉬워하는 내용의 통화도 있었던 터. 나는 정말로 열정적으로, 그의 그 책을 첫 쪽부터 끝 쪽까지 파헤쳐, 내가 닦은 문장기술론에 입각하여 최대한 객관적 잣대로, 귀에 쏙쏙 들어갈 수 있도록, 쪽마다 새까맣게 ‘돼지꼬리 땡땡’하여 되부쳐 주었다. 사실 내 기준으로는 100점 만점에 50점에 머문 모국어 구사력이었다. 그런 이후에도 위 종강사에서 적은 대로,‘내가 빚은 수필폭탄을(?) 집중투하함으로써 그를 ‘돈오(頓悟;갑자기 깨달음.)’케 하고자 하였으나, 일을 크게 그르쳐버렸다. 사실 나의 신실한 애독자들 가운데에서도 나의 수필폭탄에 질려 앞발 뒷발 다 들어버린 분들도 있을 테니, 새삼스런 일도 아니다.

  하여간 일이 그렇게 되었다. 그러한데 위 편지를, 몇 차례 맹랑한 그의 답신내용으로 말미암아, 그 나머지 책 한 권의 책갈피에 끼워 반품으로 띄우려다가, 마법(魔法)에서 나야말로 화들짝 풀려나게 되었다. 그 책은 정말로 정성스레 적고 공들여서 만들었더라는 거. 그가 나를, 그 엉터리 책으로 시험하려 든 것인지, 내가 어디에 ‘홀렸던’ 것인지 도대체 알 길 없다. 그래도 그렇지! 한 사람이 적은 두 권의 책이 그렇게 다를 수가? 잘은 모르겠으나, 내가 작업한 그 책은 그의 습작기 작품들로 채워졌을 수도 있고.

   내 신실한 애독자들께 여담(餘談) 한 자락을 들려드리고 이 글을 맺을까 한다. 나와 아내와 큰딸 셋은 고향 청송으로 가고 있었다. 내 백씨(伯氏)이자, 아내의 아주버님이자, 딸아이의 큰아버지인 분이 이승에 누린 나이 78로 떠났기에 문상(問喪)을 가는 길이었다. 승용차의 운전석은, 집의 나이 서른여섯임에도 아직도 결혼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큰딸. 조수석은 나. 나는 위에서 소개한 여류시인의 그 맹랑함에 관한 이야기를, 녀석한테 들려주고 있었다. 그 맹람함이란, “열정적으로 첫 페이지부터 끝 페이지까지 고쳐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그렇더라도 제가 ‘혜존’이라고 적고 서명까지 해드린 그 책을, 3개월 동안 몸살 앓으며 교정하는 등 만들어 부친 그 책을... . 기왕에 해주실 거면 복사를 떠서 해주셔야 예의가 아닐까요?”다. 이 늙은이가 그 한 권의 책을 무슨 수로 복사해서 그렇듯 작업하여 부쳐준다는 말인가. 애교로 보아줄 정도를 넘어섰다. 나는 그 알량한 ‘엘리트 의식’ 내지 ‘선민의식’을 내 딸아이한테 탓했더니, 내 딸아이가 이내 대꾸를 했다.

  “아빠, 그 책날개에 실렸던 사진이 어땠어? 무척 이쁘지 않던? 아빤 여태 몰랐어, 나처럼 얼굴 반반하고 머릿속에 먹물 든 여자들은 좌우지간 대책이 없다는 거? 그리고 말이야..... .”

   그렇게 시작한 녀석의 이야기는, 자기가 다니는 ‘대구 계산성당’의 주임신부께서 들려주던 이야기로 옮아갔다. 한번은 주임신부님을 모시고 자기네 성당 교우(敎友)들이 회식자리를 가졌던 모양이다. 그 자리에서 청춘남녀 교우 한 쌍이 언쟁 아닌 언쟁을 벌린 모양이다. 그러자 주임신부님이 청년 교우한테 이르시더란다.

   “참으시게. 여자의 말은 너무도 아리송하여   하느님께서도 이해하지 못하신다네.”

   어쨌거나, 이 글 주인공은 눈부신 문업(文業)닦아가길.

 

 

 

   작가의 말)

   나한테는 그 어떤 작은 사달(해프닝)조차도 글감이 된다. 위 ‘종강사’에도 적은 바, ‘미물(微物)한테서도 나는 늘 배우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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