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짚모자를 쓰는 계절
밀짚모자를 쓰는 계절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슬픈 각시 오나 가나 (마찬가지).’란 말이 있다.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란 말도 있다. 전자(前者)는, 슬픈 각시가 팔자를 한번 뜯어 고쳐보겠다고, 크게 맘 먹고 개가(改嫁)를 하여도 별반 나아질 게 없다는 뜻을 지닌다. 후자(後者)는, 박을 타지 않고 통째로 둔 채 일정부분만 후벼낸, 이른바 뒤웅박에서 비롯된 말이다. 그 뒤웅박엔 이런저런 잡다한 것들을 넣곤 하였다. 부싯돌, 채소 씨앗, 닭 모이, 일용품 등. 그 뒤웅박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그 쓰임새와 가치가 달라졌던 데서 비롯된 속담이다. 남성중심적이었던 시대상이 반영된 말이다. 하여간, 위 두 속담이 지금의 나한테 딱 들어맞는 말이다. 나는 내 농장에서도 밀짚모자를 종일 쓰는데, 격일제로 근무하는 이 연수원에서도 밀짚모자를 한 나절씩 써야 한다. 사실 내 농장에서야 내가 즐겨 농사를 하는 관계로 기껍게 쓰게 된다. 그러나 이곳 연수원에서는 내켜서 밀짚모자를 쓰는 게 아니다. 고유의 기숙사 사감(舍監) 업무 외에 부과된 제초작업을 하기 위해서 부득이 그리 한다. 관리실 직원들을 도와, 오후 한 나절씩 이 너른 벌에서 예초기 등으로 제초작업을 하여야 한다. 하여간, 나는 여름 내내 밀짚모자에서 해방될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하여 이처럼 요긴하고 훌륭한 밀짚모자를 탓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데!
오늘은 잠시 나무그늘에서 땀을 식히며 흥얼대어 보았다. 바로 ‘전우’ 작사, ‘박춘석’ 작곡, ‘박재란’ 노래인 ‘밀짚모자 목장 아가씨’였다.
‘시원한 밀짚모자 포플러 그늘에/양떼를 몰고 가는 목장의 아가씨// 연분홍빛 입술에는 살며시 미소 띄우고/널따란 푸른 목장 하늘엔 구름 가네//양떼를 몰고 가는 목장의 아가씨/연분홍빛 입술에는 살며시 미소 띄우고//널따란 푸른 목장 하늘엔 구름 가네/구름 가네 구름 가네//’
제법 목가적(牧歌的)인 노래다. 사실 내 농장에서 내 농사를 하는 동안 밀짚모자를 쓸 적에는 기분 만땅(‘full tank’의 일본어식 표현이긴 하지만. )이다. 그 가벼움, 그 챙 넓음, 그 보리새꽤기 내음의 향긋함… . 숱한 모자를 두루 써보았으나, 밀짚모자를 능가하지는 못하였다. 요즘은 농부들이 대체로 농약방에서 얻은, 농약제조회사 홍보용 모자를 쓰는 편이다. 그 모자는 사모(紗帽)인양 날개를 가진 게 특징인데, 그 날개는 펄럭대며 뒷목을 가려 뙤약볕으로부터 농약으로부터 보호해준다. 나는 그 모자보다는 밀짚모자를 즐겨 쓴다. 농장에는 몇 개씩이나 된다. 쉴 참에 밀짚모자를 벗어 놓고, 시원한 보리차나 막걸리를 한 대접 따라 마시면, 이내 원기가 되살아 나곤 한다. 사실 여름날 밀짚모자를 써야만 진정한 농부 같다. 심지어, 허수아비조차 밀짚모자를 써야 허수아비 본연의 모습 같다.
오늘은 문득,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숱한 재료를 다 두고, 하필이면 밀짚모자를 고안해 낸 이유가 대체 뭘까?’
사실은 보리새꽤기를 뽑아 일일이 머리를 땋듯 땋고, 그걸 다시 재봉틀에 박아야만 비로소 만들어지는 게 밀짚모자 아니던가. 솜씨 좋은 이들은 보리새꽤기로 길게 땋아 밀짚모자 제조업자한테 내다판 일도 있었다. 한마디로, 재료는 흔하지만, 밀짚모자를 만드는 데는 품이 많이 든다. 그 수고에 비해 값이 그렇게 비싼 축에도 못 든다. 특히, 요즘은 값싼 중국산과 베트남산이 들어오기에 큰 부담 없이 밀짚모자를 여러 개씩이나 갖게 되었다. 몇 몇 분이 선물로 갖다 준 것도 있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허리띠인양 봉긋한 머리부분과 챙 사이에 리본이 달려 있다. 내가 어릴 적에 보았던 그 띠는, 대체로 유명배우들의 사진이 담긴 사진필름이었던 게 특징이었다. 참말로, 하고많은 재료를 다 젖혀두고 밀짚으로 모자를 만들 생각을 어떻게 하였더란 말인가. 보리와 밀의 수확기가 초여름이고, 그 부산물인 새꽤기를 쉽게 얻을 수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그보다는… 보리가 지닌 특성과 상당히 관련이 있을 거라고 퍼뜩 떠올리게 된다. 다들 잘 아시다시피, 보리는 가을에 파종하여 그 추운 겨울에 자라 초여름에 수확하는 작물이다. 서늘한 기후를 좋아하는 작물이다. 한의학에서 종종 쓰는 표현대로, 보리쌀은 그 성질이 차서, 갈증을 해소하고 방광의 열을 내린다. 보리로 만든 술, 즉 맥주를 마시면 이내 시원해지는 이유가 그 덕분이다. 또, 보리차를 마시면 이내 갈증이 해소되는 것도 그 덕분이다. 보리의 그러한 성질이 보리새꽤기엔들 왜 남아 있지 않을라고? 꼭히 그렇지는 않더라도, 우리네가 집단무의식에 의해서라도 밀짚모자를 쓸 적이면, 시원해지는 기분을 느끼게 될 것이다. 게다가, 위에서 이미 이야기하였지만, 가볍고 향긋한 보리내음까지 배여 나서 즐겨 쓰게 되는 모양이다.
내가 본 몇 몇 분의 밀짚모자는 인상적이었다. 우선, 어릴 적 우리 집에 ‘꼴머슴’으로 들어왔던 성환이 형. 형은 밀짚모자에다 낙서를 해두었다. ‘뭘 봐?’가 그것이었다. 당시에는 밀짚모자 등에다 ‘뭘 봐?’라고 낙서를 하는 게 유행이었다. 성환이 형은 일종의 반항의식을 그렇게 표현했던 것 같다. 다음은 화가 반 고흐. 그는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을 그렸다. 얼굴에 잔털이 원숭이만치나 많이 돋은 자신의 얼굴을 그렸다. 끝으로,노무현 전직 대통령. 내가 존경해 마지 않는 서민 이미지의 그분. 그분은 낙향하여 밀짚모자를 쓰고 자전거를 타고, 그 자전거 꽁무니에다 어린 손녀를 태운 수레를 달고, 시골길을 소년처럼 달리곤 하였다. 그분은 마을 구판장에서 밀짚모자를 탁자 위에 벗어둔 채 개구쟁이처럼 담배를 꼬나 물고 의자에 젖히고 앉아 있기도 하였다. 농부 이미지를 더욱 부각시켰던 그 밀짚모자와 검은 장화. 그분의 후임 대통령은, 그러한 소탈한 모습에 질투가 나서 그랬을까, 그분을 몹시 핍박하였다.
사실 밀짚모자라고는 하지만, 그 재료가 보릿짚인 경우가 더 많다. 그러함에도 굳이 밀짚모자라고 한다. 이는 표준어규정 제25항에 근거한 말이기도 하다. ‘의미가 똑 같은 형태가 몇 가지 있을 경우, 그 중 어느 하나가 압도적으로 널리 쓰이면, 그 단어만을 표준어로 삼는다.’는 규정. 해서, 보릿짚으로 엮어 만들어도 밀짚모자라고만 써야 한단다. 우리 쪽 어른들은 ‘맥고모자(麥藁帽子)’라고 불렀다. 내 아내는 자기 친정 쪽에서는 ‘보릿대모자’라고 불렀다면서, 습관이 되어서인지 곧잘 이렇게 말하곤 한다.
“당신, 얼굴 다 타겠어요. 제발 보릿대모자 쓰세요.”
그 어떤 밀짚모자라도 ‘챙’이 떨어져 나가면, 그 길로 끝이다. 그러면 아무짝에도 못 쓴다. 비를 맞으면 그렇게 되는 일이 잦았다. 넓은 챙은 햇빛을 가려주는 일을 떠맡는다. 챙은 넓을수록 좋은 법이다. 챙을 두고, 우리 쪽 어른들은 ‘차양(遮陽)’이라고 불렀다. 사실 ‘챙’은 ‘차양’의 줄임말로 봄이 옳다. 또, 어른들은 ‘치알’이라고 부른 예도 있다. 알아본 바, ‘차일(遮日)’의 사투리였다. 잔칫날 마당에다 널따란 ‘그늘막’을 쳤는데, 그걸 특히 ‘치알’이라고 하였다. 제법 거친 삼베천으로 재봉해서 만들어 마을에서 공동으로 썼던 그 치알. 가마솥에서는 돼지국밥이 쏼쏼 끓고, 치알은 바람에 흔들리고,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쓴 노인네들은 모여들고, 차양이 떨어진 밀짚모자를 쓴 거지들은 동냥을 오고… .
오래도록 그늘에서 쉬게 되면, 오히려 더 힘이 빠지는 법이다. 그러니 한가로운 생각을 거두고, 이젠 ‘맥고모자’를 도로 써야겠다. 아직 해야 할 오늘 일이 많이 남아 있으니… . 그리고 밀짚모자와 벗하며 불평불만 없이 이 여름날 지낼 것이다. 내가 즐겨서든 마지못해서든 해야 할 일은 마저 해야 되니까! 더욱이, 허수아비도 밀짚모자를 쓰는데 하물며 인간인 내가… .옛날, 중국의 북산(北山)에 우공이라는 90세 된 노인이 있었는데, 태행산(太行山)과 왕옥산(王屋山) 사이에 살고 있었다. 이 산은 사방이 700리, 높이가 만 길이나 되는 큰 산으로, 북쪽이 가로막혀 교통이 불편했다. 우공이 어느 날 가족을 모아 놓고 말했다. "저 험한 산을 평평하게 하여 예주(豫州)의 남쪽까지 곧장 길을 내는 동시에 한수(漢水)의 남쪽까지 갈 수 있도록 하겠다. 너희들 생각은 어떠하냐?" 모두 찬성했으나 그의 아내만이 반대하며 말했다. "당신 힘으로는 조그만 언덕 하나 파헤치기도 어려운데, 어찌 이 큰 산을 깎아 내려는 겁니까? 또, 파낸 흙은 어찌하시렵니까?" 우공은 흙은 발해(渤海)에다 버리겠다며 세 아들은 물론 손자들까지 데리고 돌을 깨고 흙을 파서 삼태기와 광주리 등으로 나르기 시작했다. 황해 근처의 지수라는 사람이 그를 비웃었지만 우공은 "내 비록 앞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나 내가 죽으면 아들이 남을 테고, 아들은 손자를 낳고……. 이렇게 자자손손 이어 가면 언젠가는 반드시 저 산이 평평해 질 날이 오겠지."하고 태연히 말했다. 한편 두 산을 지키는 사신(蛇神)이 자신들의 거처가 없어질 형편이라 천제에게 호소했더니, 천제는 우공의 우직함에 감동하여 역신(力神) 과아씨(夸蛾氏)의 두 아들에게 명하여 두 산을 하나는 삭동(朔東)에, 또 하나는 옹남(雍南)에 옮겨 놓게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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