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짓기의 폐해
이어짓기[連作]의 폐해(弊害)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시골에서 소년기까지 양친의 농사일을 도왔고, 대학에서 농업을 전공하였으며, 지금은 농부로 돌아와 지내는 나. 오늘은 문득 ‘이어짓기의 폐해’를 다시 떠올리게 된다. 사실 나는 벌써 수년째 고추농사도 제법 크게 짓고 있으나, 해마다 지난해에 고추재배를 하였던 밭에는 거듭 짓지 않고 다른 밭에 돌려짓기[輪作]하는 편이다. 고추는 가지과(가지科)의 작물이고, 가지과의 작물들은 이른바 ‘토양기피성(土壤忌避性)’을 지닌 대표적 식물로 알려져 있음을 그 누구 못잖게 아는 까닭에. ‘토양기피성’이란, ‘동일 작물의 후대(後代)가 자신의 선조들이 살았던 땅을 꺼려하는’ 걸 이르는 농업전문용어다. 내 고향 경북 청송은 인접한 영양군과 더불어 고추 특산지로 알려져 있으나, 요즘 들어 퇴조(退潮)다. 그곳 농부들은 한정된 좁은 토지라 부득이 거듭거듭 같은 밭자리에다 고추농사를 할밖에. 내가 꼬맹이시절일 때부터 그리 해 왔으니, 줄잡아 50년 동안 같은 밭에 고추를 내리 재배해 온 셈 아닌가. 그러한 이어짓기는 역병(疫病)과 탄저병(炭疽病) 창궐의 폐해로 해마다 나타난다. 고추 주산지의 불쌍한 농부들을 돕고자, 여러 종묘회사와 고추연구소 등이 역병과 탄저병에 강한 고추종자를 개발해내었다고 자랑하지만, 썩 성공한 예도 없는 게 사실이다. 또, 내 고향사람들이 이 글 읽으면 크게 화가 날 테지만, 그곳 농부들은 역병과 탄저병을 잡고자 농약을 엄청 칠 수밖에 없음을 내 신실한 애독자들께서는 쉬이 헤아려보실 것이다.
사실 고추만이 토양기피성을 지닌 작물이 아니다. 내가 아는 바, 깨와 복숭아도 그 정도가 심하다. 그리고 정도의 차이는 있으되, 거의 모든 작물이 토양기피성을 지녔다. 왜 그러한 일이 생기는지 궁금하시지 않은가? 이제 명색이 한 때 농학도였고 지금은 농부인 내가 낱낱이 알기 쉽도록 소개해드리고자 한다. 어느 특정 작물은 생육기간 동안, 토양 속 특정 영양소를 즐겨 빨아 당긴다. 그러니 후대가 그 자리에 서면 취할 영양소가 부족할 게 뻔하다. 자연, 생육불량으로 이어진다. 어느 작물은 자기 체내의 독성물질을 뿌리 등을 통해 배출하여 토양에 남기기도 한다. 동일 작물 이어짓기를 하게 되면, 그 독성물질을 취하라는 뜻이 되니... . 작물의 뿌리에서는 단백질, 당류, 기타 영양분, 독성물질이 배출되어 다양한 미생물들을 불러들여 먹고 살게 하는데, 이어짓기를 하게 되면, 이들 미생물 사이의 연쇄적 먹어사슬의 균형을 붕괴하게 되니... . 사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는 없으되, 토양 속 세계도 하나의 조화로운 사회이고 '질서로운 일체로서의 우주'여야 한다는 거. 이밖에도 이어짓기의 폐해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독자님들 머리가 아플세라, 이 정도 소개로 그친다.
내가 이 글을 적는 참 뜻은, 독자님들께 고작 농사기술이나 전수(傳授)코자 함이 아니다. 돌이켜보니, 내가 수필작가로 데뷔하여 작품활동을 이어온 지가 26년여 된다. 딴에는 돌려짓기를 한다고 애를 썼으나, 과연 돌려짓기였을까 반성해 본다. 오히려 이어짓기를 해 왔던 게 아닐까 하고서... . 심지어 버젓이 ‘연작(連作)’이란 이름으로 괄호 속에다 아라비아숫자로 명기(明記)까지 해가며 적은 글들도 부지기수였음에 흠칫 놀란다. ‘수평선 너머로 띄우는 편지’, ‘화투’, ‘절골 이야기’, ‘대롱’, ‘나무난로 앞에서’, ‘농부 수필가가 적는 음악 이야기’, ‘농부 수필가가 쓰는 미술 이야기’ 등. 그 연작물들의 폐해는 정말 없었던가 이 즈음에서 적이 근심하게 된다. 딴에는 영토를 확장하여 새로운 작물을 재배한다고는 했지만... . 가장 큰 연작의 폐해는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아마도 ‘매너리즘’이 아니었을까 싶다. 마치 거푸집을 짜고 거기다가 레미콘을 갖다 부은 듯한 거.
정작 고추를 비롯한 각종 작물을 돌려짓기를 제법 잘 실천하면서, 창작활동에 관해서만은 이어짓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걸 심각히 고민하는 밤이다. 이는 비단 나만의 고민은 아닐 것이다.
‘지력(地力)을 되살리는 농부의 맘으로, 이참에 아예 글쓰기를 아예 접어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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