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43)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43)
-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햇영감이 되어서인지 밤잠이 없다. 아니, 그래서가 아니다. 현존하는 대한민국의 수필작가 가운데 ‘최다작(最多作)의 작가’이기를 바라서일 것이다. 나는 글을 한 편 적지 않으면 하루를 허투루 보낸 듯해서 잠을 쉬이 청하지 못한다. 깊은 밤, 잠이 아니 오면 새로운 글감을 찾거나 새로운 뮤지션의 음악을 찾아 듣거나 하는 편이다. 우리 속담에 ‘노느니 염불.’이란 게 있지 아니한가. 작가한테 무료함이란 그래서 보약인 법. 나는 오늘밤 인터넷 검색창에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이란 검색어를 다시 입력했다. 사실 나는 이미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이란 별칭을 지닌 곡을 알고 지내는 터. 그 곡이 바로 ‘토마소 안토니오 비탈리 (Tomaso Antonio Vitali, 이탈리아, 1663~1745)’의 <<샤콘느(Chacone) g단조>>다. 그 곡을 다시 ‘거듭듣기’ 하는 한편, 또 다른 음악 애호가들의 견해 곧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은 없는가 하고 살펴보게 되었다. ‘가장-’은 ‘오로지(the only, the best)’이므로 결코 둘은 될 수 없지만, 음악 애호가들의 기호에 따라 어금버금일 수는 있다. 해서, 이번 호에는 <<샤콘느>>와 어금버금인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을 둘 다 소개코자 한다.
1. 비탈리의 <<샤콘느>>
비탈리의 풀 네임은 위에서 이미 밝혀두었다. 그의 아버지 조반니 바티스타 비탈리- 본인- 파우스트 비탈리로 이어지는 3대가 바이올린 연주가였다. 그들은 17세기 이후 바이올린 제작의 명문가(名文家)들의 고장인 북이탈리아 ‘크레모나’ 지방 출신이다. 그들은 크레모나 지방의 유명한 음악 가문이다. 참고적으로, 크레모나 지방의 바이올린 제작 3대 명문가들은,아마티(Amati),스트라디바리(Stradivarius),과르네리(Guarnerius) 등이다.
비탈리는 그의 부친에 이어 궁정 음악장을 지내게 되고, 고향 ‘크레모나’를 한평생 떠난 적 없었다고 한다. 그는 바로크 음악의 거장인 ‘요한 세바스찬 바흐’보다 22년 먼저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공교롭게도, 둘 다 현재까지 몇 아니 남은 <<샤콘느>>라는 기악곡을 작곡하였다. 바흐의 <<샤콘느>>는 정확히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와 파르티타>>다. 바흐의 그 곡은 자기 첫째 아내 ‘바바라 바흐’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예술로 승화시킨 음악으로도 알려져 있다. 음악 전문가들은 이들 두 ‘샤콘느’를 두고, 바흐의 곡은 ‘남성적이고 강렬’하고, 비탈리의 곡은 ‘여성적이고 섬세하다’고 평한다.
여기서 말하는 ‘샤콘느’는 16세기에 라틴 아메리카에서 스페인으로 넘어왔던, 화음 진행을 기본으로 한 3/4박자의 느린 춤곡을 이른다. 이 샤콘느는 17~18세기 바로크 시대에 유행한 기악곡 형식 자체를 말하기도 한다. 즉, 샤콘느는 바로크 시대에 이르러 다양한 음악 창작의 소재로 쓰였다는 말이기도 하다.
비탈리의 <<샤콘느>>를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으로 꼽는 이유를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다. 오르간 인트로(intro)로, 칸틸레나(canilena) 양식 주제로 시작된다. 칸틸레나란, ‘주요 선율을 최상성부(最上聲部)에 둔 형태’를 이른다. 바이올린이 그처럼 가냘픈 소리를 낼 수 있다니! 많은 음악 애호가들 말마따나, ‘슬퍼서 눈물이 나올 것 같은 음악’임에 틀림없다. 나는 내 신실한 애독자들께 다음과 같이 말하고프다.
“ 아름다운 멜로디와 애절한 선율로 하여 감동을 더해주며, 극도로 슬퍼 더 큰 청취자 내면의 아픔을 견디게 해주는, 카타르시스를 한바탕 맛보게 한다.”
비탈리는 뛰어난 작곡가 겸 바이올리니스트였고 살아생전 여러 곡을 적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그 가운데 현재까지 알려진 곡은 <<샤콘느>>가 유일하다. 그 곡은 이처럼 비탈리의 대명사나 진배없건만... . 최근 들어 그 곡이 어느 낭만주의 작곡가가 적은 곡이라거나, <<사계>>를 적은 ‘안토니오 비발디’가 적은 곡이이라거나 하는 논란에 휘말렸다. 음악사 연구가들은 후자(後者)에 무게를 더 둔다고 한다. 내가 아는 바, ‘알비노니’의 <<아다지오>>도 그러한 논란에 휘말렸으며, 지금은 ‘자조토’의 작품으로 밝혀진 게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데까지는 큰 관심이 없다. 진짜로, 그 음악이 ‘세상에서 꽤나 슬픈 음악’이면 대만족이다. 바이올린 음악사(音樂史)에서 보배로 알려진 <<샤콘느>>. 끝으로, 내 신실한 애독자들께 우리나라가 배출한 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Sarah Chang, 본명 장영주, 1980~)의 연주곡으로 이 이 음악을 즐기시기 바라며... .
2. 레죄 세레스(Rezso Seress, 헝가리, ? ~ 1968)의 <<우울한 일요일>>
다뉴브강은 헝가리를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를 경유하는 강으로 알려져 있다. 요한 스트라우스 2세는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을 적었다. ‘다뉴브’는 ‘도나우’라고도 부른다.
1932년 12월, 헝가리 출생인 레죄 세레스는 음악공부를 하기 위해 파리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가난하였으며, 연인 헬렌과 불화로 이별을 하게 된다. 헬렌은 당시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가장 빼어난 미모를 지닌 여성이었다고 한다. 이듬해인 1933년, 실연으로 상심한 그는 자신의 심경을 너무도 잘 그린 곡을 하나 적게 되는데, 바로 <<Szomoru Vasarnap(Gloomy Sunday, 우울한 일요일)>>가 그것이다. 그 곡에 작시(作詩)를 해준 이는 헝가리의 유명 시인이었다. 처절하고도 슬픈 선율의 음악. 그 곡이 발표되자, 1936년경 많은 젊은이들이 다뉴브강에 뛰어들어 잇달아 자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무려 150명 이상의 젊은이들이 그렇게 하였다고 전한다. 그래서 얻어진 악명이 ‘헝가리 자살 노래( Hungarian suicide song)’. 급기야 헝가리 정부는 그 곡을 라디오 방송 금지곡으로 지정하는 한편, 악보와 원음과 원곡 등을 압수하여 폐기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해서, 요즘 우리가 듣는 여러 유형의 그 곡은 후일 많은 뮤지션들이 다양하게 리메이크한 곡들이라고 한다. 아울러, 헝가리 정부는 자살명소로 알려진 다뉴브강에다 자살 방지용 철조망을 치게 되었고, 그 철조망은 아직도 존재한다는 거 아닌가. 실은, 젊은이들이 그처럼 자살을 이어간 데는 당시 헝가리가 겪었던 상황과도 꽤나 관련이 있다고들 한다. 제 2차 대전에 독일이 침공하여 나라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이래저래 절망한 젊은이들. 그들은 그 슬프디 슬픈 노랫말과 더불어 처절하리만치 슬픈 선율을 들으며 자살충동을 느꼈을 법.
그 이후에도 어느 악단의 연주가들이 그 곡 연주 도중 권총으로, 밧줄로, 칼로 자살을 한 예도 있다는데, 다소 만들어진 이야기쯤으로 여기면 될 듯. 한편, 최초 영어 가사곡은 1936년 샘 루이스(Sam M Lewis)가 가사를 쓰고 할 켐프(Hal Kemp)가 노래했다는데, 그 곡을 들은 미국인들이 모방 자살을 또 시도하여 수많은 젊은이들의 희생이 뒤따랐다고 한다. 원작자였던 레죄 세레스는 1968년 자신이 살던 고층 아파트에서 투신하여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자, 다른 방법으로 기어이 자살하고 말았단다. 그도 자신이 만든 그 음악을 들으면서 그렇게 하였단다.
꽤나 시간이 흐른 1999년, 그 음악에서 모티브를 얻어 헝가리와 독일의 영화사가 합작하여 ‘슬픈 일요일의 노래’라는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를 개봉하였다는데... . 내가 이 글을 적기에 앞서 줄거리를 영상으로 보았더니, 작중 헝가리 출신 여배우는 가수로 등장하여 남자 피아니스트의 반주에 맞춰 ‘Gloomy Sunday’를 불러댔다. 그 노래가 끝나고 가수가 잠시 자리를 떠나 괴로워하고 있을 동안 어디에서 한 발의 권총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 피아니스트가 자살한 것이다. 작품의 줄거리는 한 여인이 피아니스트와 나치 병사와 또 다른 남자 사이에서 삼각관계 내지 사각관계에 있었고, 남자들은 ‘(연인을) 다 잃느니 한 여인을 나누어 가지겠다’는 다소 비현실적인 내용이긴 하였다. 하여간, 그 영화마저도 레죄 세레스의 그 곡에서 모티브를 얻었음이 분명하였다.
자, 이제 내 이야기 정리해 볼 단계다. 듣는 이에 따라서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이 따로따로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도 슬프게 다가오곤 했고, 사라사테의 <<찌고이네르바이젠(‘집시의 노래’란 뜻임.)>>이 늘 슬프게 들리곤 하였다. 사실 스페인 집시들의 삶 그 자체가 처절하리만치 슬프기만 하였다. 누구든지 이따금씩 자신이 슬프다고 생각될 적이면, 슬픈 선율의 음악을 감상해보는 것도 꽤나 도움되리란 생각을 해보게 된다. ‘보다 낮은 단계의 슬픔을 한 단계 더 높은 슬픈 음악으로 치유받을 수 있다.’는 게 단지 나만의 생각일까? 이열치열(以熱治熱)과 비슷한 논리이긴 한데... .
끝으로, 내 사랑하는 독자님들께 조심스레 권유하겠는데, 이참에 나름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을 정해보심이?
(다음 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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