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놀림
손놀림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손놀림, 참으로 재미나는 낱말이다. 아무것도 아니 하고 손을 놀려[休]놓는 상태를 이르는 말이 되기도 하며, 재바르게, 혹은 굼뜨게 손을 놀리는[戲弄] 상태를 나타내기도 한다. 나는 전자(前者) ‘손을 놀려놓는 상태’만은 무척 꺼려한다. 내 손에는 언제고 무엇이 들려있고, 내 승용차 안에는 언제고 무엇이 실려 있다. 살아생전 내 양친이 솔선수범하였던 대로. 귀가하는 나의 손에는 하다못해 돌멩이 하나, 나무 작대기 하나라도 들려있기 마련이다.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을 한다는 속된 말도 있지만, 나는 손발의 고생을 언제고 마다지 않는다.
여담이다. 분류학상 포유강>영장목>사람과>인종(人種)에 속하는 우리네. 여타 동물보다 뛰어난 점을 들어보라면, 불을 사용할 줄 알며 문자를 지녔고 직립보행을 하며... . 하지만, 지난날 대학시절 교양과목인‘문화사(文化史)’를 강의하던 노교수(老敎授)는 분류학상 인종이 여타 동물보다 빼어난 점 하나를 더 들어주었다. 손가락이 다섯 개로 갈라져 있고, 이를 자유자재 사용할 수 있는 점.
다시 내 손놀림에 관한 이야기다. 아내는 늘 이런 식의 꾸지람이다.
“현지 아빠, 이젠 제발 그만하세요. 화물차도 아니건만, 그 비싼 승용차에다 아파트 낙엽포대를, 거름으로 쓰겠다며 자꾸 실어오시다니... .”
내가 손을 놀려놓지 못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나의 또 다른 글 ‘인생을 바꾼 사물들’의 제 5화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 5. 지게작대기
그는 행운아다. 시골 가난한 농부 부부의 열 남매 자녀들 가운데 아홉 번째로 태어났으나, 4년제 대학에 유일하게 보내진 이다. 그는 겨울방학을 맞아 고향집에 가게 된다. 무지렁이인 그의 부친은 사랑채 툇마루에 걸터앉아 아들한테 자랑했다.
“야야, 저 고샅 담벼락에 기대 세워둔 지게작대들을 한번 보거래이. 이 애비가 지난 삼동(三冬)에 지고 온 나뭇짐 숫자와 똑 같대이.”
그의 부친은 여느 농부들과 달리, 집을 나설 때 지게작대기를 지니지 않았다. 지게작대기의 본디 몫은 지게를 괴기만 하면 되는 거. 그의 부친은 나뭇짐을 지고 올 적에도 두 손마저 놀릴 수 없다며 새로 지게작대를, 그것도 굵은 통나무를 끌고 오곤 한다고 일러주었다.
그 지게작대기 더미를 보던 그는 내심 부끄러워하며 이내 자취방으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취직영어책을 파고 지냈다. 영어단어를 악을 쓰며 외우며 지냈다. 덕분에, 후일 그는 국영기업체 공개채용에, 300 대 1 경쟁을 뚫고 당당히 합격하였다.
그가 도대체 누구? 그는 현존하는 대한민국 수필작가들 가운데에서 빼어난 수필가다. 20대 초반이었던 그는 대학입학시험 원서 ‘취미란’에다 ‘문학작품창작(수필)’이라고 적고, 일찌감치 자기가 갈 길을 아주 구체적으로 정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대한민국 수필사(隨筆史)에서 보기 드물게 30대 초반에 문단에 데뷔한 이, 그는 종이책 분량으로 따져 20~30권도 넘을 수필작품을 적은 이, 그의 부친이 지게작대기를 모으듯 수필작품을 적어 모으는 이. 그가 바로 이 글을 적는 나다. >
나는 손을 부려 일하는 게 취미다. 아내는 나더러 남들처럼 여행도 즐겨보라고 권한다. 생전에 여행을 많이 한 이는 천국에 가서도 아름답게 지낸다면서. 하지만, 일하는 게 취미인 나한테 아내의 말이 통할 리 없다. 나는 죽는 그날까지 일할 것이고 돈을 벌 것이다. 생업은 종교보다도 거룩한 거.
내 신실한 애독자님들께 ‘나의 손놀림’에 관해 결코 빠뜨릴 수 없는 게 하나 더 있다. 나의 양 손 손가락 열 개 가운데에서도 양쪽 검지와 중지(中指)의 놀림. 나는 흔히들 ‘독수리 타법’이라고 하는 키보드 두드림으로 글을 쓴다. 사실 훈련이 오래 되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젠 내 생각보다 그 검지와 중지의 키보드 두드림이 앞서가곤 한다. 달리 말해, 생각하여 가며 글을 쓰는 게 아니라 키보드 두드리며 생각해 나간다는... . 죽는 그날까지, 아니 내 의식이 살아있는 한 이러한 검지와 중지의 놀림은 쉬지 않고 이어가야 하리.
* 이 글은 본인의 블로그, 이슬아지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