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신작

피사리를 하고

윤근택 2015. 7. 13. 22:56

 

 

 

                                 피사리를 하고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지난날 대학시절 전공 필수과목이었던 <<農學槪論>>의 첫 장을 열면, 농업의 특징이 열거되어 있었다. 참말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내용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으랴만, 여타 산업에 비해 취약성부터 적혀 있었다. ‘자본의 회전율이 낮으며, 자연(기후)에 크게 영향을 받고, 노동집약적이며... .’. 여기서 자본의 회전율이 낮다함은, 기껏해야 한 해 1모작으로 수확을 봄을 일컫는다. 해서, 예나 지금이나 농부들은 그 수고에 비해 수입이 퍽이나 적은 편이다. 그러나 어르신들은 한결같이 다음과 같이 말씀들 하신다.

      농토가 있고, 한 평생 배운 도둑질이라 차마 버리지 못하고 해마다 농약 값, 비료 값도 못 미치는 걸 뻔히 알면서도 농사를 한다네. ”

      하지만, 나는 농사를 하면서 비록 해마다 농약 값이 만만찮게 나가지만, 참으로 편한 세상이 되었음을 느끼곤 한다. 특히, 내가 편편의 수필작품에서 자주 예찬했지만, 제초제는 생력농업(省力農業; 일손 더는 농업)의 총아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오늘 오전에는 내 논 400여 평 두 뙈기와 협력농업인(?)’OO’의 논 600여 평 네 뙈기에서 피사리를 마칠 수 있었다. 피사리란, 벼논에 신분을 감춘 채 벼와 함께 자라는 를 뽑아내는 일을 일컫는다. 혼자서 그 너른 논의 피를 다 뽑을 수 있었다는 거 아닌가. 예전 내 어릴 적에는 온 식구가 매달려, 그것도 네 벌 매기까지 했건만. 그 비결에 관해서는 잠시 후에 다시 내 신실한 애독자님들께 소개코자 한다. 마침 장맛비가 내리고 있어, 다른 들일을 하기에는 마뜩하지 않아, 무논 일을 그렇게 하고자 하였다. 기왕에 무논에 들어가자면, 고무장갑처럼 얇고 목이 사타구니까지 닿는 무논용 장화를 신어야 하고, 어느새 종아리높이만치 자란 벼잎에 맺힌 이슬을 피하자면 우의(雨衣)를 입어야 하는 관계로, 피사리 날을 그처럼 비오는 날로 잡았던 것이다.

      이제 내가 그처럼 짧은 시간에, 제법 너른 벼논에서 피사리를 마무리지을 수 있었던 비결을 이야기해볼까 한다. 사실 나의 논과 OO’의 논에는 피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냥 두어도 될 만치. 하지만, 우리 둘의 논은 각각 마을 사람들이 오가는 길가에 있기에, 남의 눈을 위해서라도 피사리를 그렇게 했을 따름이다. 우리는 이미 피사리 전문 제초제를 두 차례 뿌린 바 있다. 그야말로 초기진압을 해 두었다. 그러니 피가 많이 살아남아 있을 리 없다. 나는 이 객지에서 3년차 벼농사를 하고 있는데, 첫해에 무척 신기한 일을 체험했다. 트랙터로 써레질을 하던 OO’가 나더러 트랙터 바가지(?)에 올라타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나한테 제초제 약병을 건네주었다. 숫제 우유 같은 색깔을 띤 현탁액이었는데, 그 약병의 주둥이에는 마치 중화요리집 고춧가루통처럼 구멍이 송송 나 있었다. 그것이 바로 초기제초제였다. 나는 이리저리 허공에 흔들어 무논에다 그 현탁액을 뿌려댔다. 사실 너른 논에서 혼자서 트랙터로 써레질을 하는 이들은 그보다 더 발전된(?) 방식을 취한다고 하였다. 트랙터 바가지에다 그 제초제 약병을 거꾸로 매달아 두면, 트랙터가 운행되는 동안 알맞게 무논에 방울방울 떨어져 골고루 퍼진다는 거 아닌가. 본디 제약회사는 써레질을 끝낸 후 흙탕물이 잠잠해질 때에 치라고 권유하지만, 그리하여도 만판이었다. 우리의 제초작업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앙기로 모를 심은 후 15일 전후 하여 2차 제초제를 논에 뿌렸다. 그때는 논둑에 서서 좁쌀같이 생겨먹은 이른바 과립(顆粒) 제초제였다. 골고루 온 논에다 흩여 뿌리기만 하면, 그야말로 제초작업 끝!’이었으나, 그래도 지독한(?) 녀석들은 끝까지 살아남는다. 그 지독한 녀석들을 오늘 오전에 그처럼 뽑아 버렸을 따름이다. 실은, 내 논과 달리, ‘OO’네 논에는 그 동안 피가 많이 살아남아 있었다. 그 연유를 둘 다 알 수는 없었으나, 제초제 담당이었던 내가 죄밑이 되어, 그를 설득하여 한 차례 더 독한 피사리용 제초제를 친 바 있다. 나는 그가 다리가 불편해서 무논작업이 어려움을 아는 터라, 오늘 나는 그에게 기별도 않은 채 혼자서 그처럼 피를 확인사살했다. 그의 논에 들어가 본즉, 보름 전까지만 하여도 벼보다도 더 많고 펄펄했던 피들이 이미 초주검이 되어 있었다. 잎은 노랗게 말라 있었고, 뿌리는 손으로 당기자마자 맥없이 당겨 나오는 등. 내가 단골로 드나드는 시내 경산 농약사김 사장의 처방이 새삼 놀랍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는 피사리가 아니 되면 자기가 전적으로 책임지겠다고 하더니...

      나의 신실한 애독자님들, 잠시 한번 생각해보시라. 피와 벼는 사촌지간이나 진배없는데, 벼한테는 전혀 지장을 주지 않고 피만 골라 죽이는 제초제가 있다니 놀랍지 아니 하냐고? 나처럼 벼농사를 하는 농부한테는 피가 사이비(似而非)’임에 틀림없다. 참말로 육안으로 구분하기도 어렵다. 굳이 그 차이점을 낱낱이 설명하라면 나는 못할 것 같다.게다가 벼 포기 사이에 섞여 있으면 손으로 뽑아내기란 참으로 어렵다. 그러한 때에 피 전문 킬러를 쓰게 되면 그야말로 일망타진할 수 있으니, 농부의 수고를 얼마나 덜어주느냐고? ‘2,4-D(2,4 다이클로로페녹시아세트산)’으로 명명되었던 초창기 논 제초제. 피사리용 제초제의 주성분은 메타미포프(metamifof)’라는데, 그 성분으로 만든 피사리용 제초제에 세계 15개국은 각기 물질특허를 내어주고 있다고 한다. 지난날 <<栽培學原論>>을 강의하였던, 대학 모교 선배이자 수도작(手稻作) 전공이었던 박사님. 그분은 피 전문 제초제가 벼는 다치지 않게 하면서도 피만 골라잡을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피와 벼의 결정적 차이점은, 그 마디구조에 있다고 하였다. 벼는 마디를 잎이 둘러싸서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데 비해, 피는 마디를 둘러싼 잎이 없어 그대로 드러낸다고 하였다. 피사리용 제초제는 피의 취약 부위인 마디를 집중 공격하는 이를테면, 신경작용제 같은 거. 더 깊이 설명하자면, 머리가 어찔어찔 할 테니, 이 정도만 소개하기로 하자.

      내 신실한 애독자들께 논농사에 관한 지식 하나를 팁으로 드리고자 한다. 우리는 제초제를 위와 같이 치고 있고, 도열병이니 멸구니 하는 일년치 병충 방제를 한 방에 끝낸다는 거 아닌가. 이앙기용 모판에다 마치 깨소금을 흩이듯 병충방제 과립을 솔솔 뿌리면 일 년 병충방제 끝!’이다. 이 점에 관해서도 제약회사 관계자들께 찬사를 보낼밖에. 친절하게 농약 팩에다 절반은 청색, 절반은 적색으로 칠해두기까지 하였다. 이는 제약사와 농부들 사이의 일종의 약속 같은 것이다. 더 따질 것도 없이, 청색은 병충방제약, 적색은 병균 방제약이라는 뜻이다.

      위에서 나는 피를 사이비라고 몰아세운 바 있다. 피가 아닌 벼를 주목적으로 재배하기에 피는 자연 잡초가 되므로 그러한 말을 썼다. 하지만, 본디부터 작물이 따로 있고, ‘잡초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雜草學原論>> 첫 페이지에는 잡초의 정의를 이렇게 내리고 있다. 가령, 나물로 삼고자 비름을 키우는 밭에 중간중간 배추가 자라면 비름은 작물이요, 배추는 잡초다. , 의도 내지 목적 여부에 따라 작물이 되기도 하고 잡초가 되기도 한다는 뜻이다. 모든 게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비롯되었음을. 실제로, 피와 벼의 관계도 그러하다. 피의 역사는 벼보다 더 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도 원산으로 알려진 피가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 들어온 지는 꽤나 오래 된다고 한다. 함경북도 회령읍 오동 유적지에서 탄화(炭化)된 피가 출토되었다지 않던가. 이미 청동기시대 때부터 우리네 조상들은 피를 작물로 재배했음을 알 수 있다. ‘사흘 동안 피죽 한 그릇도 못 먹은 사람처럼.‘이란 말도 실은 쌀이 아닌 피로 쑨 죽을 일컫는다고 한다. 우리네 선조들이 차츰 피 대신 수확량이 많고 낟알이 굵은 벼를 더 재배해오는 동안, 피를 모질게 대했을 것은 뻔하다. 그러함에도 이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은 이유를 살펴보았다. 가히 눈물겹도록 놀라운 일이었다. 피는 같은 벼과 식물임에도 벼보다 그 생명력이 강하다는 점. 벼와 달리, 장기간 저장해도 맛이나 비타민 b1의 함량의 변화가 없다지 않던가. 그러한 점이 구황작물로 애용되어 왔다는 거. 저 아랫녘 구례의 지리산 피아골피를 (곡물로) 많이 재배했던 골이란 말에서 왔다니! , 피는 산소가 없어도 발아한다고 한다. , 물에 씨앗이 잠겨 있어도 피는 발생한다고 보면 옳다. 외국의 어느 수도작 전문학자는 자기 논문에서 색다른 용어까지를 썼다. 피는 생물계절학적‘,’형태학적모방 능력이 뛰어나다고. 무슨 말인고 하니, 피는 벼농사를 하는 농부들로부터 구박을 받게 되자 살아남고자 벼와 비슷한 모습으로, 숫제 헷갈리도록 진화해 왔다는 뜻이다. , 윌슨(Wilson)이란 학자는 1979년 자기 논문에서 피가 여태껏 살아남을 수 있었던 또 다른 힘이 메뚜기의 피해를 입지 않는 데서 왔다고 주장했다. 그는 피가 메뚜기가 매우 싫어하는 트랜스 아코니틱 에시드(trans -aconitic acid)‘를 내어놓는다고 한다. 피도 여느 잡초들 못지 않은 나름의 종족보존의 전략을 지니고 있음이 분명하다.

      피라면 다 같은 피인 줄로 알았더니, 꽤나 여러 종()으로 분화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식용 피, 남돌피논피·돌피·좀돌피·대만피 등이 그것들이다. 피는 떡, 된장, 간장, 술의 원료로도 쓰였으며, 최근 들어서는 수확량이 많고 식용 가능한 수레첨이란 피를 육종(育種)하여 농가에 보급하고 있다고 한다. 피는 피부 미백, 항암, 항산화작용에 의한 노화방지 등에도 탁월한 기능을 발휘한다고 한다.

      이미 나는 위에서 작물과 잡초의 차이점에 관해 밝힌 바 있다. 어디까지나 인간중심적 사고 내지 인간 편의에 따라 구별해 부르는 이름일 따름이라는 거. 벼농사는 외국쌀 수입 개방이니 어쩌고저쩌고 해서 더 이상 재미가 없는 터이니, 어디 앞으로는 작물로서 벼 대신 피를 재배해봐?

      끝으로, 피사리용 제초제를 개발해내어 힘 부치는 농부들 일손을 획기적으로 줄여준 농약회사들 연구진들께 전국의 농부들을 대신하여 깊이 감사드리며 글 맺기로 한다.

  

   작가의 말)

     수필가의 사명 가운데는 '살아있는 지식의 전달'도 있을 것이다. 그걸 위해서는 더는 탁상 맡의 이야기가 아니어야겠다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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