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 없이 글짓기하기
쉼 없이 글짓기하기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올해 들어서는 가속도를(?) 더해, 거의 이틀마다 한 편 정도씩 수필작품을 적어 왔고, 30여 년 작품활동을 해오면서 적은 글들이 총 2,000여 편에 달하는지, 그 수효도 이젠 분간 못하는 나. 더군다나, 본인이 적은 수필작품의 이름들도 다 기억해내지 못하는 나. 이러한 천하의 윤근택 수필가도 글감이 달려 심심할 적이 있다. 이러한 때에는 쥐목[쥐目] 즉 ‘설치류(齧齒類)들’의 습성을 본받고자 한다. 그 짐승들은 아래 위 각각 한 쌍의 앞니를 지닌 게 특징이다. 그 앞니는 한 평생 자라나는 관계로, 잠시도 쉬지 않고 딱딱한 물건을 쏠아 앞니를 갈아야[硏磨]만 한다. 그것이 생존전략이다. 하여간, 설치류는 ‘연마(鍊磨)의 대가(大家)들’이다.
어디 설치류만 그처럼 바지런을 떠는가. 살아생전 빈농(貧農)이었던 내 아버지는,‘부지런함’을 실천적으로 당신 슬하의 열 자녀들한테 보여주었다.
당신은 종종 일렀다.
“야들아, 큰 부자는 하늘이 내려주고, 작은 부자는 부지런함이 갖다다 준다고 하더래이(하더라).”
탐구생활에(?) 익숙해진 나는, 오늘에야 그것도 이 글을 적기에 앞서, 그 원전(原典)을 추적하게 되었다. 바로 <<明心寶鑑>> <省心篇>에 나오는 말이더라는 거.
‘大富由天 小富由勤 (대부유천 소부유근).’
그런가 하면, 당신은 ‘진합태산(塵合泰山)’을 늘 일러주었고, 당신 스스로 실천적으로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 이야기는 벌써 까마득한 예전인 1997년에 펴낸 나의 첫 수필집, <독도로 가는 길>에 실린 ‘y 자의 교훈’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 나무꾼인 당신의 y꼴 지게 : 사무직인 나의 컴퓨터, 당신의 지게 쉼터 : 나의 휴게실, 당신의 목에 두른 수건 : 나의 Y 넥타이와 Y셔츠 ... 당신의 y꼴 지겟작대기 : 내 컴퓨터 키보드의 y/n(yes/no) 키’ 등으로 철저히 대조·대비시킨 작품이었다. 그 글 가운데에는 이러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대학에서 겨울방학을 맞은 내가 고향에 들렀을 때에, 아버지 당신은 사랑방 툇마루에 걸터앉아, 골목 어귀 담벼락에 세워둔 지겟작대기를 가리키며 자랑스레 말했다. 겨우내 당신이 지고 온 나뭇짐 수효와 똑 같다고. 사실 당신은 산이나 들에 갈 적에 지겟작대기를 들고 가는 법이 없었다. 지겟작대기란, 본디 지게만 괴면 되는 것이라, 손마저 놀릴 수 없어, 굵든 가늘든 고추지주 등에 쓸 만한 통나무를 그렇게 지겟작대기 삼아, 들고 아니 질질 끌고 오곤 한다고 했다. 한 마디로, 당신한테 너무 부끄러워, 이내 그 먼 청주(淸州)의 자취방으로 돌아갔고, 거기서 취직영어책을 끊임없이 파게 되었노라고.>
내 신실한 애독자들 가운데에서 몇몇 분은 아예 탄성(歎聲)을 지르거나, ‘경외(敬畏)의 메시지’를 보내오기도 한다. 나처럼 부지런한 수필작가를 본 적이 없노라고. 나더러 누에고치에서 한 없이 명주실을 뽑아내는 것 같다고도 한다. 내가 이처럼 부지런하게 된 데는, 어른들 말마따나 ‘근(勤)한’ 데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게다. 이 모두가 살아생전 내 아버지가 몸소 실천하여 물러준, 크나큰 유산(遺産)이라는 거.
끝으로, 일화(逸話) 하나만 더 소개하고 글을 맺을까 한다. 새벽이면, 내 어머니가 곤히 잠든 우리 형제들을 서둘러 깨우곤 했다. 사실 조무래기 학창시절에는 잠도 흔했는데 말이다.
“야들아, 느그 어른 이슬 맞고 풀짐 지고 오실 때 다 되어간대이. 그러니 저 멀쩡한 마당이라도 싸리빗자루 들고 쓸며 얼쩡대는 시늉을 해래이.”
이 정도였으니, 내 신실한 애독자들께서는 내 양친 슬하의 열 남매들이 하나같이 얼마나 생활력이 강한지를 짐작하실 것이다.
수필작가이기도 한 나. 나는 쉼 없이 글짓기를 할밖에. 내 아버지 말마따나 ‘진합태산’, 즉 ‘티끌 모아 태산’이니, 앞으로 5,000편이 되든 10,000편이 되든 마른 행주 쥐어짜듯 쓸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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