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수련(135)
문장수련 (135)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이번호에서는 일전에 적은 본인의 수필, ‘U턴(2)’를 텍스트 삼아 논의해보기로 한다.
우선, 논의에 앞서, 본인의 그 많은 수필이론들 가운데에서 ‘수필로 쓰는 수필론- 이기기론(-論)’의 결미 부분을 다시 음미해보도록 하자.
<수필작품에서 소재는, 말 그대로 글의 ‘재료’이다. 제각각이었던 재료들은, 이합집산(離合集散)을 통해서든 합종연횡(合從連衡)을 통해서든 어찌 되었거나 한 덩어리로 뭉쳐져야 한다. 이기기를 통해서든 용해(鎔解)를 통해서든 ‘균질의 온전한 한 덩어리’로 만들어야 한다. 작품 전체에 쓰인 각각의 문장이 질서롭게 한 덩어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럴 때에 참 좋은 어휘가 하나 있다. 바로 ‘혼연일체(渾然一體)’가 그것이다. 각 소재와 각 문장이 하나로 결집되어 나타나야 함을 일컫는다.
일찍이 ‘윌리엄 와트(William W.Watt)’는 ‘좋은 글 12개 척도’를 제시한 바 있다. 그 12개 척도 가운데에는 ‘통일성’과 ‘일관성’도 들어 있다.
통일성에 관해, ‘리드(Read,Herbert)’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단락은 통일성이 있어야 한다. 통일성은, 단락 안에서 단 하나의 화제만 논함으로써 달성된다.
한편, 일관성에 관해, ‘맥크리먼(McCrimmon,J.M)’은 이렇게 적고 있다.
‘ 일관성이란, 충실한 결합을 뜻한다. 단락은 문장끼리 빈틈없이 짜이거나 서로 자연스레 결합되어 있을 때에 일관성이 있다. 독자는 문장을 쉬이 차례로 읽어나갈 수 있고, 단락을 독립된 문장의 혼집(混集)이 아닌 하나의 통일된 덩어리로써 파악한다.’
사실 나의 위 ‘이기기론’은 윌리엄 와트, 리드,맥크리먼 등의 주장을 아울러서 달리 말했던 것에 불과하다. 어쨌든, 한 편의 수필작품은 전체가 한 덩어리가 되어야 한다. ‘천의무봉(天衣無縫)’이란 말이 있지 아니한가. ‘천사가 입는 옷은 솔기 즉 재봉선이 없다.’는 말이다. 한 편의 수필작품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또, 훌륭한 자동차 판금부 직원은 용접을 하되, 그 부위를 사포(砂布)로 문질러 매끈하게 한다. 한 편의 수필작품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누더기 같이 더덕더덕 이질적 문장들이 혼집되어 있어서는 아니 된다.>
자, 이제 본인의 수필, ‘U턴(2)’가 과연 위 이론가들의 주장에 부합하는지 찬찬히 살펴볼 차례다. 내 신실한 애독자들 이해를 돕고자 주요 어휘 따위에 ‘원문자(圓文字)’로 처리해 둔다.
‘U턴(2)’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나 같은 늙은이들 방식으로 말하자면, 나는 과년(過年)한 딸년들 둘을 슬하에 두고 있다. 하나는 집의 나이로 서른여섯, 또 하나는 집의 나이로 서른 넷. 두 녀석은 이 애비가 무슨 이야기를 하면, 곧잘 ①“또 저 도돌이표!”하며 지겨워한다. 사실 우리네도 어렸을 적에 양친의 ②중언부언(重言復言)의 이르심을 녀석들처럼 받아들이곤 하였다. “두 번만 더 들으면 100번째에요.”하면서. 나도 어쩔 수 없이 차츰 늙어가는가 보다. 흔히 노파심(老婆心)이라고 하는 심정에서 비롯된 말을 그렇게 자주 함으로써 녀석들한테 음악용어를 원용(援用)하여 ③‘도돌이표’ 운위(云謂)토록 것이겠거니.
문득, ④교통표지판 ‘U턴’과 음악용어 ‘도돌이표’가 유사점을 지녔다는 데 흠칫 놀라게 된다. 어쨌든 둘 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도록 지시한다는 거. 교통 표지판 ‘U턴’에 관해서는 이미 전편(前篇) ‘U턴(1)’에서 다뤘으니,⑤ 이번에는 ‘도돌이표’를 집중적으로 다뤄보아야겠다.
도돌이표란, ⑥다들 너무도 잘 알다시피, ‘악보에서, 어느 부분을 ⑦되풀이해서 연주하거나 노래하도록 지정하는 기호’를 일컫는다. 이 도돌이표 자체만으로도 악보상 꽤 의미있는 기호이다. 말 그대로 ⑦‘반복연주’로 우리네 ‘음악 중독성을(?)’ 더해주는 까닭이다. (이하는 본인의 수필, ‘변주에 관해서’의 일부분이기도 함. 인터넷 검색창에서 ‘윤근택의 변주에 관해서’를 치면, 전문을 읽을 수 있음.)그런가 하면, 기악형식에는 ⑧‘론도형식(Rondo form)’이란 게 있다. 이 또한 ⑨‘되돌아감’내지 ‘되풀이(반복)’의 의미를 지닌 악곡 형식이다. 하나의 주제가 반복적으로 나타나거나 주제와 부주제가 교차적으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17세기의 음악 형식을 론도 형식이라고 한다. 도해화하자면 이렇다. ABAC, ABCA ABCA. 여기서 A는 주제이고 B나 C는 에피소드다. 음악에서 론도형식은 위에서 이미 밝혔듯, 우리네 음악 중독성을 한층 드높여준다. ‘반복’ 내지 ‘되돌아감’의 묘미다.
문학작품에서도 음악에서 말하는 론도형식과 유사한 형태가 있다는 거.⑩‘론도형식’과 관련이 깊은 변주. 특히 시(詩)에서 쓰이는 말이다. 이른바, ‘시어(詩語)의 변주’라고 하는 말. 요컨대, 시어를 변형하여 사용하는 것을 일컫는다. 시구를, 반복되는 과정에서 시어를 바꿔서 사용함으로써 운율적인 인상과 의미 강조효과를 거두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통사구조(統辭構造)의 반복’ 또는 ‘문장구조의 반복’이라고도 한다. 이를 ‘U턴’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돌아감’이라는 거.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 좋은 예에 해당한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관형어+ 부사어+서술어, 관형어+부사어+서술어 구조임.)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대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부사어+목적어+ 서술어, 부사어+목적어+ 서술어 구조임.)’
이밖에도 문학에서 말하는 ⑫‘수미상관(首尾相關)’도 나는 ‘U턴’과 의미가 통한다고 이제금 말한다. (이상은 본인의 수필, ‘변주에 관해서’의 일부분이기도 함. 인터넷 검색창에서 ‘윤근택의 변주에 관해서’를 치면, 전문을 읽을 수 있음.)
⑬위에서 차례차례 다뤘던 모든 사항들이 하나같이 ‘ 반복’내지 ‘되돌아감’과 통하는데... . 그러하더라도 안타깝고도 슬픈 일 하나. 내 피붙이, 살붙이들은 하나하나 ⑭‘U턴’을 영원히 못한 채 내 곁을 떠나 그 어디론가 ‘쌩쌩’ 앞만 보고 달려가버렸다는... . 내 양친, 셋째누님, 다섯째누님이자 막내누님에 이어, 요 며칠 전에는 나의 백씨(伯氏)마저 끝끝내 U턴을 못한 채, U턴 신호를 잊은 채 차례차례 달아나버렸나니.
나는 이제 내 신실한 애독자들한테 탄식조로 말한다.
⑮“우리네 인생은 U턴 표지판도 없는가 보아요. 도돌이표도 없는가 보아요. 그 중독성의 론도형식도 아닌가 보아요. 참말로, 쏜살은 되돌아오지 않는다네요. 부메랑은 잘도 되돌아오던데요.”
아, 그리고 나의 여생도 그러할지니!
작가의 말)
이 ‘U턴(1)’과 ‘U턴(2)’는 어느 여류 수필가의 맹랑한(?)문자메시지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그러니 그이한테 감사를 드린다. >
이제 내 신실한 애독자들께서는, 원문자로 되어 있고 밑줄 친 위 어휘군을 유심히 살펴보기를 권한다. 비교적 질서롭게 잘 정돈된 점을 느낄 것이다. ‘객소리(客-)’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이들 모두를 ‘돌아감’혹은 ‘돌아옴’이란 개념의 어휘가 포섭(包攝)하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마지막 단락에 쓰인 ‘쏜살’과 ‘부메랑’마저도 꼭히 필요한 만큼의 경제적 언어로 일관되었다는 것을. 나는 이를 플로베르의 ‘일물일어설(一物一語說)’과도 그 맥이 닿아 있다고 여긴다. 내가 위 작품에서 부려 쓴 어휘들은 비록 평이한 어휘들이지만, 나름마다 문학적 언어로 새로운 생명력을 얻고 있다는 것을. 이 부분에 이르러서는, 문득 중국 남북조시대 양(梁)나라의 유협(劉勰 : 466~520)이 지은 문학이론서, <文心雕龍(문심조룡)>의 한 구절이 떠오를 줄이야!
“ 정성을 기울여서 문장을 짓고, 신기 화려성을 다툴 때에는 흔히 표현의 퇴고에만 힘을 쓰게 되고 창작의 기본 원리를 연구하려 들지 않는다. 옥도 다량으로 존재하면 돌로 착란하기 쉽고, 쓸모없는 돌이 때로는 옥과 같이 보일 때도 있다.”
나는 유협의 위 충고를 근거로, 대한민국의 그많은 수필작가들의 글을, 특히 미사여구를 마구 늘여놓은 여류수필가들의 글을 지금 호되게 꾸짖고 있다. 외화내허(外華內虛)의 잡문들을... . 어느 한 작품의 주제를 살리기 위해서 최적(最適)의 어휘를, 최소량만 골라 써야 한다는 것을.
또 하나 내 신실한 애독자들께 알려드릴 게 있다. 이는 위에서 소개한 문장이론가들의 주장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기도 한데, 위 나의 작품은 전체가 한 덩어리 되도록 통일성 ·일관성을 철저하게 유지하고 있다는 점. 나는 편편 글을 적을 때마다 마치 도투락댕기를 드리려고 머리를 땋듯, 선물꾸러미를 묶으려고 삼새끼를 꼬듯, 목걸이를 만들기 위해 금사슬을 꿰듯 하여 모든 문장이 주제문 내지 주제어에 도달하고자 애쓰고 있노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러한 소재나 어휘군들을 징검다리 삼아, 강을 건너 드디어 목적지에 도달한 듯한 후련함.
참말로, 작품에 쓰는 여러 소재들은 결국 불가(佛家)에서 이르는 ‘뗏목’에 지나지 않는다. 불가에서 이르는 뗏목은 ‘차안(此岸;이 언덕)’을 떠나 ‘피안(彼岸; 저 언덕; 목적지)’에 닿으면, 곧바로 미련 없이 버려도 좋은 존재이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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