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수필가,<道德經> 제 11장을 읽다
윤 수필가,<道德經> 제 11장을 읽다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미리 밝히건대, 이 글은 ‘윤 수필가, <道德經> 제 22장을 읽다’의 후속작이다.
요 며칠째 마음이 심란하던 차에, 문득 노자(老子)가 떠올랐다. 해서, 그분의 가르침을 한 차례 겅중겅중 읽으면서 마음의 평정(平靜)을 서서히 되찾아가고 있다. 아울러, 거의 매일 한 편의 수필작품을 적는 내가, 새로운 글감이 없어 쩔쩔매다가 다시 <道德經>을 펼친 점도 있다. 사실 나는 남의 글을 거의 읽지 않는 편이다. 한 때는 게을러서, 또 한 때는 내 작품 적기에 바빠서 그리 하였다. 그러한데 이처럼 <道德經>을 또 다시 펼치게 된 이유는, 솔직히 내 글감이 달려서다. 여태껏 수 천 편의 수필작품을 빚어왔지만, 사전(事前)에 그 글들과 관련된 지식을 갖췄다기보다는 편편 작품을 빚은 후에 당해 글과 관련된 지식이 쌓였던 것도 사실이고.
사설(辭說)이 길어졌다. 곧바로 , <道德經> 제11장으로 가보기로 한다.
三十輻共一轂, 當其無有車之用.
(삼십폭공일곡,당기무유차지용.)
埏埴以爲器, 當其無有器之用.
(연식이위기,당기무유기지용.)
鑿戶牑以爲室, 當其無有室之用.
(착호면이위실,당기무유실지용.)
故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
(고유지이위리,무지이위용.)
풀이하면 이렇다.
서른 개의 바퀴살[輻]이 하나의 바퀴통[轂]에 모이는데, 그 바퀴통이 텅 비어 있음으로써 수레의 쓰임[用]이 있게 된다.
찰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데, 그 그릇이 비어 있음으로써 그릇으로서의 쓰임이 있게 된다.
문을 내고 창을 뚫어 방을 만드는데, 그 방이 텅 비어 있음으로써 방으로서의 쓰임이 있게 된다.
그런 까닭에, 있는 것[有]이 이롭게[利] 된다는 것은, 텅 비어[無] 있을 때이다.
기가 차지 않은가. 내가 언뜻 느끼기에, 이 가르침이야말로 후대 시타르타의 가르침이 적힌 <般若心經>의‘色不異空空不異色,色卽是空空卽是色).’으로 맥이 이어진 듯하다. 많은 불자(佛子)들이 나한테 거세게 항의를 하든 말든. 그렇다고 하여, 내가 노자의 사상을 불교에서 그대로 베껴갔으리란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노자(老子)께서는 기원전 604년에 오셨고, 고타마 시타르타(석가)님께서는 기원전 543년에 오셨다.(서기 2017년은 불기 2561년이다.) 노자가 오신 후 61년이 지나서야 석가님이 오신 셈이다. 내가 믿는 예수님께서는 석가님이 오신 후 554년 지나서야 태어나셨고. 일단, 셈은 그렇게 된다.
위 11장의 가르침은 ‘빎[無]’이 지닌 ‘가변성적 (可變性) 에너지’를 우리한테 웅변 이상으로 전해주는 듯하다. 이를 반대로 생각하자면, ‘채워짐’ 내지 ‘채워져 있음’은 곧 ‘비워짐’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 실제로, 노자의 <道德經> 가르침 여러 구절에는 그렇게 적혀 있다. 우리한테 너무도 익숙한‘달도 차면 기운다.’의 교훈마저도 이미 노자사상에 다 있었다는 것을.
<道德經>의 내용을 거듭거듭 음미하다가 보면, 살아가는 동안 안달을 부릴 하등의 이유도 없어질 것만 같다. 지난 번 ‘윤 수필가, <道德經> 제 22장을 읽다’에서도 이미 적은 바 있지만, 나는 또 다시 노자의 역발상(逆發想)을 감탄할밖에.
주문(呪文)을 외듯, 이번에도 노자의 가르침을 거듭 읊어본다.
‘찰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데, 그 그릇이 비어 있음으로써 그릇으로서의 쓰임이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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