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신작

'나무난로 앞에서(69)'

윤근택 2019. 11. 30. 08:48

        

                                      나무난로 앞에서

                     -예순아홉 번째, 쉰 번째 이야기-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69.

  무쇠로 만든 신선로(神仙爐) 모양의 난로다. 맞은편에도 접의자 하나가 놓여 있다. 줄잡아 10년 후에나 이곳에 찾아올 나의 외손주. 녀석을 맞은편 접의자에 앉혀 놓고, 나의 노변담화(爐邊談話)는 이어진다. 이 연재물을 처음 읽는 이들을 위한 서비스다. 이 글은 수년 전 연작으로 이어왔던 이야기의 이어짐임을 알려드린다.

  이번에는 군것질삼아 씨 없는 쟁반감[盤柴]’ 홍시를 한 소쿠리 들고 나와, 외손주녀석과 함께 난로 앞에서 그야말로 냠냠 먹고 있다.반시는 지난 늦가을 녀석과 함께 내 농장감나무들 가지를 쳐다보며 감집게로 거의 매일 따던 것들 가운데 일부다. 사실 내 농장에는 이들 반시밖에도대봉감[大峯柹],‘부유단감[富有단감]’, ‘돌감등 다양한 감나무가 꽉 들어차 있다. 이들 감나무들은 이 할애비가 손수 가지접[枝接;割接] 등으로 주로 만든 나무들로, 수령(樹齡) 30여 년 되는 나무들이다. 이런 사실을 녀석한테 여러 차례 이야기해 왔고, 녀석은 품종별 저마다 감의 맛도 기억하고 있는 터.

  “한아버지, 대봉감이 더 굵고 맛있었는데... ”

  미안하지만, 그 대봉감 홍시들은 시세가 좋아 몽땅 내다 팔았기에 내 농장에 더는 없다. , 대봉감은 일본농부 하찌야[はちや; 鉢屋]’가 육종(育種)해낸 감이라는 설()이 있다. 해서, 초창기에는 대봉감이라고 부르지 않고, ‘하찌야감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하찌야근세 주발이나 호리병박을 두드리며 걸어서 보시(布施)를 받은 자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니, 그 감의 생김새가 주발또는 호리병같이 생긴 데서 유래한 것은 아닐까 하고서. 마치 우리가 그 생김새가 쟁반같다 하여 盤柴(반시)’로 부르듯.

   입술에 홍시 즙이 흥건히 묻은 녀석. 그 작고 빨간 입술이 고렇게 이쁠 수가 없다. 난로의 화문(火門)을 열어, 장작개비 하나를 보태 넣고 읋어댄다.

 

  ‘반중(盤中) 조홍시(早紅柴)가 고아도 보이나다.

   유자(柚子) 안이라도 품엄즉도 하다마

   품어 가 반기리 업슬새 글노 설워 하나이다.’

 

  내가 눈을 지긋이 감고 그 시조를 다 읋고 나니, 녀석이 캐묻는다.

  “한아버지, 대체 ?”

   나는 호기심 많고 학구적(學究的)인 녀석한테 아래와 같이 일러준다.

  이곳 경산과 인접한 영천에서 태어난 조선 중기의 시인, 박인로(朴仁老 1561-1642). 그분이 41세 되던 해, 존경하는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을 찾아갔을 때 조홍시(早紅柿;일찍 익은 감 홍시)를 대접 받고,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 사람 육적(陸績)이 모친께 드리고자 귤()을 품고 집으로 돌아간 회귤고사(懷橘故事)’, 즉 육적회귤(陸績懷橘) 고사(故事)를 떠올리며, 이미 돌아가신 자신의 부모님을 생각하고 이 시조(時調)를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녀석한테 풀이를 해준다.

  내가 쟁반감 홍시를 담아 나무난롯가에 들고 온 이 소쿠리를 내려다보라고. ‘쟁반감자체도 쟁반처럼 생겨먹었기에 붙여진 이름.

  ‘소쿠리, 곧 소반(小盤)에 놓인 일찍 익은 붉은 감이 곱게도 보이는구나! 비록 유자(柚子)가 아니라도 품어갈 마음이 있지마는, 품어 가도 반가워해 주실 부모님이 안 계시므로 그를 서러워하나이다.’

  할애비가 그 시조를 풀이해주자, 녀석은 놀라워하는 기색이다. 사실 녀석은 지난 가을 짓물러터진 홍시들이 감나무들 아래에 즐비하자, 그것들을 밟아 운동화를 버렸다고 투덜댄 적도 많았는데... .

  “ 한아버지, 박인로 선생님은 효심이 대단했던 거 같애. 글고(그리고) 한아버지 농장에야 흔해빠진 홍시도 그때는 귀했던 모양이야!”

  그러면서 녀석은 자기도 요 다음에 친할아버지, 친할머니, 애비, 에미한테 홍시를 잔뜩 가져가야겠다고 한다. 참말로, 기특한 녀석이다.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녀석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한아버지, 근데(그런데) 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어머니가 이미 아니 계시니 어떡해?”

  이 할애비는 지긋 눈을 감는다. 그리고 혼잣말을 이어간다.

  “어른들은 늘 그러셨어. ‘땡감도 빠지고 홍시도 빠지고 ...... 영감도 빠지고...... 오는 데는 순서가 있지만, (죽을) 적에는 순서가 없다네.’ ”

  녀석은 속절없는 세월을 탄식하는 이 할애비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 때 이 할애비는 감나무가 시도 때도 열매를 떨어뜨리는 걸 두고, 세상에서 가장 오줄없는 나무로만 여겼다고 녀석한테 고백한다. 하지만, 감나무는 감나무 나름대로 다 사정이 있었음을.

  “으뜸아, 감나무는 자기 힘에 부치면,‘1차 생리적 낙과,‘2차 생리적 낙과니 하며 적정 수량의 열매만 가지에 남겨. 젖꼭지가 두 개 뿐인 세상의 엄마들이 셋쌍둥이 이상 아이를 낳으면 힘들어 하겠지?”

  "녀석은 참말로 영리하다.

한아버지, 글고(그리고) 보니, 감나무는 굉장히 영리한 나무네.”

 

 

 

  여전히 녀석의 입가에 빨갛게 묻은 홍시 즙을 화장지로 훔쳐 준다. 사실 녀석이 오늘처럼 홍시를 맛있어 하며 먹은 적도 없다.

 

  70.

  녀석과 함께 다시 나무난롯가. 이번엔 난로 불문[火門]을 열어, 소나무 희나리장작을 하나 집어넣는다. 내가 채 마르지 않은, 이른바 희나리장작을 이렇게 넣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이미 불기운이 좋은 터라, 불기운을 조절하고, 희나리장작이 말라가며 서서히 타기를 원하는 까닭이다. 언젠가 어느 말라깽이 아가씨는 자위조(自慰調), “마른 장작은 불기운만은 좋은 걸요.”하고 말하던 걸 잠시 떠올린다. 하더라도, 금세 활활 타버려 지속력이 덜한 게 마른 장작.

  불문 뚜껑을 닫자니, 뚜껑이 닫히지 않는다. 내가 장작을 실수로 길게 잘라 생긴 일. 그렇더라도 장작의 저 끄트머리가 타면, 그때 가서 불문을 닫으면 될 일. 녀석도 그러자며 고개를 끄덕인다.

  나의 노변담화 꼬투리는 그 다음 순간에 낚아채게 된다.

  “한아버지, , 방금 넣은 장작개비 낯짝[斷面]소리와 함께 눈물이 송글송글 맺혀.”

  녀석은 소나무 희나리장작이 타면서, 품고 있던 물기를 내어놓는 걸 두고 그렇게 말한다. 수증기로 화()하는 소나무의 체액(體液).

  “으뜸아, 나무든 풀이든 식물들도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동맥정맥이라는 두 종류의혈관이 있다?”

  녀석이 의아해 한다.

  해서, 이 할애비는 녀석이 알아듣기 쉽게 나름대로 애를 써서 다음과 같은 요지로 설명을 한다.

  식물은 물관[水管]과 체관[篩管]을 지녔다. 물관은 동물의 동맥에 해당한다. 체관은 동물의 정맥에 해당한다. 물관은 동맥과 마찬가지로, 겉가죽을 기준하여 보다 깊은 곳에 자리한다. 체관은 정맥과 마찬가지로 겉가죽을 기준하여 보다 얕은 곳에 자리한다. ? 하느님께서는, 동맥이 심장에서 펌프질하는 피가 흐르는 관계로 제법 큰 압력이 있어, 자칫 탈이 날세라, 깊은 곳에 자리하도록 설계하신 것이다. 정맥은 비교적 압력이 없는 관계로 설령 터지더라도 피가 세차게 분출(噴出)하지 않으니... . 물관은 식물뿌리에서 빨아올린 수액(樹液)이 가지와 잎으로 이동하는 파이프이며, 체관은 나뭇잎이 만들어 낸 녹말이 뿌리로 이동하는 파이프다. 체관은 어레미[]’를 지녔기에 붙인 이름. 어레미의 기능은 동물 정맥의 날름막의 그것과는 다소 다르다. ‘날름막이 피의 거꾸로 흐름을 막자주는 기능을 하는 데 반해, 체관의 는 영양분 알갱이들을 걸러 일부는 가지 자람’, ‘잎 자람’, ‘열매 자람에 쓰고자 설계된 것이다.

위와 같은 설명을 듣던 녀석. 다시 소나무 희나리장작 단면에 소리와 함께 맺힌 이슬방울을 부지깽이 끝에다 희롱하며 말한다.

  “한아버지, 그러면 걸어 다니는 동물과 한 자리에서 한평생 사는 식물과 크게 다를 게 없네? 식물도 체액이 있고 동맥과 정맥이 따로 있으니깐!”

녀석은 도대체 누구 새끼인지 모르겠다. 해서, ‘植物動物이란 낱말이 지닌 뜻을 마저 들려준다.

  “(누군가가) 심어주어야 하기에 식물, 스스로 옮겨 갈 수 있기에 동물이라고 불렀을 뿐인 걸.”

  이 말을 듣던 녀석은 마치 차시예고(?)’라도 하듯 대꾸한다.

  “한아버지, 방금 누군가가 심어주어야 하기에 식물이라고 말했어. 누군가가는 누구누구야?”

  호기심 많은 외손주녀석은 이 할애비한테 이처럼 무궁무진한 글감과 영감(靈感)을 주고 있으니, 아니 이뻐할 수가 없다.

  이제 희나리 장작을 난로 깊숙 집어넣어도 되겠다. 불문을 닫자, 연기와 송진 내음도 가시었다.

 

 

 

 

 

(다음 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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