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뉴월 겻불도

 

 

                 

                      오뉴월 겻불도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우리 속담에, ‘오뉴월 겻불도 쬐다가 아니 쬐면 섭섭해진다.’도 있다. 여기서 말하는 ‘겻불’은 ‘왕겨로 태우는 불’을 일컫는다. 사실 오뉴월이면 그리 춥지도 않으나, 막상 쬐던 불도 아니 쬐면 섭섭해진다는 뜻인데... .

오늘 나는 이 아파트 관리소장이 내민‘계약만료 통보서’ 내지 ‘해고 통지서’ 에 이쁘게시리 서명을 하되, 물 위를 유영(遊泳)하는 오리 한 마리로 그려주었다. 12월 31일자 이 아파트 전기주임 1년 계약이 만료된다는 내용. 사실 나의 서명은 물 위에 뜬 오리 또는 페리카나를 연상케 한다. 내 이름 ‘근택’을 날려 쓰고, 그 ‘근’의 초성‘ㄱ’안에다 까만 점을 찍어 즉, 화룡점정(畵龍點睛)하여 살아있는 새[鳥]의 눈[目]으로 완성시켰다. 일찍이 어느 국영기업체에서 사무직 과장을 지내는 동안 부하들의 기안문서에 결재를 하면서 퍽이나 자주 그려주었던 새. 그 새를 사인펜으로 그려주면 그리도 좋아하던 부하직원들.

11개월째 이곳에서 격일제로 근무하는 동안, 에피소드도 더러 있었다. 대부분의 세대주들은 친절했고, 나는 즐겁게 세대의 민원을 처리해주었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나더러 인사성 밝은 직원이라고 칭찬해 주었다. 아울러, 나는 이틀에 한 편 정도씩 수필작품을 빚었고, 그 작품들은 종이책 두 권 분량도 넘으니 얻은 게 잃은 것보다는 많다. 다만, 아쉬운 게 있다면, 내 신실한 애독자들께서는 이미 내가 적어 인터넷 매체에 발표한‘WD-40’와 ‘Net-work’란 작품을 읽어서 아실 테지만, 한 둘 ‘골통분자’ 내지 ‘악질 세대주’가, 없는 말 있는 말 다 동원해서 나를 모함했다는 거. 그것이 빌미가 되어, 재계약이 아니 되고 1년으로 마감하게 되었다는 약간의 피해의식. 해서, 지금 내 기분은 ‘오뉴월 겻불도 ... .’인 것만은 분명하다.

지난 여름, 내 자존심이 무참하게 깨어진 날이 있었다. 해서, 심히 회의(懷疑)를 가진 적이 있다.

‘과연, 내가 일만 하다가 죽을 건가? 농사에다 글짓기에다 아파트 전기주임에다... . 그러니 ‘다믄’한 해라도 쉬어야할까 보다.’

막상 그렇게 마음먹고 보니, ‘돈맛’이 남아, 이변(異變)이 없으면, 이곳에서 한, 두 해 더 눌러앉을까도 생각해왔다. 그런데 하여간 결딴나고 말았다. 본디 인간은 간사하고 자기합리화도 잘 하는 편이다. ‘울고싶을 때에 뺨을 때려준 그 사악한 입주민’.‘고소원불감청(固所願不敢請)’이란 말이 있지 않더냐. 그가 나를 헐뜯어줌으로써 내 진로가 결정났으니, 일단 고맙게 여겨야 할 일. 내가 60여 년 살아오는 동안 전화위복(轉禍爲福)을 수 없이 체험했으며, 그때마다 나는 마음 가다듬곤 하였던 게 사실이다.

‘당신은 나더러 엿 먹으라고 했지만, 나는 그것이 꿀임을 알겠다.’

앞으로 더 좋은 일이 나한테 생겨나리라는 기대. 일찍이 우리네 조상들은 아주 훌륭한 가르침을 주었다. ‘넘어진 김에 쉬어 간다.’, ‘떡 본 김에 제사지낸다.’등이 그 가르침들이다. 그런가 하면, 중국 전한 초기의 사상가인 ‘가의(賈誼, 기원전 201년 ~ 기원전 168년)’는, <過秦論>에서 ‘인리승편(因利乘便)’이라고 했다. ‘유리한 형세를 타다’를 뜻한다. 또 유사한 말로는 ‘인인성사 (因人成事)’도 있다. ‘무슨 일이 자기 혼자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남과 관계에서 남에게 힘입어 이루어짐.’을 뜻한다. 내가 위에서 소개한 두 작품,‘WD-40’와 ‘Net-work’ 내용에는 세상 많은 이들로부터 지탄받아야 할 ‘슈퍼갑질’을 행한 아파트 입주민 이야기가 들어 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들이야말로 훗날 오늘을 회상해 보아, 나한테 ‘인인성사 (因人成事)’케 한 은인(恩人)일 수도 있다는 것을. 적어도, 그들은 나한테 또 새로운 변화를, 새로운 길을 모색케 하였으니까.

오뉴월 겻불도 쬐다가 아니 쬐면 섭섭해지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잠시 뿐이다. 내키면, 정부로부터 5개월여 실직급여를 탄 후 또 적당한 조건으로 아파트 경비원으로 재취업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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