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어른의
아이들은 어른의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음악 칼럼니스트)
일찍이 예수님이 이르셨다. 루카복음 18장 17절에 적혀 있다.
<어린이들을 사랑하시다
15 사람들이 아이들까지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아이들을 가까이 불러 놓고 이르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일찍이 공자께서도 〈술이(述而)〉를 통해 이르셨다.
“세 사람이 길을 갈 때에는 반드시 내 스승이 있으니, 그 가운데에서 선한 사람을 가려서는 그를 따르고, 선하지 못한 자를 가려서는 자신 속의 그런 잘못을 고쳐야 한다.”
그런가 하면, 영국의 시인,‘윌리엄 워즈워드(1770~1850)’는 32세에 이르러 <무지재>란 시에 이런 행(行)을 적고 있다.
<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I could wish my days to beBound each to each by natural piety.>
번역자에 따라서는 ‘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를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로 번역하기도 하고, ‘쌍반점(;)’이하까지 풀어서 ‘아이였던 나는 성인이 되고 아버지가 되었다. 내가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자연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를.’이라고 아주 평범하게 번역하기도 한다. 하더라도, 우리네는 전자(前者) 번역에 맛들여 있다.
마지막 사례. 나는 나이 32세에, 대한민국에서, 저기 경남의 ‘정목일’ 수필가가 31세에 수필작가로 명문문학잡지 두 군데를 통해 내리 데뷔한 이래, 드물게 <월간에세이>를 통해 수필작가로 데뷔하였다. 최연소는 정목일, 다음은 윤근택인 셈이다. 나는 그 어떤 ‘문학 아카데미’ 등을 통해서 공부한 바도 없으며, 오로지 독학으로 문학수업을 하였노라고 빈번하게 여러 수필작품에서 자랑하여왔다. 본디는 대학교에 진학하여 국어국문학이나 국어교육을 전공하여 학자의 길을 걷고자 하였으나, ‘그 눔’의 수학실력이, 국·영·수 가운데에서 수학 실력이 중학교 1학년 인수분해 수준에 머물러, 부득이 지방 국립대학교 농과대학을 졸업하였고... . 그 취약점이 수필작가로 데뷔한 이후 나를 더욱 분발케 한 것도 사실. 이렇게 적고 보니, 내가 엄청 잘난 척 하는 것 같지만... . 결코 천부적이지 않다는 거. 돌이켜본즉, 실은 지금은 저승에 가 계신 내 어머니가 최초의 문학 아카데미 스승이었다. 당신은 조무래기였던 당신의 열 남매 자녀들 가운데에서 끝으로 달린 삼형제한테 새벽마다 ‘받아쓰기’를 강요했다. 서열상 열 남매 가운데에서 아홉 번째인 나. 국 민학교(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어머니의 감성어린 목소리까지 그대로‘받아쓰기’ 하였던 것 같다.
이제 내 이야기 훌쩍 비약하여서... . 나는 과년한 딸을 둘 두고 있다. 큰딸은 미술평론을 전공하였고 우여곡절 방과 후 교사로 지낸다. 작은딸은 일본어학사에 이어 한국어 석사. 서울의 여러 대학교에서 외국인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한국어를 강의하고 있다. 해서, 내 가족은 나를 포함해서 선생이 셋이 된 셈. 하기야 나는 수필작가들끼리 예우상 ‘윤 선생’으로 불릴 따름이지만... .
큰딸 ‘요안나 프란체스카’가 어느 날 아침 나한테 들려주던 이야기로 두서없는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교실에 들어선 요안나 프란체스카(윤현지;윤초롱) 선생님. 칠판에 어느 개구쟁이 6학년짜리가 분필로 적어둔 걸 발견한다.
‘윤현지 선생님 돼지. 멧돼지.’
선생인 내 딸은 평소 의심되는(?) 세 녀석을 불러 세워 기분 좋게 말했다.
“너희들이지?”
그랬더니, 녀석들의 대꾸는 이랬다.
첫 번째 아이.
“선생님, 저는 ‘윤현지’까지만 적었어요.”
두 번째 아이.
“선생님, 저는 ‘돼지’까지만 적었어요.”
세 번째 아이.
“ 선생님, 제가 ‘멧돼지’까지 적어 문장마감했어요.”
정말 맹랑한 녀석들. 그 녀석들은 ‘콜라보레이션’ 작업의 개념까지도 이미 안다는 거 아닌가.
그 말을 듣고 있던 이 애비의 말.
“현지 선생님, 그러게 애비가 평소 다이어트 하라고 하지 않던?”
맹랑하다.
보다는, 내가 위에서 제목으로 설정한 ‘아이들은 어른들의’에 충실하며, 나를 감동시키고, 여운이 남는 에피소드.
그날은 마침 주말이라, 교사인 내 딸은 아이들한테 수업 중 격려의 멘트를 날린 모양.
“나는 주말이라 학교숙제도, 학원숙제도 없다? 너희들은 참 힘들겠다? 약 오르지롱?”
그랬더니, 한 아이가 꽤나 묵직하게 대꾸해왔다는 거 아닌가.
“선생님, 선생님은 ‘인생’이란 숙제가 하나 남았잖아요.”
딸아이를 통해 그 아이의 멘트를 전해들은 나. 그 순간, 위에서 소개한 예수님의 가르침, 공자님의 말씀, 워즈워드의 시 구절, 내 어머니의 구술(口述)을 다 포섭하는 말임을 깨닫게 되었다. 기가 막히는 말. 그 아이야말로 우리의 스승이요, 철학자.
* 이 글은 본인의 블로그, 이슬아지 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