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브리엘 오보에
가브리엘의 오보에(Gabriel’s Oboe)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오늘 새벽, 얼음 낀 차창을 긁어내고 승용차를 몰아 출근한 나. 나는 내사랑하는 애독자 그룹(?) 회원들께, 늘 그랬던 것처럼 e메일로 다음과 같이 일일보고(?)를 하였다.
To : crane43@hanmail.net 외 몇 분
From : yoongt5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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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는 오전 내내 계속 자료를 챙겨나가고 있었다. 사실 작가인 나도 요즘은 도서관에 갈 일도, 학교에 갈 일도 없다. ‘네이버 박사(?)’와 ‘다음 박사(?)’ 두 양반이 자료를 다 챙겨주기 때문이다. 두 양반은 세상 천지에 모르는 게 전혀 없다는 거 다들 인정할 터. 좀 더 심하게 말하자면, 고작 지식 하나만을 얻으려면 굳이 그 비싼 학비를 들여 학교에 다닐 필요가 없다는 거. 하여간, 참으로 편리한 세상이다. 위 e메일에서 이미 언뜻 소개했지만, 어제 우리 성당의 이웃 성당 그 신부님이 연주했으며, 나한테 친절하게도 적어주신 그 곡명, ‘가브리엘의 오보에’를 내가 놓칠 리 만무하다. 그것을 실마리로 삼아 한 편의 글을 거뜬히 꾸려갈 수 있을 듯해서.
‘가브리엘’은, 성모 마리아님께 날아와, 성령으로 아기를 잉태하셨음을 최초로 알려준 천사다. 이 ‘가브리엘’의 여성형은 ‘가브리엘라’다. 마치 악령들의 킬러(killer)로 알려진 대천사 ‘미카엘’의 여성형이 ‘미카엘라’이듯이. 사실 내 작은딸의 세례명도 그러한 연유에서 ‘미카엘라’로 정했다. 그런가 하면, 그 곡 ‘가브리엘의 오보에’에 나오는 ‘가브리엘’은 ‘가브리엘 신부(神父)’를 일컫는다. 자연, ‘가브리엘의 오보에’는 ‘가브리엘 신부가 연주하는 오보에’란 뜻이 된다. 불행히도, 내가 여태 한번도 감상하지 못했던 그 명화(名畵), ‘미션(Mission)’에서 주인공인 ‘가브리엘 신부’가 인디오들에게 오보에 연주곡을 불어준 데서 그런 별칭이 붙었다는 사실. 오늘에사 그 영화를 인터넷 매체로 감상하였다. 왜? 이 글을 제대로 쓰자면, 관련되는 자료를 꼼꼼하게 챙겨야 했으므로. 마치 기말고사 때 벼락치기 공부를 하듯 그렇게 하였다. 이 곡은, ‘넬라 판타지아(Nella fantasia)’라는 별칭도 붙어 있었다. 이 ‘넬라 판타지아’는 이탈리아어로서, 이를 영어식으로 바꾸어 쓰자면, ‘In my fantasy’가 된단다. 곧, ‘내 환상 속으로’란 뜻이란다. 환상곡을 일컬어 ‘fantasia’라 한다는 사실도 새로 알게 되었다. 이 곡은 ‘엔니오 모리꼬네(Ennio Morricone, 이탈리아, 1928~)’라는 분이 작곡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는 작곡가 겸 음악감독이라고 한다. 그는 영화음악의 거장으로 평가 받으며, 수 많은 영화음악 명곡을 세상에 내놓았다고도 한다. 이 무식함이여! 하지만, 지나치게 부끄러워하지는 않는다. 그 누구도 세상 모든 것을 다 알지는 못할 테니까. 이럴 때에는, 학과 선배이자 학과 교수였던 윤 아무개 박사의 그 겸손된 표현으로 위로를 삼을 수 있다.
“자네들 말일세. 많이 알아서 ‘박사’가 아니라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이제야 드디어 혼자서 책을 펼 수 있다고 여겨 박사 학위를 주는 거라네.”
이쯤에서 한 차례 간추리자면, 이렇다. 엔니오 모리꼬네는 영화 ‘미션’ ‘OST’로 ‘가브리엘의 오보에’를 작곡하였다. 사실 그 곡은 널리 애청하는 곡이다.
다음은, ‘미션’이란 낱말이 대체 어떤 뜻을 지녔으며, 그것을 왜 영화 제목으로 삼았을까 등에 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미션’은, ‘사명’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네는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복음(福音)’이라고 부른다. 그 기쁜 소식을 전하는 걸 ‘전도(傳導; 傳道)’ 또는 ‘선교(宣敎 ;禪敎;船橋)’라고 한다. 우리네 가톨릭 신자들은 ‘마침 예식’ 맨 끝에 사제(司祭)로부터 아래 다섯 가지 유형의 말씀 가운데 하나를 듣게 된다. 더도 덜도 아닌, 접례(典例; 典禮)에 따라.
1) 주님과 함께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2)주님과 함께 가서 복음을 실천합시다. 3) 가서 그리스도의 평화를 나눕시다. 4)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5) 주님을 찬미합시다.
즉, 복음을 전하는 것은 우리네 신자(信者)들의 사명으로 되어 있다. 미션이란, 바로 그걸 일컫는다. 우리네 평신자들보다는 사제들과 수도자들은 그 미션을 더욱 중히 여길 것은 뻔하다. 그 영화 ‘미션’도 그러한 내용일 거라고 생각했더니, 과연 그러한 내용이었다.
1750년대 아르헨티나와 브라질과 파라과이의 국경지대 원주민 구아라니족 인디오들한테 복음을 전하러 간 신부들의 이야기. 선교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 1986년에 개봉한 영화였다. 그러한 명화를 이제서야 보게 되었으니, 하여간 나도 어지간히도 한심하다. 폭포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그 험한 지형. 선교에 나선 신부들은 가는 족족 원주민들로부터 화살에 맞는 등 순교를 당한다. 그들 구아라니족 인디오들은 본디부터 음악적 재능이 빼어나, 명품 현악기 등을 만들어 유럽에 파는 이들이기도 하였다. 그러한 환경, 즉 죽음을 무릅쓰고 선교에 나선 마지막 신부인 가브리엘 신부. 그는 활로 겨누며 에워싼 인디오들한테 태연한 척 그 곡 ‘넬라 판타지아’를 거듭거듭 연주한다. 그들은 차츰차츰 가브리엘 신부한테서 감화를 받아 가톨릭으로 개종(改宗)해 가는데… . 더 이상의 줄거리소개는 지면(紙面) 관계상 생략키로 하자.
그런데 작중인물 가브리엘 신부의 오보에 연주 장면과 그 음악을 자꾸 보고 듣자니, 거기에 또 한 장면이 겹쳐져 뜨거운 눈물이 마구 솟구칠 게 뭐람? 바로 ‘수단(Sudan)의 슈바이처’로도 알려진 고(故) 이태석 신부님. 그분의 일대기는 ‘울지마 톤즈’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로 몇 해 전 KBS에서도 방영되어, 가톨릭 신자들이든 일반 시민들이든 상관없이 많은 이들을 울렸다. 그분은 의사의 길도 포기하고 뒤늦게 신학교에 들어가 사제가 되었고, 절망의 땅 수단으로 갔다. 수단의 남쪽 작은 마을 톤즈에서 의료활동 등 봉사활동을 펼쳤다. 평소 음악에 소질이 많았던 그분. 그분은 ‘톤즈 브라스 밴드’를 결성하여 청소년들에게 꿈과 용기를 심어준다. 그분이 만든‘톤즈 브라스 밴드’는 그 나라의 자랑거리이도 하다. 심지어, ‘톤즈 브라스 밴드’는 군부독재 정부의 공식행사에도 초대받았다. 그러했던 그분은 48세를 일기로, 영원한 안식처인 주님의 품으로 갔다. 암 투병 끝에 그리 하였다. 그러자, 톤즈는 온통 눈물바다가 되었다. 그 꼬맹이들의 우상이었던 ‘쫄리 신부님’은 그렇게 갔다.
어제 나는 주일미사 때 ‘가브리엘 신부’의 화신(化身)과, ‘이태석 신부’의 화신을 동시에 만났다. 그는 내가 다니는 성당의 이웃 성당인 ‘정평성당’의 이경기 토마스 신부였다. 그는 성전(聖殿)을 건립코자 모금활동을 하러 교우들과 함께 우리 성당에 왔다. 그는 제단(祭壇)에서 오보에 연주를 하였다. 우리한테 ‘성전건립기금 봉헌서’를 작성해주십사 하고서 그리 하였다. 그 곡은 ‘가브리엘의 오보에’였다. 그분은 어릴 적부터 오보에 연주를 할 줄 알았던지, 아니면 영화 속 ‘가브리엘 신부’한테서 혹은 ‘톤즈의 고 이태석 신부’로부터 악기연주를 하면 좋겠다는 힌트를 얻었던지 여부는 모르겠다. 또 내가 그것까지 알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그분도 ‘미션’을 수행코자, 즉 하느님의 분부대로 살고자 그리 한다는 것을.
이제 두서 없는 글을 정리해야겠다. 나는 어제 이웃 성당 신부님의 오보에 연주를 들었다. 덕분에, 위에서 주욱 적어내려 왔던 사실들을 차례차례 알게 되었다. 이렇듯 하나씩 하나씩 알아간다는 거, 여간 즐겁지 않다. 아울러,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이웃들로부터, 내 가족으로부터 받은 미션은 대체 무엇일까에 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작가의 말)
글쓰기의 과정을 생생히 보여주기 위해,글쓰기의 실례(實例)라고 여기며 이 글을 적었다. 역설적 표현이긴 하지만, 너무 잘 쓰려고 하면 좋은 글이 아니 나온다고 말하고 싶다. 마치 프로야구 선수가 장타(長打)만 노려, 너무 어깨에 힘이 들어가면, 안타(安打)가 아니 나오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