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신작

오천 원 지폐의 인물- 역사 비틀어보기 -

윤근택 2023. 12. 17. 16:16

 

오천 원 지폐의 인물

- 역사 비틀어보기 -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음악 칼럼니스트)

 

 

오천 원 지폐의 인물. 그의 초상화 우측에는 자잘한 글씨로 ‘율곡 이이(1536-1584)’로 적혀 있다. 오만 원 지폐의 인물은 그의 모친 신사임당(1504-1551). 우리네가 늘 지갑에 지니는 지폐이니, 그들 모자(母子)는 대단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이이, 그가 조선시대 대학자였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가 13세 때부터 시작하여 29세 때까지 각종 과거시험에 무려 9회나 장원급제를 하였다는 사실도 놀랍기만 하다. 해서, 그를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는 한자로 된 중국 서적을 한눈에 9줄씩 읽어나갔다고도 한다. 거의 천재적인 ‘비디오형 독서법(?)’이었던 셈.

이쯤 해두고... . 지금부터 당시 조선시대의 계급사회의 모순점(?) 등을, 나름대로 역사 비틀어보기로 이야기 펼치고자 한다. 요컨대, 세상은일단 과거에 급제하거나 권력과 돈을 거머쥔 이들의 세상이었다는 것을. 그들만의 리그였다는 것을. 수많은 관노(官奴)와 재산을 주물럭거리게 되었다는 것을. 아동성착취와 노비노동착취를 나라가 공공연히 뒤보아주었다는 거. 축첩(畜妾)과 ‘기방(妓房) 나들이’를 일삼았던 관리들. 이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기야 사회분위기가 그러했을 테니. 사실 내가 이미 적은 여러 편 수필작품에서도 이 점을 밝힌 바 있다. 송강 정철과 기생 강아(江娥), 퇴계 이황과 기생 두향(杜香) 등. 그들은 특권을 그렇게 한껏 누렸다. 그러함에도 후세사람들은 그걸 ‘예술’이란 이름으로, ‘사랑’이란 이름으로 아름답게 포장하고 있을 따름.

결코 이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작 그는 자기 모친 신사임당이 48세로 세상을 뜨기 전 아버지 ‘이원수’한테 유언을 남긴 걸 기억하고 있었다. 곁에서 똑똑히 보았을 터. 그의 모친은 남편더러 재혼을 하지 말 것을, 중국 여러 성현들의 예를 들어 유언으로 남겼다. 하지만, 데릴사위로 처가살이를 하며 그다지 궁하지 않은 삶을 살았던 그의 부친은 아내의 유언을 행하지 않았다. 아내인 신사임당이 숨을 거두기 전에 이미 주막집 여인을 첩실로(?) 들였다. 이에 13세 나이에 어머니를 여읜 이이는 아버지를 증오했으며, 3년간 시묘살이를 하고 속세를 떠나 금강산 어느 암자에 들어가고 만다. 그러했던 이이. 후일 그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본처를 두고 첩을 둘씩이나 들였고, 배다른 자녀를 여럿 두게 된다. 본인은 다시 살아나 나한테 자신은 떳떳하다고 강변할는지 몰라도, 이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하여간, 권력과 재력은 좋은 것인가 보다.

이이, 그도 당시 국민 수효로 보아, 한갓 구멍가게 경영 같은 조선시대 나랏일을 하면서, 골머리를 썩인다고 생각할 적마다 기방을 드나들었을 것은 사실. 어디 자기 돈으로 화대(花代)를 주었을까? 매번 ‘특수활동비’니 ‘업무추진비’니 하는 눈먼 나랏돈으로 화대를 치렀을 터.

사실 나는 몇몇 날 이이와 그의 모친 신사임당 일대기를 ‘다이제스트’로 공부하였다. 그러다가 이이의 여인이 하나 딱 걸려(?) 들었다. 미리 말하건대, 그가 어린 기생을, 같은 방 윗목에 눕혀놓고서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이러한 장문(長文)의 글을 적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다만, 세종대왕이 이이 자신이 태어나기 전 100여 년 전에 창제 반포한 ‘훈민정음’즉, 모국어로 적지 않은 게 아쉽기는 하지만... . 덧붙여, 모국어를 버젓이 두고서도, 만국공통어라고 하는 영어를 잘 부려쓰면 고관대작이 되어 떵떵대며 ‘특수활동비’나 ‘업무추진비’를 맘껏 쓸 수수 있는 현세태도 힐난하면서... . 실은,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버젓한 모국어를 두고, 영어를 익혀 300:1 공개채용 국영기업체에 합격했던 젊은 날을 회상할밖에. 탄식할밖에.

다시 그날 이이를 생각한다.

‘윗목에 식은 밥을 놓아두어도 잠이 아니 온다’고들 하였건만... . 더욱이 이미 여러 남정네들 손을 탄(?) 기생임에도... .

굳이, 내가 그때 그의 글을 윤색할 필요도 없겠다. 꽤 길지만, 그대로 옮기겠다.

 

<<이 글은 이이의 수제자인 사계(沙溪) 김장생이 쓴 것이다.

◆12세 소녀와 39세 대학자의 만남

 

이이(李珥)가 유지를 처음 만났을 때 유지의 나이는 열두 살 소녀였다. 이이의 나이는 39세였다. 건강이 좋지는 않았지만 정력이 왕성할 때이기도 했다. 도학자로서 심신 수양에 매진하던 장년기였다.

이이는 1574년 황해도 관찰사로 임명 받고 임지인 해주 관아에 도착했다. 이이가 황해도 관찰사가 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이이는 몸이 약해져 임금이 관직을 내려도 여러 차례 사양하기를 반복했다. 조정은 그래도 그의 학식과 품성을 높게 사서 중요한 관직을 제수하여 맡기고자 했다. 그래서 이이가 약해진 몸을 요양하려고 황해도 해주에 있는 처가나 황주에 있는 누님 집으로 자주 간다는 것을 알고, 관찰사를 하며 요양을 같이 하라는 뜻으로 황해도 관찰사에 임명했다. 이이가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이이가 해주 관아에서 여장을 풀고 저녁상을 받는데 어린 기생인 동기(童妓)가 따라 들어왔다. 그 동기는 이름이 유지이고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이이의 나이는 39세였으니 몇째 딸 정도의 나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이는 그래서 총명하고 예쁜 유지를 귀여워했으나 가까이 하지는 않았다. 술시중은 하게 하였으나 이야기를 나누기만 했을 뿐이었다.

유지(柳枝)는 이이에게 자신의 부친은 선비이고 모친은 양갓집 여인이었으며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 기적[妓籍]에 오르게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이이는 이런 유지를 따뜻하게 대하며 칭찬과 격려의 말과 함께 삶에 필요한 가르침들을 주곤 했다.

얼마 후 이이는 임기가 끝나 한양의 집으로 돌아갔지만 유지는 이이가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이의 각별한 사랑과 따뜻한 마음을 가슴 깊이 간직한 유지는 언젠가는 이이를 다시 모실 날이 오겠지 하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9년 후의 재회

세월이 흘러 9년이 지난 후 이이는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원접사(遠接使: 조선시대 중국 사신을 영접하기 위하여 둔 임시 관직)로 평양으로 가는 길에 해주 관아에 들러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그날 밤에 율곡의 침소로 유지가 찾아왔다. 그동안 유지는 몰라볼 정도로 성숙했고, 적당하게 핀 꽃처럼 아름다웠다. 연모의 마음을 간직하며 기다려온 유지는 이날 밤 이이를 모시려 했으나 이이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지는 더욱더 이이를 존경하며 연모하게 되었다. 또다시 기약 없이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해가 바뀌어 이이는 요양을 하러 황주 누님 집을 가는 길에 유지가 보고 싶어 해주에 들렀다. 유지를 다시 만나 같이 술을 나누며 회포를 푼 이이는 황주로 갔다가 돌아와 해주 근처 강마을에 머물고 있었다. 황해도 재령 부근에 있는, 강이 흐르는 밤고지(재령 고을에서 60리 북쪽에 있는 율관진을 말함)마을이었다. 이곳에 유지가 밤중에 찾아갔다. 이이가 병환으로 별세하기 3개월여 전인 1583년 9월28일 밤의 일이다.

당시 이이는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에 임명되자 상소를 올려 사양했으나 임금은 윤허하지 않았고, 다시 이조판서에 제수되자 소를 올려 사양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건강이 많이 좋지 않았던 이이는 황주의 누님 집에 요양하러 간 것이다.

그 곳에 유지가 한밤중에 이이를 찾아온 것이다. 유지는 이이를 보니 얼마 안 있으면 별세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이는 병들어 기력이 없는 상태였다. 이이는 이날 밤 유지와 밤새도록 진심을 나누는 각별한 시간을 가졌다. 이때 이이는 당시의 상황과 유지에 대한 마음을 담은 글과 시를 지어 유지에게 주었다.

이이가 유지에게 써준 글과 시다. 제목은 따로 없고 ‘유지사(柳枝詞)’라 불린다. 이 유지사는 현재 이화여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그 내용이다.

 

율곡이 유지에게 써준 글

◆유지사柳枝詞

 

"柳枝士人女也 落在黃岡妓籍 余按海西時 以丫鬟爲侍妓 纖細妖冶貌秀而心慧 余撫憐之 初非有情慾之感也 厥後 余以遠接使 往來關西 柳枝必在閤 而未嘗一日相眤 癸未秋 余自首陽 省女嬃于黃岡又□柳枝同杯觴者數日 還首陽時 追送余于蕭寺 旣別 余宿于栗串江村 入夜 有人扣扉 乃柳枝也 一笑入室 余怪問其由 則其言曰 公之名義 國人皆慕 況號爲房妓者乎 且見色無心 尤所嘆服 此別後會難期 故玆敢遠來耳 遂明燭夜話 噫 娼家只愛浪子之多情 孰知有義之可慕者乎 不以不見親爲恥 而反服焉 尤所難淂 惜乎 女士困于賤隸也 且過客疑余 有枕席之私 莫之顧眄 則國香尤可惜也 遂製詞以敍其實 發乎情止乎禮義之意 則觀者詳之

 

‘유지는 선비의 딸이다. 몰락해 황강(黃岡·현재의 황주) 관아의 기생으로 있었다. 1574년 내가 황해도 감사(관찰사)로 갔을 적에 동기(童妓)로 내 시중을 들었다. 섬세하고 용모가 빼어난 데다 총명해서 내가 쓰다듬고 어여삐 여기긴 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정욕의 뜻은 품지 않았다. 그 뒤에 내가 원접사가 되어 평안도로 오고 갈 적에 유지는 매양 마을에 있었지만, 하루도 서로 가까이 보지는 않았다.

계미년(1583년) 가을, 내가 해주에서 황주로 누님을 뵈러 갔을 때 유지를 데리고 여러 날 동안 술잔을 같이 들었다. 해주로 돌아올 적에는 절(蕭寺)까지 나를 따라와 전송해 주었다. 그러곤 이별한 뒤 내가 밤고지(栗串)라는 강마을에서 묵고 있는데, 밤중에 어떤 이가 문을 두드리기에 보니 유지였다. 방긋 웃고 방으로 들어오므로 나는 이상히 여겨 그 까닭을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대감의 명성이야 온 국민이 모두 다 흠모하는 바인데, 하물며 명색이 기생인 계집이 어떠하겠습니까. 게다가 여색을 보고도 무심하오니 더욱 탄복하는 바이옵니다. 이제 떠나면 다시 만나기를 기약하기 어렵기에 이렇게 감히 멀리까지 온 것이옵니다.”

그래서 마침내 불을 밝히고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아! 기생이란 다만 뜬 사내들의 다정이나 사랑하는 것이거늘, 누가 도의(道義)를 사모하는 자가 있는 줄을 알았으랴. 더욱이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도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하고 도리어 감복했다고 하니 더욱더 보기 어려운 일이로다.

안타까워라! 이런 여자로서 천한 몸이 되어 고달프게 살아가다니. 더구나 지나는 이들이 내가 혹시 잠자리를 같이 하지나 않았나 의심하며 저를 돌아보아 주지 않는다면 국중일색(國中一色)이 더욱 애석하겠구나. 그래서 노래로 읊고 사실을 적어 정에서 출발하여 예의에 그친 뜻을 알리는 것이다. 보는 이들은 자세히 알도록 하시라.’

若有人兮海之西 鍾淑氣兮禀仙姿 綽約兮意態 瑩婉兮色辭

金莖兮沆瀣 胡爲委乎路傍 春半兮花綻 不遷金屋兮哀此國香

昔相見兮未開 情脈脈兮相通 靑鳥去兮寒脩 遠計參差兮墜空

展轉兮愆期 解佩兮何時日 黃昏兮邂逅 宛平昔之容儀

曾日月兮幾何 悵綠葉兮成陰 矧余衰兮開閤 對六塵兮灰心

彼妹姿兮妧姩 秋波回兮眷眷 適駕言兮黃岡 路逶遲兮遐遠

駐余車兮蕭寺 秣余馬兮江湄 豈料粲者兮遠追 忽入夜兮扣扉

逈野兮月黑 虎嘯兮空林 我卽兮何意 懷舊日之德音

閉門兮傷仁 同寢兮害義 撤去兮屛障 異牀兮異被

恩未畢兮事乖 夜達曙兮明燭 天君兮不欺 赫臨兮幽室

失氷洋洋佳期 忍相從兮鑽穴 明發兮不寐 恨盈盈兮臨歧

天風兮海濤 歌一曲兮悽悲 繄本心兮皎潔 湛秋江之寒月

 

心兵起兮如雲 最受穢於見色 士之耽兮固非 女之耽兮尤感

宜收視兮澄源 復厥初兮淸明 倘三生兮不處 逝將遇爾於芙蓉之城

 

바다의 서쪽(황해도)에 사람이 있어 맑은 기운 모아 선녀의 모습을 내리었네.

얌전하고 아름답도다! 마음과 모습이. 밝고 곱도다! 얼굴과 말소리여.

가을 새벽 맑은 이슬 같은 것이, 어찌 길가에 버려졌나.

봄(남녀의 정)은 한창이고 꽃이 피었는데 부귀한 집으로 옭기지 못하니 애석하구나! 이 국향이여.

예전 서로 보았을 때 아직 안 피어 정만 맥맥히 서로 통했고, 좋은 때는 다가고 추위와 메마름만 남았다. 먼 앞날을 위한 계획 어긋나 허공에 떨어졌네.

이런저런 좋은 일 때 다 놓쳤으니 허리의 패옥을 풀 날은 언제이런가.

노년에 다시 해우를 했으나 완연한 옛 모습 그대로구나.

세월은 왜 이리도 빨리 흐르는가.

인생이 무성한 잎같이 푸르렀으나 어느 사이 늙어 여자의 문 앞에 서서 티끌 같은 정욕은 재가 되었네.

저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아 연모하는 사랑의 눈초리를 돌리는가.

 

 

 

수레를 타고 황강으로 감이 길은 굽이굽이 멀고 더디구나.

내가 소사에서 수레 머물고 강가에서 말을 먹일 때 어찌 헤아릴 수 있었으리오.

어여쁜 이 멀리 따라와 밤이 들자 홀연히 내 방문 두들길 줄을.

아득한 들에 달은 어둡고 빈숲에 범 우는 소리 들리는데 나를 뒤밟아 온 것은 무슨 의미인가 옛날의 덕음(좋은 평판, 명망)을 생각해서라네.

문을 닫는 것은 인정을 상하게 하고, 같이 자는 것은 의를 해하니 병풍은 걷어치워도 자리는 달리했고 이불도 달리했다.

은정을 다하지 못하니 일은 틀어져 밤부터 동이 뜰 때까지 초를 밝히고 보내는구나.

천군(사람의 마음)을 어찌 속이겠는가? 깊숙한 방이라도 내게 내려와 보시리니, 혼인할 좋은 기약 잃어버리고 서로 따라 욕정을 둘이 참았네.

동이 트도록 잠 자지 않고 임하는 곳이 다르니 가슴엔 한만 가득 하늘엔 바람 불고 바다엔 물결치고 노래 한 곡조 슬프기만 하구나.

아아! 본심 깨끗하고 맑아 가을 강에 괴인 달과 같구나.

마음에 구름과 같은 병기(선악) 일적에 색을 보는 것에서 그 중에도 더럽기는 색욕이거니 선비의 탐욕은 굳지 못하고 계집의 탐욕은 더욱 더하니 마땅히 시선을 거두어 근원을 분명히 밝히고 이에 처음의 맑고 밝음으로 돌아가야지.

 

만약 삼생(전생, 현생, 후생)이 있단 말이 헛말이 아니거든 장차 죽어 부용지성에서 너를 만나리.

 

■ 短篇三首

 

復申以短篇三首

天姿綽約一仙娥 十載相知意態多 不是吾兒腸木石 古緣病衰謝芬華

含悽遠送似情人 只爲相看面目親 更作尹邢說爾念 病夫心事已灰盡

每惜天香棄路傍 雲英何日遇裵航 瓊漿玉杵非吾事 臨別還遡贈短章

癸未九秋念八日 栗谷病夫 書于栗串江村

 

거듭 단편삼수로 대답한다.

 

하늘의 자태와 얌전함 하나의 선녀로구나. 십 년을 서로 알아 익숙한 모습

무릇 내가 목석같은 사내이기야 하겠나마는 병들고 쇠하여 분화를 사양함일세.

슬픔을 머금고 사정인을 멀리 보내나 다만 서로 간에 면목이 친했을 뿐

다시 나면 네 뜻대로 따라주련만 병든 이의 심사가 이미 다한 재와 같은걸

비록 길가에 버린 천향이 애석하지만 '운영'과 같이 '배항' 을 언제 만날까.

구슬 음료(미음), 옥절구[선계]는 내일이 아니어서 이별에 임해 돌아가며 단장을 써 준다.

계미년(1583) 가을 9월 28일 병부 율곡이 율곶 강촌에서 쓰다.“

 

이이가 병약하여 3개월 뒤 별세한 후, 유지는 이이의 친필 유지사를 첩(帖)으로 만들었으며. 이 유지사(柳枝詞)는 현재 이화여대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박세채(朴世采)의 남계견문록에 의하면, 율곡(栗谷)이 떠난 뒤에 유지(柳枝)는 서울로 달려 올라와 곡하고 또 그대로 삼년상을 입었다고 한다.

유지는 3년 상을 치른 후 머리를 깎고 산속으로 들어가 여생을 보냈다 한다.

 

▶『유지사柳枝詞』라고도 불리는 이 작품은 본래 언론인이자 경제학자였던 성재(誠齋) 이관구李寬求(1898-1991)가 소장하고 있었으나, 이 작품을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 기증하여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출처 : 영남일보, 모함문고 등 자료 참조

 

https://m.cafe.daum.net/seojinam/Xbup/193?q=%EC%9C%A8%EA%B3%A1%EA%B3%BC+%EC%9C%A0%EC%A7%80& 에서 복사해 옴>>

 

나의 ‘역사 비틀어보기’는 이어진다. 이이, 그는 위대한 학자였음은 인정한다. 하지만, 결코 여색을 밝히지 않았던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정실부인 두고서, 둘씩이나 되는 공식적(?) 첩실을 두었다는 사실.

‘열 계집 싫어하는 남정네가 없다’는 말이, 이이한테도 예외는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하더라도, 이이와 ‘유지’의 애틋한 사랑만은 결코 헐뜯을 생각이 없다. 나는 전적으로 ‘유지’의 편이다.

“신분상 몸은 어쩔 수 없이 이 놈 저 놈한테 다 내어주었지만, 나리를 진정으로 흠모하였나이다.”

지고지순한 ‘유지’의 사랑이여! 내가 너무 과격한지 모르겠으나, 차라리 오천 원 지폐의 위인 초상화는 이이가 아닌 ‘유지’로 바꾸었으면... . 마찬가지로, 천원짜리 지폐의 위인 초상화를 이참에 이퇴계가 아닌 ‘매향’으로 바꿔치기해도 좋을 듯. 그러면 후세 사람들이 지폐 초상화를 통해, 거슬러 그들 남정네들 고매한 사상을 관찰할 수도 있을 테니.

 

 

 

 

* 이 글은 본인의 블로그, 이슬아지 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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