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수련(73)
문장수련(73)
윤요셉(수필가/문장치료사)
이번 호에는 재미교포이자, 수필작가이자, 칠순의 연세인 분의 글을 텍스트로 삼는다.
우선, 그분 글을 함께 읽어보기로 하자.
노오란 밥
이 00
①고국 방문 길에 내 ②고향, 양양에 있는 할머니 산소에 ③들렸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아늑한 산자락에 자리 잡은 산소는 잘 정돈되어 있었다. 겨울잠에서 깨어나 싹트기 시작하는 파릇파릇한 잔디 ④뒤쪽에, 보송보송한 할미꽃 한 송이가, 온화하시던 할머니의 미소로 나를 반겨준다.
할머니는 장손이던 나를 끔찍이도 ⑤챙겨주셨다. 아버지는 3대 독자로 일본군 징용으로 끌려가다가 압록강을 넘기 전에,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려 간신히 살아 ⑥돌아오셨다고 한다. 죽다 살아온 아버지의 삶과 전쟁의 험난함을 경험하신 ⑦때문인지, ⑧동생들보다 나에 대한 사랑이 남다르다 싶었다.
내가 중학생일 때, 초등학생인 여동생 둘과 함께, 할머니가 우리를 돌보아 ⑨주셨다. 할머니가 차려주시는 밥상에는 별다른 반찬이 없어서, 참기름 조금 넣고 간장으로 밥 비벼 먹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내 밥을 비비면 노오란 색으로 변하는데, 동생들은 아무리 비벼도 간장 색 그대로이었다. ⑩“할머니, 왜 오빠 밥은 노오란 색이 되는데, 우리 밥은 안 되는 거지?” 둘째가 물었다. ⑪“그건, 간장을 아직 덜 섞은 가 보지….” 하며 머뭇거리시다가, 앞치마 자락을 눈에 대고 말없이 부엌으로 나가셨다. 동생들은 짜서 못 먹게 될 때까지 간장을 넣고 비볐지만, 노오란 색은 나타나지 않았다. 내 밥 속에는 할머니가 넣어주신 달걀 하나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반 백 년이 흘렀다.
그동안 달걀 하나의 사랑이 얼마나 큰 등짐이 되어 나에게 ⑫돌아왔는지 그들은 모른다. ⑬지금도, 그 달걀 하나의 무게 때문에 동생들에게 못다 한 짐이 여전히 마음 한구석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으니….
⑭“할머니, 이제는 우리 모두 노오란 밥 먹을 수 있어요. 사랑해요!” 동그란 묘소 옆에 등을 기대며 할미꽃을 쓰다듬어 본다.
가. 문장치료사인 윤쌤의 총평)
1. 수필작품이 길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반대로, 아주 짧은 글임에도 독자들로 하여금 심금(心琴)을 울려주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러한 점에서 위의 글은 일단 성공한 듯하다. 조모의 장손(長孫)에 대한 특별한 배려가,
계란을 동기(同氣)들 몰래 밥그릇에 넣어준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것은 후일, 아주 먼 뒷날, 할머니 당신의 제사상 제주(祭主)가 될 장손에 대한 기대감이 녹아 있었던 것이다. 하여, 글쓴이는 고국 방문 때에 조모의 묘소에 참배하여 제주(祭酒)를 따르며 그날을 회상하게 되고, 눈시울을 적시게 된다.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인‘장자(長子)와 장손 선호’는 예나 지금이나 어쩔 수 없는 일.
2. 아무튼, 좋은 글을 만나게 되어 기쁘다.
3. 쉼표 사용을 적절히 함으로써 문장의 호흡과 리듬을 살리고 있다는 점 두드러진다.
나. 눈가는 부분 몇 군데
0 단락마다 첫 글자를 한 자씩 들여쓰기 권고①고국☞ 한 자 넉넉하게 들여쓰기
0 ‘동격(同格)의 쉼표(우리 쉼표 규정 15개에는 ‘동격의 쉼표’라는 용어는 사실 없지만... .)’를 아주 정확하게 쓴 곳
②고향, 양양에
* 이때 쓰인 쉼표의 뜻은, ‘즉’ 또는 ‘곧’에 해당한다.
‘고향 즉 양양에’ 혹은 ‘고향 곧 양양에’로 풀이할 수 있다.
0 흔히 오기(誤記)하는 어휘인 ‘들르다’에 관해
* 들르다 : 오래 머무르지 않고 잠시 머무는 걸 일컫는다. 영어 ‘drop-in’에 해당한다.
‘들르다’의 활용형은 ‘들르니’, ‘들러 ’, ‘들렀더니’ 등이다. 즉,‘들르다’는 ‘불규칙동사’가 아닌 ‘규칙동사’라는 말이다.
③들렸다.☞들렀다.
0 문장의 리듬을 살리기 위해 제대로 사용한 쉼표
* 작가는 글을 적은 후 소리 내어 자신의 글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그러했을 적에 출렁출렁 물결이 일 듯하면, 성공한 문장이다.
④뒤쪽에, 보송보송한 할미꽃 한 송이가, 온화하시던 할머니의 미소로 나를 반겨준다.
* 위 문장은 리듬을 타고 있다.
0 존칭에 관해 재당부 : 가령, 청와대 대변인이 대통령의 연설 따위에 관해서 브리핑할 적에는 “대통령님께서 ~~한 말씀을 하셨다.”라고 한다. 그러나 신문이나 잡지에서는 “대통령이 ~~한 말을 했다.”하고 적는다는 사실. 할머니가 글쓴이한테는 더 없이 귀중한 분이지만, 일반 독자들한테는... . 그러니 앞으로는 “할머니가 ~~한 말을 했다.”식으로 평어체(評語体)를 써 버릇 하면 좋겠다.
그리고 가령, 좌중(座中)에 이 부장과 김 과장과 박 대리가 있고, 이 부장한테 김 과장과 박 대리를 지칭할 적에 어떻게 해야 옳을까?
“이 부장님, 김 과장과 박 대리한테는 이미 말했는데요, 오늘 제가 저녁 식사 한 턱 쏘려 하는데, 시간 있으세요?”
즉, 모든 영광은(?) 최고 연장자나 최상위자한테 돌아가야 한다는 거.
이 논리의 연장선에서, 시어른들 앞에서 자기 남편을 일컫는 정확한 말은,
“아버님, 걔(얘)가 오늘 제 뺨을 때렸어요. 혼내주세요.”일 테지. 제법 그럴싸하지 않은가. 사실 나의 논리가 맞지만... .
⑤챙겨주셨다.☞ 챙겨주었다.
⑥돌아오셨다고 한다.☞돌아왔다고 한다.
0 쉼표 정확히 쓴 곳
⑦때문인지, : 쉬어야 할 곳에서는 마땅히 쉬어야 하는데, 이를 잘 실천하고 있다.
0 ‘비논리적 진술’에 관해 : 문장 내에서나 단락 내에서 비논리적 요소가 들어 가 있으면 곤란하다. 서로 연관성 없는, 억지 논리는 곤란하다는 뜻임.
⑧동생들보다 나에 대한 사랑이 남다르다 싶었다.
* 글쓴이의 부친이 3대 독자였다고 위에서 이미 진술하였지만, 그 사실과 장손인 글쓴이에 대한 조모의 끔직한 사랑은 별개다. 글쓴이한테는 남자 동생들이 있어, 조모 입장에서는 대(代)가 끊길 위험성 때문에 애지중지 한 것은 아닐 테니... . 보다는, 이 윤쌤이 총평에 적었듯, ‘장자와 장손 선호’에서 비롯된 듯하다고 상상해보는 것으로 논리를 전개했으면 한다.
0 직접화법의 독립단락 짓기에 관해 : 나의 경험상, 남의 입을 빌려 직접화법의 문장이 들어간 글을 적게 되면, 원고지 1~2매를 줄일 수 있다. 게다가, 현학적(衒學的) 냄새를 풍기지 않으려고 그 분야의 대가(大家) 등의 입을 빌려 직접화법으로 문장을 삽입해도 효과를 거둔다는 걸 경험했다.
자, 그런데 어떻게 하면 깔끔해질까?
⑩“할머니, 왜 오빠 밥은 노오란 색이 되는데, 우리 밥은 안 되는 거지?” 둘째가 물었다. ⑪“그건, 간장을 아직 덜 섞은 가 보지….” 하며 머뭇거리시다가, 앞치마 자락을 눈에 대고 말없이 부엌으로 나가셨다.
☞둘째가 할머니한테 느닷없이 물었다.
“할머니, 왜 오빠 밥은 노오란 색이 되는데, 우리 밥은 안 되는 거지?”
그러자, 할머니가 얼버무렸다.
“그건, 그건 말이다. 너희들은 간장을 아직 덜 섞었는가 보지?”
할머니는 뭔가 크게 들킨 듯 앞치마 자락을 눈에 대고 말없이 부엌으로 나갔다.
* 물론, 글쓴이의 글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실감나도록 하자면, 위와 같이 화자(話者)를 직접화법에 앞세우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⑭“할머니, 이제는 우리 모두 노오란 밥 먹을 수 있어요. 사랑해요!” 동그란 묘소 옆에 등을 기대며 할미꽃을 쓰다듬어 본다.
☞‘동그란 묘소 옆에 등을 기대며 할미꽃을 쓰다듬어 본다.’를 독립단락으로 지었으면 한다.
0 ‘시간의 경과’를 아주 잘 나타내는 독립단락
㉠반 백 년이 흘렀다.
* 참으로 잘 된 독립단락이다. 독자들로 하여금 글쓴이와 마찬가지로 긴 시간의 경과를 간접체험케 한다.
참고적으로, 윤오영의 ‘달밤’에 쓰인 ‘이윽고’도 독립단락으로 되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 윤쌤의 수필 ‘유품’에도 ‘이윽고’가 쓰였는데, 그 어휘로 하여 원고지 2~3매를 줄인 효과가 있었다는 사실.
다. 끝으로, 건필(健筆)을 바라마지 않는다.
(다음호 계속)
* 이 글은 본인의 블로그, 이슬아지 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한국디지털도서관 본인의 서재,
한국디지털도서관 윤근택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본인의 카페, 이슬아지 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