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 수필가가 쓰는 미술 이야기(2)
농부 수필가가 쓰는 미술 이야기(2)
- 꼴라주(collage) 기법의 수필-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신상발언(?)과 큰딸아이 소개부터 해야겠다. 사실 수필 장르의 특성상(?) 가족사적 이야기를 적은 적도 많았는데, 그러한 글들이 인터넷상에 널리 유포된 바도 있다. 그 일로 작은딸아이한테 들켜, 절필을 강요당함과 동시에 컴퓨터를 아예 압수당한 적도 있다. 그리하여 부득이 필명도 가족들 몰래 위와 같이 바꾸었음을 밝혀둔다. 큰딸아이도 자칫 이 글을 읽고서 거칠게 항의할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녀석을 살짝 소개해야겠다. 녀석은 그림 한 장 그릴 줄도 몰랐고, 미술학원에도 다니지 않았다. 그런데도 ‘미술평론’을 전공하는 대학 학과에, 더군다나 자기 동기생 몇까지 데리고 장학생으로 입학을 하였고, 졸업을 하기도 전에 대구시내 화랑에서 큐레이터로 취업하여 수년 간 활동한 바도 있다. 녀석이 대학 재학시절, ‘회화(繪畵)’ 과목 실기 시간에 겪은 일화는 감동적이다. 그림을 그리는 시간에 담당 교수는 녀석의 자리를 맴돌았고 고개를 갸우뚱대며 거듭거듭 말하였다고 한다.
“윤ㅇㅇ 학생, 아무리 봐도 신기하단 말이야! 개성이 뚜렷하단 말이야!”
녀석은 비웃는 듯싶어 부끄러워 미칠 것 같았다고 술회했다. 그러했는데, 그 과목의 학점은 놀랍게도 ‘A+’였다. 왜 이러한 이야기를 장황히 하느냐고? 명색이 예술가인 나는 그 교수의 안목을 존경한다는 말이다. 그분은, 미술학원을 다니고 어느 스승으로부터 그림 그리기 지도를 받은 여느 학생들의 그림보다는 전혀 지도를 받지 않은 내 딸아이의 엉터리 같은 그림을 더 높이 평가했다는 말 아닌가.
어제는 이 시리즈물 제 2화를 무엇으로 잡을까 고민하다가, 지금은 커피전문점을 하는 큰딸아이한테 불쑥 전화를 걸었다.
“점장님, 아빤데요, 화선지에다 신문지나 풀 잎사귀 등을 오려 붙이는 기법을 뭐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녀석은 금세 “꼴라주!”라고 알려주었다.
꼴라주, 유화의 한 부분에 신문지나 벽지나 악보 등 잡다한 걸 오려 풀로 붙이는 기법을 일컫는다. ‘파피에 꼴레( ‘종이를 붙이다’란 뜻임.)에서 온 말이다. 본디말은 ‘꼴레’인데 ‘풀로 붙이다’라는 뜻을 지닌 프랑스어다. 이 기법을 최초로 시도한 이는 바로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프랑스, 1882~1963)이다. 여기서 잠시 꼴라쥬 작가 소개를 미루어두자.
결론부터 미리 말하겠다. 사실 나는 최근 들어 이 꼴라주 기법을 수필쓰기에 종종 활용하여 왔으나, 적합한 용어를 찾지 못했을 뿐이다. ‘인터넷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 in’ 등의 글 일부를 나의 글 속에 그대로 베껴다 놓은 예가 거기에 해당한다. 내가 명색이 작가이지만, 나의 글 솜씨보다 더 좋은 글들이었음을 알 수 있었기에 그리 하였다. 감히 말하노니, 누구든지 내 앞에서 작가입네 내세우지 말라. 또, 누구든지 내 앞에서 뭘 좀 안다고 내세우지도 말라. 모든 지식은 이미 인터넷상에 존재하며, 많은 네티즌들의 글들이 우리네 작가들 글보다 우수한 부분이 많기에 하는 말이다. 작가인 우리네는 단지 그러한 지식과 그러한 글들을 교묘히 재편집하는 수준에 불과하다. 또 그 정도에서 만족해야 한다.
다시 미루어 두었던 꼴라주 작가 소개다. 물론, ‘꼴라주 기법에 의한 글짓기’로 이어진다.
조르주브라크(Georges Braque)는 1882년 프랑스 파리 근교의 아르장퇴유에서 태어났다. 센 강변에 자리한 아르장퇴유는 인상파 화가들이 즐겨 찾던 곳이다. 어린 시절 그는 가족과 함께 바닷가 도시 르 아브르로 옮겨 이곳에서 성장했는데, 이곳 역시 화가들의 거처로 인기가 많았다.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주택 도장과 실내 디자인 사업에 종사했다. 브라크는 어릴 때부터 조수로 아버지의 일을 도왔지만, 점차 순수미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십대 중반에 르 아브르에 있는 에콜 데 보자르 야간반에서 그림을 공부했다.
1900년 브라크는 르 아브르를 떠나 파리로 이주했다. 그는 라울 뒤피(Raoul Dufy)와 오통 프리에스(Othon Friesz)와 어울리며 인상주의와 야수주의 운동의 영향 하에서 활동했다. 또한 폴 세잔(Paul Cézanne)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세잔의 명성은 20세기로 접어들면서 급격하게 높아져서, 세잔이 사망한 지 1년 뒤인 1907년에는 파리에서 대대적인 회고전이 열렸다. 브라크는 이듬해인 1908년 여름 세잔이 말년을 보낸 남프랑스의 에스타크를 방문해 세잔 특유의 단순화된 형태와 억제된 색채를 적용한 풍경화를 그렸다.
브라크는 이 과정에서 단순히 외형적인 형태를 단순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더욱 명확하게 그리고자 구체적인 묘사를 과감하게 생략했다. 게다가 형식을 강조하기 위해 색채를 녹색, 갈색, 황토색으로 제한했다. 색 자체에서 형태를 만들어낸 세잔과 달리, 브라크는 색채를 사물의 형태를 강조하기 위한 용도로만 사용했다. 에스타크에서 여름을 보내고 그해 가을, 브라크는 에스타크에서 그린 자신의 그림을 파리 살롱전에 출품했다. 하지만 심사위원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비평가 루이 보셀(Louis Vauxcelles)은 브라크의 작품에 대해 경멸의 조로 ‘입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후 이 말은 ‘입체파(큐비즘)’라는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미술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젊은 화상 다니엘 앙리 칸바일러(Daniel-Henry Kahnweiler)가 브라크의 작품을 모아 전시했다. 칸바일러는 브라크에게 당시 파리 미술계에서 엄청난 명성을 얻고 있던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를 소개했다. 1909년부터 1914년까지 브라크와 피카소는 늘 함께 작업했고 의견을 나누면서 새로운 실험에 착수했다. 두 사람은 2차원의 평면 위에서 3차원의 오브제를 표현하기 위해 전통적인 구도를 파기하는 시도를 감행했다. 그들이 이 시기에 제작한 입체파 작품들은 미술사의 전체 지형도를 바꿔놓았고, 오늘날까지 미술가들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1908년부터 1911년까지 ‘분석적 입체주의’ 시기 동안 브라크는 초창기의 생생한 색채를 포기하고 형태와 입체감, 선에 대한 엄정한 연구에 집중했다. 이 시기의 브라크와 피카소의 공동 작업은 너무도 긴밀해서 각자의 작품 구별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였다. 뒤이은 ‘종합적 입체주의’라고 불리는 1912년부터 1914년 동안에 브라크는 신문 조각이나 모래, 톱밥 등 일반적으로 회화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재료를 도입하여 콜라주 기법으로 캔버스에 부착하여 제작한 아상블라주와 종이를 이용한 콜라주인 파피에 콜레, 눈속임기법인 트롱프뢰유, 두껍게 칠하기와 같은 새로운 기법을 선보임으로써 한결 탁월한 독창성을 발휘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브라크는 전쟁터로 나갔다. 1915년 부상으로 전역한 브라크는 전쟁 중에 입은 머리 부상으로 1년 동안 요양을 한 뒤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사이 파리에 남아 있었던 피카소는 상당한 명성을 떨치고 있었으며, 이제 두 사람은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브라크는 정물화라는 주제에 매달리며 꾸준히 입체주의의 가능성을 탐구하여 보다 세련된 경지로 입체주의를 밀고 나갔다. 특히 만년에 이를수록 조용하고 차분하게 가라앉은 색채감은 이성과 감각의 미묘한 조화를 중시하는 프랑스적인 전통의 흐름과도 맥을 같이 한다.
브라크는 1920년대 들면서 신고전주의적이고 기념비적인 여인의 형상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르게이 디아킬레프(Sergey Pavlovich Diaghilev)의 ‘발레 뤼스’의 무대장치를 디자인하기도 했고, 조각이나 스테인드글라스, 보석공예, 그래픽디자인 분야에서도 실험적인 활동을 지속했다. 후기에는 ‘작업실’ 연작, ‘당구대’ 연작, 그리고 ‘새’의 이미지를 도입한 캔버스화를 많이 그렸다. 그는 1948년 제24회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회화 부문 1등상을 수상했다. 1961년에는 살아 있는 화가로서는 처음으로 루브르 박물관에 그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브라크는 1963년 파리에서 생을 마감했다.
주요 작품으로 《에스타크 풍경 Paysage de l'Estaque》(1906), 《에스타크의 집 Houses at L'Estaque》(1908), 《거대한 나부 Grand Nu》(1908), 《포르투갈인 Le Portugais》(1911), 《과일 접시와 유리잔 Fruit Dish and Glass》(1912), 《바이올린과 파이프 Violin and Pipe》(1913~1914), 《카네포르(제물 바구니를 머리에 인 처녀) Canéphore》(1922), 《만돌린이 있는 정물 Still Life with a Mandolin》(1935), 《거실 Le salon》(1944), 《작업실 V Atelier V》(1950)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르주 브라크 [Georges Braque] (두산백과, 두산백과)에서
독자님들께서는 위 ‘꼴라주 기법의 글’을 어떻게 받아들이시든 온전히 독자님들 몫으로 남겨두련다. 다만, 긴 내용을 간추리지 못한 점은 사과 드린다.
다시 결론짓자면, 수필도 더 이상 전통에만 매달려서는 아니 된다. 꼴라주 기법도 새로운 수필 작법(作法)이 될 수 있음을 이 글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다. 굳이 사족을 붙이자면, 위 꼴라주에서 보여주듯, 조르주 브라크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주택 도장과 실내 디자인 사업에 종사했다. 브라크는 어릴 때부터 조수로 아버지의 일을 도왔지만, 점차 순수미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십대 중반에 르 아브르에 있는 에콜 데 보자르 야간반에서 그림을 공부했다.’는 점.
(다음 호 계속)
l 이 글은 ‘한국디지털도서관( 한국디지털도서관>윤근택> 작품/논문>미발표작)’으로 찬찬히 따라가시면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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