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새와 허수아비
참새와 허수아비
윤근택(수필가)
최근 들어 스스로 가슴에다 불을 지르고, 쩔쩔매는 일을 저질렀다. 그것도 환갑 나이에 무슨 열정이 여태 남아서? 참말로, 그것은 최유나 가수의 ‘흔적’의 노랫말에 나오는 그대로였다.
‘이제는 가도 되는 건가요 어두워진 거리로/
오늘만은 왠지 당신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아요/ 어차피 내가 만든 과거 속에서 살아가야 하지만/
절반의 책임마저 당신은 모르겠지요/’
끙끙 앓다가, 오늘은 문득 ‘참새와 허수아비’를 떠올렸다. 82년 MBC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차지한 곡. 당시 ‘조정희’라는 여대생이 불렀던 노래다. 거듭듣기를 해보니, 노랫말이 너무 가슴을 울린다. 호기심 많은 이 수필작가가 그냥 지나칠 리 없다. 그 노랫말을 적은 이가 누구인지 알아봤더니... .
‘위키백과’는 그 음악인을 이렇게 전한다.
< 임지훈(任知勳, 1959년 6월 21일 ~ )은 대한민국의 통기타 포크팝 가수, 작사가, 작곡가, 편곡가, 방송인이다.>
그는 나보다 2년 늦게 이 세상에 왔다. 역산해본즉, 그는 빨라도 25의 나이였던 1982년에 그 작품을 적은 셈이다. 그 노랫말은 숫제 시(詩)다. 시라도 아주 잘 쓰인 시다. 내가 그를 더 추적해 들어가자, 한양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걸로 나타났다.
‘그러면 그렇지!’
이제 나는 내 신실한 애독자들께 그의 ‘참새와 허수아비’를 여기 소개하니, 함께 음미해보자.
<나는 나는 외로운
지푸라기 허수아비
너는 너는 슬픔도
모르는 노란 참새
들판에 곡식이 익을 때면
날 찾아 날아온 널
보내야만 해야 할
슬픈 나의 운명
훠이훠이 가거라
산 너머 멀리멀리
보내는 나의 심정
내님은 아시겠지
석양에 노을이 물들고
들판에 곡식이 익을 때면
노오란 참새는
날 찾아와 주겠지
훠이훠이 가거라
산 너머 멀리멀리
보내는 나의 심정
내님은 아시겠지
내님은 아시겠지>
노랫말대로‘참새’와 ‘허수아비’의 관계는 숙명적인 관계다. 허수아비는 참새를 쫓기 위해 존재하지만... .
문득, 국문학도였던 임지훈은 학창시절 익힌 고려속요 ‘가시리’와 그 맥을 이어받은 김소월의 ‘진달래꽃’, 또다시 그 맥을 이어받은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떠올리지는 않았을까 하고서... 참말로, 그 세 작품에서 모티브를 낚아채지는 않았을까? 우리가 통상 앞의 그 두 작품을 논할 때에, ‘애이불비(哀而不悲)’라는 낱말 하나로 요약하곤 한다. 나는 거기다가 ‘님의 침묵’도 애이불비라고 말하고자 한다. 애이불비란, ‘슬프되 슬프지 않은 척’을 뜻한다. 이 애이불비를 다시 거슬러 올라가면, 우륵의 말, ‘낙이불류애이불비(樂而不流哀而不悲)’에 닿는다. 풀이하면, ‘음악은 즐거워도 지나치게 흥청거리지 않고, 슬퍼도 비통할 정도여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우륵이 가야금 12곡을 만들고, 이를 계고·만덕·법지 세 제자에게 전수했다. 그러나 이 음악이 번차음하다 하여 향토적 색채를 덜어내 12곡을 5곡으로 줄여 아정한 음악으로 개작했다. 우륵은 처음에 이 소식을 듣고 화를 냈으나, 그 곡을 다 듣고 눈물을 흘리며 감탄하여, “즐거우면서도 지나치지 않으며 애처로우면서도 슬프지 아니하니 다른 음악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이 ‘樂而不流哀而不悲’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면, 공자의 말씀, ‘關雎(관저; 꾸욱꾸욱 하고 우는 물수리새를 뜻함. 중국의 고전적 연애시 제목이기도 함.) 樂而不淫(낙이불음) 哀而不傷(애이불상)’에 기원을 두고 있다.
하여간, 임지훈은 고려속요 ‘가시리’에서 김소월의 ‘진달래꽃’으로, 다시 한용운의 ‘님의 침묵’으로 맥을 이어온 ‘애이불비’를 마치 ‘바통터치’하듯 하여 ‘참새와 허수아비’를 유감없이 적었다고 볼 수 있다. 해서, 우리네 정서에 딱 맞아떨어지는, 불멸의 시, 불멸의 노래가 되었다고 이 수필작가는 감히 말한다.
나는 조정희 가수가, 꽤나 시간이 지난 이후 성숙한 여인이 되어, 다시 KBS무대에 나타나 부른 ‘참새와 허수아비’를 온 가슴으로 다시 듣고 있다. 거듭듣기하여 작품 속으로 빨려든다.
나는 관리소홀로, 사랑하는 이들을 잘도 떠나보내곤 하였다. 그걸 관리소홀이라고 말했으나, 우리 쪽 사투리로 ‘떠군질러’보내곤 했다. 즉, 충동질하거나 부추겨 떠나보낸 사례가 많다. 꼭히 ‘가시리’, ‘진달래꽃’, ‘님의 침묵’, ‘참새와 허수아비’에 그 맥을 둔 정서는 아니었던 거 같다. 오히려 내 선친(先親)의 살아생전 말씀에 기원을 둔 건 아닐까 하고서. 내 선친은 고약한 분이었다. 당신은 당신의 자녀들이 속을 썩이거나 맘에 아니 들면 곧잘 말하곤 하였다.
“이 눔의 새끼, 보따리 싸서 어여(어서) 집 나가거라. ”
하지만, 당신의 뜻을 딱 한 번 멋지게, 아주 멋지게 따라 가출(家出)을 했다. 오랜 구박(?) 끝에 기어이 일자리를 구했으되, 아주 멋지게 300:1 경쟁을 뚫고 짱짱하게 나가던 공기업 합격통지서를 쥐던 날이었다.
“영감님, 안녕히 계시소. 저는 이제 아주 떠나렵니다. ”
골목을 나서던 나는 빈털털이였으나, 그렇게 통쾌할 수가 없었다.
물론 후일 부자간에는 그렇게 친해질 수가 없었다. 당신한테 나는 세상 둘도 없는 아들이 되었으니까.
조정희의 노래, 아니 임지훈의 시가 아직도 흐르고 있다. 다시 말해도 그것은 애이불비다. 그런데 문득, 내가 물 같은 존재라는 걸 돈오(頓悟)하게 될 줄이야! 이미 어느 수필작품에서도 적은 바 있지만, 물은 참으로 신기하다.
‘물은 물 따라 흐르기를 좋아하고, 물은 물을 만나게 되면 헤어지기를 잘도 하는 존재다.’
물분자의 특성이 그러하다. 물이 분자끼리 결합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서로 떨어지기를 원한다. 그 성질은 분수(噴水)나 ‘낙수’에 두드러진다. 한편, 물분자는 따로따로 있을 적에는 서로 결합하여 하나 되기를 원한다. 개울에 흘러가는 물 형태가 좋은 예다. 앞서가는 물분자를 따라잡기 위해 쫓아가다가 보니 면면한 물흐름이 된다. 호스 속 흐르는 물도, 외로운 물분자간의 결합의지에서 비롯된다. 따지고 보면, 모세관현상도 물 분자간의 결합의지에서 비롯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 나의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보면, 내 선친이 곧잘 던지던 그 말버릇으로 인한 상처로 인하여 누군가와 정들성싶으면 지레 쫓고자 하는 습성을 갖게 된 듯하다. 자칫, 상처 입기 싫어서. 한편, 물분자가 지닌 성질과도 같다는 것을. 해서, 두 눈에서 눈물이 그처럼 잘도 ‘뚝뚝’ 떨어지는가 보다. 눈물도 물인 탓에, 하나였던 물이 물분자로 낱낱이 뚝뚝 떨어지나 보다.
* 이 글은 본인의 블로그, 이슬아지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한국디지털도서관 본인의 서재, 한국디지털도서관 윤근택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본인의 카페 이슬아지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