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내의를 빨며
면내의를 빨며
윤근택(수필작가/ 문장치료사/ 수필평론가)
농부인 나는 농약을 친 바로 다음에, 혹은 온몸에 땀이 줄줄 흘러내릴 적에, 곧바로 개울에 홀라당 벗고 뛰어들어 멱을 감곤 한다. 사실 나의(?) 개울은 사시사철 내 농장을 쓸어안고 맑게 흘러, 멱을 감거나 빨래를 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이러한 지정학적 이점을 지녔기에, 이미 40대 중반이었던 15년여 전에, 현직에서 장차 조기은퇴 감행을(?) 예상하여 장만하였던 게다.
그건 그렇다 치고... . 나는 멱을 감는 한편 입고 있던 면내의며 면장갑이며 ‘면마스크’며 일복이며 양말이며 온갖 걸 빨래비누로 아시빨래를 손수 하곤 한다. 오늘도 평소와 마찬가지로, 면내의를 아시빨래하여 꼭 짠 다음 탈탈 털어서 되입게 될 텐데... . 새삼 면(綿) 곧 목화(木花, cotton)에서 얻은 섬유의 탁월함을 깨닫게 되었다는 거 아닌가. 그 탁월함이란, ‘땀’이란 이름으로 된, 내 목숨 다한 세포들의 시신(屍身)과 더불어 내 삶의 찌꺼기인 먼지 따위를 고스란히 수습(收拾)한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참말로, 그 어떤 화학섬유도 따르지 못할 흡수력과 통기성(通氣性)을 지닌 목화의 산물(産物).
연상력(聯想力)이 꽤나 빼어나며, ‘연상의 사슬’도 곧잘 꿰는 수필작가로서 나. 나의 연상은 곧바로 내 훌륭한 면내의의 원료가 되는‘목화’에 닿게 된다. 고려의 선비, 문익점(文益漸,1331~1400)은 원나라의 금수품목인 목화의 씨를 붓 대롱에 숨겨 들여와서, 널리 퍼뜨림으로써 우리네 조상들 의복혁명을 일으켰다지 않던가. 돌이켜본즉, 소년기까지 내 고향 시골마을에는 집집이 목화를 재배하였다. 내 어머니도 예외는 아니었다. 내 고향 쪽 어른들은 ‘목화’를 ‘명’이라고 부르곤 하였다. 아마도 ‘면(綿)’의 사투리였던 듯. 여인네들과는 달리, 어린 우리는 그 목화가 하얗게 송이로 벌어질 때보다는 껍질이 말랑말랑한 ‘작은 공’ 모양일 때를 더 좋아했다. 왜? 그것은 달착지근한 군것질거리가 잘도 되었으니까. 그걸 우리는 ‘명다래’라고 불렀다. 그 명다래도 목화송이로 피어나기 직전엔 퍼석퍼석 씹혀 ‘내 맛도 니 맛도’ 없었다.
내 어머니는 여느 부인들과 마찬가지로, 목화재배를 하면서 ‘씨아’와 ‘물레’를 갖고 있었다.
‘씨아’란, 목화송이에서 목화씨를 발라내는 기구로서, 두 개의 원통형 막대가 맞붙어 서로 안쪽으로 감기도록 고안되어 있었다. 그 기구를 본 적 없는 내 신실한 애독자들의 이해를 돕겠다. 그 씨아는 요즘 떡방앗간의 ‘쌀 빻기 롤러’의 원형(元型)이다. 씨아를 통해 발라지는 목화씨도 한 몫을 톡톡히 했다. 내 어머니는 당신의 자녀들이 두드러기 즉, 아르레기를 앓게 되면, 목화씨를 달여 마시게 하고 두드러기 부위에 바르게 하고 이불을 뒤집어 덮고 잠시 누워 있으라고 하였다. 그러면 금세 두드러기가 가라앉았다. 신기한 일. 그 이불은 무명천으로 만든 거였고, 그 속이 솜으로 된 거였으며, 호청이 아닌 덮개는 검은 물감으로 채색된 거였다. 그 어떤 조화였을까. 그 검은 색이 체온을 높여주었기에 효험이 더해졌던 것인지?
물레란, 솜뭉치에서 한 올 한 올 뺀 섬유를 끊임없이 잇고 합사(合絲)로 자아내는 기구다. ‘방추(紡錘)’또는 ‘스핀들(spindle)’이라고 달리 부르기도 한다. 가락바퀴의 회전력을 이용하여 섬유를 비틀어 뽑아내어 실로 만드는 기구다. 참말로, 물레의 역할은 어지간하였다. 동서고금 섬유를 실로 뽑아내는 방식과 원리는 똑 같을 터. 사실 내 어머니는 이웃 부인들과 마찬가지로, 물레를 자아 면실을 만든 예는 거의 없었다. 물레는 주로 삼베실을 만들어 삼베를 짤 때 쓰였다.
면내의를 빨다가 시작된 나의 연상. 이번에는 섬유가 온전한 실로, 특히 ‘합사’로 만들어지는 그 ‘비틀림’ 내지 ‘꼬임’에 닿게 된다.
‘거, 참 신기하단 말이야!’
섬유 또는 외가닥의 가는[細] 실은 아무짝에도 못 쓴다는 것을. 내가 입는 이 면내의만 하더라도, 무수한 섬유들의 집합체이지 않은가. 그 섬유들은 서로 ‘타래’가 되어 합사가 되고, 그 합사들은 다시 씨줄과 날줄로 촘촘 교직(交織)되어 유용한 내의(內衣)로 탈바꿈되었으니... . 타래못(나사못), 타래란(-蘭), 새끼줄, 동아줄, 가야금의 스트링(string) 등 모두가 ‘타래’ 내지‘꼬기’의 결과물이 아닌가. 상투적이기는 하지만, 이 ‘타래’의 개념은 어느 특정 사회의 구성원들 몫을 생각할 수도 있겠고... . ‘꼬기’는 예술분야에도 유용함을 다시 한 번 생각게 한다. 그 점에 관해서는, 내가 이미 적어 인터넷 매체에 발표한, ‘새끼를 꼬다가’의 한 부분을 그대로 베껴다 붙이겠다.
< 특히 예술분야에 쓰이는 왜곡은 ‘distortion’ 즉 ‘변형’이라고 한다. 작가인 나는 이 ‘distortion’에 유의한다. 가령, 만화가가 캐리커처를 그리되, 그 대상물의 특징부위를 두드러지게 그린다는 점. 바로 그 것이 왜곡임을 알겠다.>
하여간, 내가 입는 면내의며 면장갑이며 면마스크며 모두가 목화송이에서 얻은 섬유를 이렇게 저렇게 합사하여 짜서 만든 거. 이쯤 되면, 목화는 인류가 찾아낸, 가장 빼어난 섬유가 아닐는지. 나는 면내의가 아닌, 여타 섬유질의 내의를 감히 상상할 수가 없다. 특히, 팬티는 모르겠으나, ‘면러닝셔츠’가 없는 생활을 상상하기도 싫다. 그 착용감이며 그 통기성이며 그 노폐물 수습력이며... . 물론, 목화송이에서 얻은 탈지면(脫脂綿)과 귀이개가 없는 세상도 나는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다. 아마 탈지면이 없으면, 모든 병원과 모든 약국이 문을 닫아야 할 테지.
끝으로, 요 다음에는 내 면내의를 빨되, 삶아서 정성스레 빨아야겠다고 다짐하며 글 맺는다. 세탁의 원리 가운데 가열은‘계면활성(界面活性)의 촉진’임을 아는 까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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