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밭에서(15)
고추밭에서(15)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빨갛게 익은 홍고추를 따면서, 이번에도 아주 엉뚱한 혼잣말을 내뱉게 될 줄이야!
‘ 이 세상 모든 수컷들이 자신의 종족을 유지하게 하는 원동력은, 그 무엇도 아닌 고추야! 자기 사타구니에 달린 그 고추야! 내가 믿는 하느님께서는 수컷들한테 그 고추를 유용하게 사용케 함으로써 느끼게 되는 그 짧은 순간의 쾌감을 선물로 주시어, 그들로 하여금 자기 모습을 쏙 빼닮은 후손을 생산토록 하시잖아! 하느님께서는 종족번식의 미션(mission)을 그렇게 주신 거야! 그 이후 고추 함부로 휘두른 그 찰나의 쾌감을, 한평생 빚으로 떠안게 되어, 자나 깨나 자식 걱정케 하는 하느님이시여! ’
내 젊은 날, 그 누구도 나한테 가르쳐준 적 없는 그 말을 도대체 어떻게 그처럼 순간적으로, 즉흥적으로 했을까? 청주의 우암산(牛巖山) 산길 벤치. 저 아랫녘 도시의 야경(夜景)은 너무도 휘황찬란하였다. 나는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살며시 얹으며 말했다.
“미경씨, 저 아랫녘 야경이 무척 아름답지 않아요? 과연 그 힘이 어디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세요?”
그녀는, 숨소리가 가빠진 그녀는, 그 점만은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나는 사전(事前)에 전혀 준비하지도 않았던 그 말을 즉흥적으로 했다는 거 아닌가.
“만약에 만약에, 일찍이 남자가 여자를 밝히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여자가 남자를 밝히지 않았더라면, 과연 이 도시가 존재했겠어요? 인류가 존재했겠어요? 그렇잖았으면 인류는 진작에 멸했겠지요?”
그날 나는 그 즉흥대사(?) 덕분에, 그녀의 입술을, 크게 힘들이지 않고 슬쩍 훔칠 수 있었다. 그것이 그녀와 첫 키스였으며 마지막 키스였긴 하지만... . 줄잡아 40년이 된 그날의 추억. 나는 그날을 이 고추밭에서 다시 떠올린다.
권고하노니, 커닝페이퍼를 슬쩍 건네주노니, 세상의 모든 남정네들이여! 짝사랑하는 여인이 있어 애태운다면, 내가 그때 즉흥적으로 개발하여 적용에 성공한 위 수법을 응용하신다면, 이쁜 짝사랑 여인의 입술 한 번 정도는 훔칠 수 있을 듯.
상징적 의미로서 고추. 벌써 10년도 넘었을 그때를 떠올린다. 시설과장의 말은 평소 입이 걸쭉하기로 소문나 있었다. 마침 술집에서 그와 함께 비틀대며 나오고 있었다. 그때 임산부 하나가 우리 곁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들으면 어쩌려고 혀 고부라진 목소리로 나한테 그렇게 말했을까? 지금 생각해보아도 아찔하기만 하다.
“ 윤 과장님, 막 우리 곁으로 고추 먹고 얹힌(체한) 여자가 지나갔어요.”
‘고추 먹고 얹힌 여자’라... 참으로, 그때 ‘신 과장’의 그 말은 바른 말이다. 소름돋힐 정도로 맛깔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자기 부인도 지난 날 그러했을 터. 되돌아보니,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 연상의 내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고추 먹고 얹혀, 열 달 간 배불러 갖은 고생을 하더니, 아내는 자기를 쏙 빼닮은 예쁜 딸애를 낳아주었다.
피식 웃으며 혼잣말을 또 하게 된다.
‘ 문제는 고추야, 이 바보야!’
아니다. 정말 아니다. 그 말은 부정적이니 취소.
‘ 나의 고추 하나 덕분에, 이 늘그막까지 자식들 두 딸 년들 잘 되어라 노심초사하는 쏠쏠한 이 재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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