묏버들 갈해 것거
묏버들 갈ㅎㅐ 것거
윤요셉(수필가/수필평론가)
깊어가는 이 가을밤, 고시조 ‘묏버들 갈해 것거’를 다시 가슴으로 읽고 있다. 육필(肉筆)로 썼으되, 고어(古語)로 내려쓰기 한 그 한글시조. 나는 사진판을 통해 다시 음미하는 중이다. 내가 원문대로 고어를 부려 써서 그대로 여기 옮긴다.
‘묏버들 갈해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ㄱ.ㅔ/자시는 창밧긔 심거두고 보소서/밤비에 새닙곳나거든 나린가도 너기소서(멧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임의 손에/주무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밤비에 새 잎 나거들랑/나인가 여기소서. 한역(漢譯)은 擇折楊柳寄千里 人爲試向庭前種 須知一夜生新葉임.)//’
조선일보가 2000. 11.14.자 스캔한 그 원본 시조 최좌하단(最左下端)에는 ‘홍낭.’ 이라고 참말로 예쁘게도 적혀 있다. 글씨는 왜 그리도 반듯하고 예쁜지!
때는 1573년(선조6년). 함경도 경성(鏡城) 관기(官妓)였던 홍랑(洪娘, ?~?)은, 그곳 병영에 파견근무를 간 행정관 최경창(崔慶昌,1539~1583)한테 폭 빠지게 된다. 당시 최경창은 송시풍(宋詩風)의 시조가 주류를 이뤘던 시기에 당시풍(唐詩風)을 열어, 삼당시인(三唐詩人)의 칭호를 얻었을 만치 문단(文壇)에서 대접받는 이였다고 한다. 게다가, 어릴 적부터 피리를 그리도 잘 불었다고 한다. 당시 열 예닐곱 살로 추정되는 홍랑은, 그곳에 부임해온 나이 34세의 최경창 시인한테 금세 홀딱 반하게 된다. 그녀는 시와 음률을 늘 가까이하고 있었고, 미모와 영특함을 두루 갖추었던 기녀로 알려져 있다. 그러한 홍랑은 평소에도 최경창의 시(詩)를 좋아해서 무심결에, 그의 곁에서 그의 시를 읊었는데, 바로 그때 “그 시를 내가 지었소. 내가 바로 최경창이오.”했다는 거 아닌가. 그러했으니, “선생님, 사인 한 장 해주세요.”하지 않았겠는가. 최경창이 시와 퉁소의 고수였지만, 홍랑 역시 그에 못지않게 시 감각이 특출하고 거문고 연주가 최고 수준이었다고 전한다. 둘은 불꽃 튀는 사랑을 하게 된다. 급기야 홍랑은 최경창의 군막(軍幕)에 가서 동거를 하기까지 하였다. 그러했건만, 최경창은 파견근무를 끝내고 아내가 두 눈 말똥말똥 살아있는 서울로 귀임(歸任)을 할밖에.
위 홍랑의 한글시조는 비 오는 봄날 저녁 무렵, 함관령(함흥과 홍원 사이)에서 사랑하는 이를 배웅하며 이별의 아픔을 노래한 것이다. 한편, 홍랑과 생이별하고 서울로 귀임한 최경창은 그만 몸져눕고 만다. 그 소식을 접한 홍랑은 7일간을 걸어 서울의 최경창을 찾아가 간호하게 된다. 그러자 최경창은 몸이 많이 좋아졌다. 당시에는 ‘양계의 금(兩界의 禁)’이란 나라법이 있어, 함경도와 평안도 사람들은 도성 출입을 금함에도 불구하고, 홍랑 사랑의 의지(?)를 제압하지는 못했다. 그러한 재회 후 최경창은 홍랑으로부터 받은 위 한글시조를 한시조로 만들어 되돌려주는 한편, 두 수(首)의 화답시까지 건네주게 된다. ‘又(우)’와 ‘送別(송별)’이 그것들이다.
‘又’
相看脈脈贈幽蘭/ 此去天涯畿日還/莫唱咸關舊時曲/至今雲雨暗靑山(말없이 마주보며 유란(幽蘭)을 주노라/오늘 하늘 끝으로 떠나고 나면 언제 돌아오랴/함관령의 옛노래를 부르지 마라/지금도 비구름에 청산이 어둡나니))//
‘送別(송별)’
玉頰雙啼出鳳城/ 曉鶯千囀爲離情/羅衫寶馬河關外/羅衫寶馬河關外/草色迢迢送獨行(고운 두 뺨에 눈물 흘리며 서울 성안을 나서네/새벽 꾀꼬리가 이별이 서러워 그리 우는가/ 비단옷에 말 타고 강 건너 떠나갈 제/ 아득한 풀빛만이 혼자 전송하리)//
그 이후 둘 사이에 기막힌 일이 더 생겨난다. 때마침 명종 왕비인 인순왕후의 국상(國喪)을 맞게 되었는데, 공무원이 그것도 아내까지 둔 공무원이 그처럼 애정행각을 벌이고 여진족 세작 등이 도성으로 잡입할세라 정했을 듯한 그 임시조치법 ‘양계의 금’까지 어겼으니! 최경창은 파직되고 만다. 얼마 아니 있어 한직(閒職)에 재임용되기는 하였지만, 새 부임지로 가던 중 45세 나이에 객사(客死)를 하고 만다. 그러자 홍랑은 최경창의 묘역에 움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게 된다. 시묘살이를 하는 동안 뭇남정네들이 집적댈세라, 고운 얼굴에 손수 칼로 상처를 내고 검댕이로 화장을 하는 등 못생긴 여자 노릇을 하였다는 거 아닌가. 영원히 연인과 함께 하기를 바랐던 홍랑. 그녀는 최경창의 후손들한테 유언을 남겼다는데, 그것이 “나를 나를 사랑하는 내 님 앞에 묻어주오.”였다니!
최경창 후손들은 홍랑을 ‘가인(佳人)’으로 기려, 그들 선산(先山)인 ‘파주시 교하면 다율리’라는 곳에 정실부부의 묘 앞에다 묘를 썼으며,사진으로 본 그 묘와 묘비가 꽤나 잘 보존되는 듯싶었다.
사실 홍랑과 최경창의 사랑과, 그들 양인(兩人)의 연시(戀詩)에 관한 평가는 아주 대단하다. 홍랑의 그 한글시조는 중학교시절이던가, 고등학교시절이던가, 국어교과서에까지 올라있었던 관계로, 나는 현재까지도 대충은 외우고 있을 정도이니... .
이 밤, 수필작가인 나는 홍랑의 열정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그녀는 그 누구 못지않게 문학적 소양을 지니고 있었으며, 예술작품의 참가치를 제대로 볼 줄 알았던 여인이었음을. 그녀는 임진왜란을 겪자, 연인이며 당대의 최고급 시인인 최경창의 시고(詩稿)가 훼손되거나 망실될세라, 정리하고 보관하는 데에 전혀소홀함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고서는 그 시고를 최경창의 후손들한테 오롯이 건네줌으로써, 수백 년이 지난 현대까지 원본대로 생생히 전해져 내려왔다는 사실. 해서, 나는 이미 이 글 앞부분에서도 밝혔듯, ‘조선일보가 2000. 11.14.자 스캔한 그 원본 시조’를 감동적으로 볼 수 있었다.
대체로, 예술가들의 사랑은 꽤나 지독한(?) 구석이 있다. 단지 그 사랑이 육욕적(肉慾的)인 거라면 그리 될 수 없는 그 무엇이 종종 있어 왔다. 소년기부터 장차 시인이, 수필가가 되기를 바랐던 나. 난들 여느 예술가들한테서도 항용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듯, 수많은 연애편지를 왜 아니 써왔겠는가. 그리고 그 대상자들인들 적었겠는가. 돌이켜보건대, 총 편지통수를 따지면, 이 날 이 때까지 쓴 연애편지가 1,2톤은 족히 될 테고, 그 대상자를 따지면, 스무 명쯤은 될 터. 그 대상자 가운데에는 나보다 세살 위인 지금의 내 아내도 있긴 하다. 나는 그때그때마다 나의 일방적인 연애편지 수신인들한테 이러한 말을 적곤 했다.
“먼 뒷날 제가 빼어난 작가가 되거든, 그때 가서 제 편지를 세상에 다 공개해도 좋겠어요. 그때쯤이면 지금껏 띄운 제 편지 제법 값나갈 걸요?”
정말로 그러했던 나. 하여간, 나는 그 많은 여성들한테 차례차례 입버릇처럼 약속한 대로 30대 초반에 수필작가로 정식 데뷔를 하였으며, 그 이후 여느 수필작가들 못지않은 작품을 현재까지 빚어오고 있다. 물론, 그 동안 ‘영원한 문학적 동반자’이길 약속했던, 우리 나름대로 불꽃 튀는 사이도 있었다. 그러나 사별(死別) 등 몇 몇 사유로 그 약속을 끝끝내 지키지 못한 사례도 있고. 자연히 나한테서 날아갔던 그 많은 연서(戀書)가 이 지구상에 온전히 남아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 거라는 사실. 잘은 모르겠으나, 지금의 아내는 메리야스통 등에도 꼭꼭 숨겨놓았을 것도 같은데... . 그러다가 최근에 나는 나보다 다섯 살 위인 64세의 어느 할머니로부터 알쏭달쏭한 말을 듣게 되었다. 그분은 나의 개인 블로그 ‘이슬아지’의 방명록에다 이러한 글을 남겨두었음을 알게 되었다.
‘윤 작가님, 십여 년 동안 줄기차게 나한테 보내왔던 편지와 습작들을 수시로 꺼내 읽는 요 재미를 아마 모르실 걸요? 절대 안 돌려줄 거구만요. 약 오르지롱?’
내가 여태껏 입술 한번 훔쳐본 적도 없는, 당시 30대 후반이었던 여인. 그분만은 나의 연서를 여태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는 뜻 아닌가. 도로 건네받지는 못할지라도, 그 편지들을 빌려서라도 한번 읽어보고 싶은데... . 문학소녀였으며, 한때 작가지망생이기도 했던 그분. 게을러터진(?) 데다가 체력조차 따르지 않아 차일피일 작가수업을 미루다가 청춘을 다 흘려보낸 말라깽이 할머니. 그러나 그분이야말로 최경창의 홍랑 쯤은 되지 않을까 잠시 오판을(?) 해본다. 굳이 나의 기록물 내지 육필을 원본대로 간직하고 있지는 않더라도, 둘러보면 대한민국 여성들 가운데에는 나의 연서 몇 구절을 가슴에 희미하게 간직하고 있는 여성들이 몇은 될 듯하다. 그분들한테도 감사의 뜻을 전한다. 어쨌든, 나를 수필작가로 만드는 데 도움을 주었으니까!
나는 한평생 소년으로 살 테고, 죽는 그날까지 연서를 쓸 것이다. 그 연서라는 게, 변형된 연서 곧 수필이다. ‘묏버 들 갈해 것거’ 이 지구상에 오직 하나뿐인 임에게 부치는 기분으로 연서를 쓸 테다. 나야말로 지은이를‘홍랑’이 아닌 ‘홍낭.’식으로 독특하게, 그리고 또록또록하게 표기하는 사람이길 바란다.
* 이 글은 본인의 블로그, 이슬아지 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한국디지털도서관 본인의 서재,
한국디지털도서관 윤근택 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본인의 카페, 이슬아지 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