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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96) - ‘인상주의 음악’의 창시자이자 완성자 -
    수필/음악 이야기 2022. 8. 2. 12:11

    새벽부터 '여름비'가 오락가락.

    이런 날은  루마니아 태생, 세계적인 팬플룻 주자 '게오르그 장피르'의

    '여름비'가 딱 어울리지요.

    부디, 아름다운 하루!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96)

                                                 - ‘인상주의 음악’의 창시자이자 완성자 -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1. 프렐류드(Prellude, 序奏)

     

     

     

       그를 두고, ‘인상주의 음악의 창시자이자 완성자’라고들 한다. 또, 20세기 음악의 기초를 확립한 작곡가라고도 한다. 바로 그가 ‘클로드 드뷔시’(1862~1918, 프랑스).

       잠시. 그의 생애에 관해 살펴보도록 하자. 전쟁통에 산모는 뱃속에 아이를 갖고, 손위동서댁에 피난 가서 거기서 해산한다. 어린 드뷔시는 그때부터 친부모가 아닌 큰어머니 손에 길러진다. 애정결핍 탓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반항아’로 자라난다. 사실 외모로 사람을 평가해서는 참으로 곤란하지만, 실물사진으로 본 그의 불거진 이마에서 고집불통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반항기질은 예술적 독창성으로 이어져, 결국‘인상주의 음악’을 낳게 된다. 이 점은 이따가 차근차근 다 밝히도록 하고.

        그러다가 9세 에 피아니스트 쇼팽과 친교를 맺고 있던 ‘모테 드 플레비유’ 부인의 눈에 띄어, 본격적 음악인으로 길러지게 된다. 그녀는 아마투어였으나 빼어난 피아니스트였다. 그녀는 무상으로 드뷔시 피아노 레슨을 해준다. ‘모테 ’ 부인은 시인 ‘폴 베를렌(1844~1896)’의 의모(義母)이기도 하였다. 모테 부인이 피아니스트 쇼팽과 시인 ‘폴 베를렌’을 좋아했던 걸 보아, 그녀도 예술을 무척 사랑한 여인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후일 그 '폴 베를렌'의  <달빛>이란 시도 드뷔시의 동일이름의 곡인 <달빛>에 영감을 주었다고 하니... .

       그러다가 드뷔시가 이번에는 우연한 기회에 러시아의 대부호 여인인 ‘ 나데즈다 필라레토브나 폰 메크’를 만나게 된다. ‘폰 메크’는 차이코프스키의 후원자이기도 하였다. 드뷔시는 '폰 메크'와 긴 여름방학 동안 유럽 곳곳에 있는 그녀의 호화로운 저택 등을 여행하게 된다. 예술가였던 그이한테는 여성들이 은인들이었으며 커다란 예술적 자산이었다. 하여간, 예술적 안목이 대단했던 ‘폰 메크’의 공로도 알아줄 만하다. 한편, 그는 파리에서 어느 건축가의 아름다운 부인인 가수 ‘블랑슈 바스니에’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연인이었던 그녀도 그의 초기작품에 영감을 주어, 섬세한 감성은 그의 초기작품인 <<베르가마스크 모음곡(Suite Bergamasques)>> 가운데에서 그 유명한 세 번째 곡인 <달빛>으로 이어졌다고들 한다. 그러고 보면, 예술가였던 드뷔시한테도 예외 없이 ‘사랑’이 창작의 원동력이었음을. 사실 수필작가인 나한테도 언제고 사랑만이 창작열을 불태우도록 하여 왔다.

       그는 11세에 파리 국립음악원에 입학, 12세에는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을 협연할 정도의 천재성을 보였다. 그 외에도 17세에는 악보 초견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는 등 피아노 연주만이 아닌 작곡 등에도 재능이 있음을 입증하기도 했다. 다만, 학교에서도 반항아의 기질을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수업이 휴강되자 자기 멋대로 대신 강의한다든지, 듣도 보도 못한 화음을 작품에 넣는 등의 행동으로 교수들 사이에서는 악명 높았다고 한다. 그의 ‘화성학’은 F학점. 그러나 정작 음악인들이 선망하는 ‘로마 대상’을 준비할 때에는 주위의 말을 경청했다고 한다.

       “ 너, 계속 이렇게 파격적으로 곡을 쓰면, 상을 못 탄다. 알어?”

       그제야 마지못해 멀쩡한(?) 곡을 작곡하여 로마 대상을 받는다.

       후기 낭만파의 구습(舊習)에 매달리지 않고, 반항아여서 ‘화성학 F학점’이었던 덕분으로(?) 그는 ‘인상주의 음악’을 창시했던 건 아닐까 하고서.

     

     

         2. <달빛(Clair de lune)>

     

     

     

       우선, 이 연재물 제 57화의 일부분을 따다 붙인 다음에 이야기 이어가기로 한다.

     

     

       < (상략)그는 당시 프랑스의 문예사조였던 인상주의에 충실했다는 거. 당대의 시인이었던 ‘말라르메(1842~1898)’ 집에서는 화요일마다 모임이 있었다는데, 많은 문학인들과 화가들이 모이곤 했단다. 그 모임에, 작곡가로 참여한 이는 드뷔시가 유일했단다. 그러니 그도 인상주의 예술가들이 추구했던, ‘자연으로부터 받은 순간적 느낌을 구현코자’애썼을 것은 당연하다. 다시 말하거니와, <달빛>은 그러한 인상주의의 음악이다. 당시 반 고흐의 작품,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연상케 하는 음악. 드뷔시는 전통적 화성을 지키지 않고 작곡함으로써 파리음악원 재학시절 화성학 F학점을 받은 바도 있다는 것도 흥미롭다. 바꾸어 말하면, 그는 전통적 화성의 진행을 거부하고 모호한 화음을 사용했다는 뜻이다.(하략)>

     

     

     

       드뷔시가 28세가 되던 1890년에 적은 <달빛>. 그는 그 곡을 적기 한 해 전인 1889년에 ‘파리 세계박람회’를 관람하게 된다. 그는 그곳에서 문화적 충격을 체험하게 된다.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전통음악을 듣고서, 동양적 음악에 매료된다. 흔히들 말하는 이국정취. 그는 그 자바섬 전통음악에서 영감을 <달빛> 적는 데 보탠다. 이미 위 ‘1. 프렐류드’에서도 소개했듯, ‘폴 베를렌’의 시 <달빛>에서도 영감을 얻어 그 제목을 그대로 썼고. 드뷔시는 그날 박람회 관람 때에 ‘아라베스크(Arabesque) 문양’의 그림도 감상하게 된다. 아라베스크란, 아라비아 또는 이슬람 문화권의 전통 무늬로, 이슬람권의 건축물이나 염직물에 주로 이용되는 기하학적 문양. 고선(孤線) 또는 와선(渦線) 등이 대칭, 방사, 반전 등의 수법으로 기하학적인 형태. 드뷔시는 그 그림에서 영감을 얻어, 그 해 27세가 되던 1898년에 곧바로 <<아라베스크(Arabesque) 1번>>을 적게 된다. 그 이야기는 이따가 따로 들려드리기로 하고. 하여간, 드뷔시는 1889년 파리 박람회 관람으로, 대표작 세 곡 가운데에서 두 곡의 영감을 얻은 셈. 정작 음악인이면서도 회화와 시에서 음악적 영감을 얻은 그 뛰어남이여! 여담이다. 나는 내 사랑하는 그이한테 일러준 바 있다. 

        “그대가 뛰어난 여류 시인이긴 하지만, 타 장르를 섭렵함에도 더 노력해주었으면 해요.”

       그의 <달빛>은 <<베르가마스크 모음곡(Suite Bergamasques) >> 4곡 가운에서 세 번째 곡으로, 아주 우리네와 친숙하고 너무나도 유명하다. 남들 말마따나, ‘귀로 듣는 회화’다. 환상적이고 몽롱한 느낌이 드는 화성의 피아노곡. ‘파리 국립음악원 화성학 F학점’ 학생이었기에 만들어낼 수 있었다. 참고적으로,‘Bergamasques’ 란, 이탈리아 나폴리 지방의 춤곡인 ‘타란텔라(Tarantella)’와 비슷한 춤곡을 일컫는다. 나는 이미 그의 <달빛>이 ‘블랑슈 바스니에’라는 유부녀와 사랑에서 영감을, 시인 ‘폴 베를렌’의 시 <달빛>에서 창작 영감을 얻었다고 적었다. 살펴본즉, 그의 시 마지막 행은 이렇게 되어 있다.

        ‘ 저 쓸쓸하고 아름다운 고요한 달빛과 함께 있다.’

       참고적으로, 그 시의 앞부분은 춤추는 무리들 이야기로 꾸며져 있다. 그리고 나는 '폴 베를린'의 의모가 곧 드뷔시의 후원자였다고도 적었다. 나는 서로 연결고리가 됨을 이처럼 말하고 있다. 그리고 몇몇 날 드뷔시를 공부하다가 내가 낚아챈 새로운 사실. 그 어느 음악평론가들도 그 점은 여태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가 인상주의 화가들과 매주 화요일 시인 ‘말라르메’ 집에 모였고, 거기에는 ‘빛의 화가’로 일컬어지는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도 끼어있었다는 점. 사실 당시 ‘르로아’라는 미술평론가는, 모네의 <<인상: 해돋이>>를 보고서, 그들 실험적 화가들을 조롱하면서,  ‘인상주의자 같은 이들’이라고 칭하면서 생겨난 문예사조라는데... 어쨌든, 내가 며칠 동안 드뷔시를 공부하다가 낚아챈 사실이다. 모네의 <<인상: 해돋이>>란 작품에 드뷔시가 <달빛>이란 곡으로 화답한(?) 것은 아닐까 하고서. 사실 내가 이 글의 완성도를 한층 높이고자, 모네의 그 그림을 감상해본즉, 과연 드뷔시의 <달빛>도 모네의 <<인상: 해돋이>>와 너무도 닮아 있음을 느끼게 했다. 모네는 해돋이이되, 결코 강렬한 빛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드뷔시는 달빛이되, 요요한 달빛이 아니라 으스름 달빛이었다. 둘 다 은은하기만 하였다. 해서, 모네를 비롯한 그들 인상주의 화가들과 유독 하나뿐이었던 인상주의 음악가 드뷔시가 추구한 예술세계는 같더라는 거. 그들 인상주의 화가들은  ‘빛에 따라 변하는 사물을 고유의 색깔을 무시한 채 빛의 영향을 받은, 색감을 선호하는 그림’을 그리던 이들. 마찬가지로, 드뷔시는 전통적 화성형식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유연한 음악을 추구하던 이.

       요컨대, 드뷔시의 <달빛>은 몽환적이고 환상적이다. 요요한 달빛이 아니라 으스름 달빛이다. 그러한 달빛을 선연히 보는 듯한, 귀로 듣는 회화다. 그가 28세 되던 그 젊은 나이에, 파리박람회 관람 후  그 이듬해에 적었다. 파리박람회를 관람한 해 1889년 27세 나이에 그의 대표작  가운데에서 하나인  <<아라베스크 1번>>를  곧바로 적었다. 이 점에 관해서도 내 사랑하는 그이도 뭔가 깨닫는 점 있었으면 참 좋겠다.

     

     

      (다음 호 계속)

     

     

       작가의 말)

     

      길이가 너무 길어지면, 내 신실한 애독자님들 께서 짜증낼세라, 그의 <<아라베스크 1번>>과 교향시 <<바다>>는 다음 호에 적도록 한다.

      나의 신실한 애독자들께서도 드뷔시의 ‘귀로 듣는 회화’인 <달빛>을 한번 들어보시길. 그러면 신비로운 세계로 이끌려 들어갈 것이다.

       아무쪼록, 다들 부족한 점은 채워서 읽어주시길. 그리고 이 글도 내 사랑하는 그이한테 바친다.

     

     

      * 이 글은 본인의 블로그, 이슬아지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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