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128) - ‘난 그대를 원해요’ -
    수필/음악 이야기 2023. 1. 31. 13:54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128)

                                                                  - ‘난 그대를 원해요’ -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그의 성악곡, ‘난 그대를 원해요(Je te veux)’는 관능적이다. 노골적이다. 금세 성애(性愛)를 떠올리기에 충분한 제목이다. 사실 그가 작곡한 이 곡은 프랑스 문인인 ‘앙리 파코리(Henry Pacory)’의 시를 모티브로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노랫말을 부분부분 옮겨본다.

       ‘나는 그대를 원해요/나는 그대의 고뇌를 이해해요/ 사랑하는 애인이여, 그리고 나는 그대의 희망에 양보해요/(중략)나는 소중한 순간을 갈망한다오/우리가 행복한 순간을!/나는 그대를 원해요/(중략)나의 심장은 그대의 것이 되고/ 그대의 입술은 나의 것이 되고/ 그리고 나의 육신은 그대의 것이 될 것을/나는 그대를 원해요/(중략) 사랑에 빠진 그대의 심장은 나의 애무를 구하러 온다오/ 동일한 불길로 태워져/ 사랑의 꿈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두 영혼을 교환할 테요//’

       이 곡은 <3개의 짐노페디>,<그노시엔느>와 더불어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짐노페디’니 ‘그노시엔느’니 하는 곡명도 자기가 멋대로(?) 지은 이름이다. 그가 독창적으로 지은 곡명들 가운데에는 이밖에도 많다. 〈관료적인 소나티네〉, 〈차가운 소곡집〉, 〈엉성한 진짜 변주곡―개(犬)를 위하여〉, 〈배(梨) 모양을 한 세 개의 곡〉, 〈끝에서 두 번째 사상〉 등. 이 정도로 해두고.

       이 글 부제로 삼은 이 곡을 작곡한 이가 바로‘에릭 사티[Eric Satie, 1866~1925(향년 57세),프랑스]’ 다. 사실 그에 관해서는 ‘미니멀리즘(minimalism) 음악 선구자’란 부제가 붙은 본 연재물 제 64화에서도 다룬 바 있다.

       그가 생존해 있을 당시는 그저 기이(奇異)한 인물로 취급받았다. 하기야 죽을 때까지도 괴짜로 지냈지만. 그는 12세에 파리음악원에 입학했으나, 그 동안의 음악 규범을(?) 따르지 않아, ‘내침’을 당하고, 독학으로 작곡을 하게 된다. 그는 예술인들이 모이는 ‘몽마르뜨’의 살롱에서 피아노 연주로 생계를 겨우겨우 이어간다.

       27세에 이르렀을 때, 그는 운명적인 첫 연인이자 마지막 연인이 된 여인을 만나게 된다. 그녀는 그이보다 한 살 위인 ‘쉬잔 발라동(Suzanne Valadon, 1865~1938, 프랑스화가)’이란 여인. 그는 첫눈에 반하고 만다. 눈이 삐어도 유분수지! 사실 그 여인은 사연도 많고, 그 애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열 살짜리 사생아까지 딸린 여인임에도... . 그런데 그 여인은 그의 청혼을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그리해놓고서 그의 옆방에 아이까지 데리고 와서, 3개월(일설에 의하면 6개월) 살게 뭐람? 우리네 일반인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 그 기간 동안 둘은 온몸을 불태워 사랑했던 모양. 감히 내가 생각하기에, 그 사랑은 그 무엇도 아닌 성애(性愛)였을 듯. 그러던 그녀는 그를 차버리고 또 다른 남자 품으로 가고만다.

       ‘에라, 모르겠다. 차라리 더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내 애독자들에 대한 최소한 예의겠다.’

       그녀는 ‘꽃뱀’이었거나 ‘색골(色骨)’이었거나 둘 중 하나였을 듯. 사실 국내에서는 ‘사자명예훼손죄’라는 게 있긴 하지만... .

       그녀의 삶에 관해 ‘나무위키’는 요약하고 있는데, 나는 거기서 더욱 압축하고 윤색한다.

       <그녀는 가난한 세탁부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6살 때부터 부모의 세탁일을 도맡아 하다가 서커스단의 곡예사로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곡예 중 줄에서 떨어져 다시는 곡예를 할 수 없게 된 이후, 그녀는 이런 저런 직업을 전전하다가 화가인 ‘퓌비 드 샤반’의 가정부로 일하게 되었는데, 화가 샤반의 눈에 띄어 그의 모델 일을 하다가 자신의 숨겨진 재능을 깨닫고 어깨 너머로 그의 방식을 연마했고 ... 정식으로 화가의 반열에 올랐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정식으로 미술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화가의 모델을 서면서 그 화가의 터치와 기법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고, 그것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승화했다.

       정말 그랬을까? 그녀가 모델이 되어주고 잠자리까지 해줌으로써, 당해 화가들이 그녀를 화가로 키워주었을 수도 있지 않은가. 적어도,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는, 프랑스 최초 여류화가라는 명성과는 달리, 그녀의 그림이 그리 신통치가 않던데... .

    사실 당시는 모델이 되는 일은 당해 화가의 정부(情夫)가 되는 일과 통했다고 한다. 하기야 혈기왕성한 남성 화가가, 발가벗은 여인을, 그것도 풋풋한 여인을 그냥 보기만 했을까? 그냥 내 추측일 뿐이니, 대한민국의 그 많은 고매한 화가들은 전혀 개의치 마시길. 덧붙여, 실제로 그녀한테 그러한 일이 빈번했기에 하는 말이니... .

       그녀는 남자관계가 상당히 복잡했다. 우선 그녀는 모델로 일하던 18살 때 아들인 모리스를 출산했는데, 아이의 아버지로 퓌비 드 샤반, 에드가 드가, 르누아르 등이 세인 입방아에 올랐으나, 정작 그들은 모두 발라동과 관계를 부정했다. 그녀는 누구의 씨앗인지도 모를 지경이었던 셈. 속된 말로, 그녀는 잘도 벗어댔다는... .

       그녀는 사티의 청혼을 거부하고, 31세에 은행가 ‘폴 무시스’와 결혼을 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발라동은 아들의 친구인 ‘앙드레드 우터’와 사랑에 빠져, 폴 무시스와 이혼하고 우터와 결혼했다. 이 때 발라동은 48세, 우터는 27세였다. 그리고 이 결혼으로 인해 세인들은 발라동과 아들인 모리스와 남편인 우터를 합쳐 저주받은 3인이라고 손가락질했다. 하지만, 이것 또한 오래가지 못했다. 우터는 나이 많은 발라동으로만 만족하지 못해 여러 여자를 만나기 시작했고 결국 그녀는 우터와 이혼한 후 4년 뒤에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향년 72세.>

       그랬던 그녀를, 법적으로(?) 총각이었던 사티가, 그 짧은 3개월간의 동거를 한평생 못 잊어했다니! 아, 지고지순한 사티의 사랑이여! 사티는 그녀가 3개월여 동거 후에 홀연히 떠난 지 6년 되던 1897년에 위 부제로 삼은 성악곡을 적게 된다. 그는 그로부터 12년 후인 1909년 그의 나이 44세가 되던 해에, ‘픔레트 다르티’에 의한 첫 공연을 보게 된다. 그녀는 파리 공연장에서 ‘디바(Diva)’였으며,‘슬로우 왈츠의 여왕’으로 불렀다고 한다. 물론, 그때까지도 사티는 미혼상태였다.

    ‘쉬잔 발라동’을 떠나보낸 후 사티는 더욱 폐쇄적인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57세로 쓸쓸히 떠난 사티. 고인이 된 그의 어두컴컴한 방에는 ‘쉬잔 발라동’이 그려준 그의 자화상 한 점과 자신이 그려준 ‘쉬잔 발라동’의 자화상 한 점이 벽에 나란히 걸려 있었다고 한다. 그림에 관한 한 문외한인 내가, 그 그림들을 인터넷판으로 보았더니, 그 채색이 어둠침침하고 장난스럽게만 느껴지던데... .

       어쨌든, 그들 둘은 갔다. 하더라도, 에릭 사티의 그 격정적인 제목을 품은 곡, <난 그대를 원해요>는 그의 사후 시간이 지날수록 불후의 명곡으로 되어갔다. 그 곡은 성악으로서 뿐만 아니라, 여러 기악곡 등으로 애연(愛演)된다. 그처럼 그의 곡이 애연되는 이유야 번연하지 않은가. 청자(聽者)들은, 그가 그 곡 제목 하나만으로도, 가식 없이, 자신의 속마음을 사랑하는 이한테 후련하게 털어놓은 데 대한 대리만족일 거라고.

     

     

       작가의 말)

       다들 제 글 모자라는 부분은 채워서 읽어주세요. 이 혹한의 날씨에, ‘만돌이농원’ 농막에서, 선풍기형 난로와 전기 패널을 틀어놓고서, 언 손발 주물러가면서 글을 쓰고 있어요. ‘에릭 사티’만치나 기특하지 않으세요?

     

    * 이 글은 본인의 티스토리 이슬아지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