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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상비약(常備藥)들수필/신작 2023. 9. 4. 22:05
추억의 상비약(常備藥)들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음악 칼럼니스트)
시간을 거슬러, 지금으로부터 50년~60년. 유년시절, 소년시절을 거치는 동안 양친과 열 남매를 더해 열두 식구였던 우리 집에도 여느 집과 마찬가지로 상비약들이 작은 나무궤짝에 들어 있었다. 시대가 변한 요즘에 이르러서는 그 약들이 한낱 조악(粗惡)한 것으로 여길 수도 있겠으나,당시는 그것들이 특효약들 내지 명약들이었다.
1. 오적어(烏賊魚)뼈
내 양친은, 유선형으로 작은 조각배처럼 생겨먹었고, 하얀 색을 띈 그 약을 ‘오적어뼈’라고 불렀다. 물론 오적어는 오징어의 다른 이름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것은 갑오징어의 내각(內殼), 즉 갑골(甲骨)이었다. 한의학에서는 그 갑오징어뼈를 해표초(海螵硝),오적골(烏賊骨) 따위로 부른다.
우리는 그 오적어뼈를 상처약으로 쓰곤 하였다. 재키칼로 그 뼈를 긁으면 하얀 가루가 나왔다. 그 가루를 상처부위에 바르면 상처는 곧 아물곤 하였다.
이 글을 쓰기에 앞서, 그 갑오징어뼈에 관해 다시 살펴보았는데, <동의보감>에서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성(性)이 미온(微溫)하고 맛이 짜고 독이 없으며 부인의 누혈, 귀가 먹어 들리지 않는 데에... 눈의 열루를 다스리며, 혈붕(血崩)을 고치고 ... .’
탄산칼슘이 주성분이고, 제산작용· 지통작용· 지혈작용을 하여 새살이 돋아나오게 한다고하니... . 또, 조선시대, 1814년에 정약전이 지은 어류학서인 <玆山魚譜(자산어보)>에서 전하길,‘당나귀 등창을 다스리는 데에는 오적어뼈가 아니면 고치지 못한다.’
2. 아까징끼[赤いヨードチンキ]
‘위키백과’는 비교적 이해하기 쉽게 아래와같이 요약한다.
<요오드팅크(←독일어: Jodtinktur, 영어: Iodine tincture)는 요오드, 요오드화 칼륨을 에틸알코올에 녹인 용액으로 구급약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소독약으로 상처 난 부위에 발라서 이용한다. 몸에 바르면 노란색으로 보인다. 현재는 포비돈 아이오딘에 밀려 예전보다는 적게 사용된다. 일본어의 영향으로 ‘옥도정기(沃度丁幾)’로 부르기도 한다. 이의 영향으로 머큐로크롬을 ‘아까징끼(←일본어: 赤いヨードチンキ)’로 부르기도 한다.>
사실 아까징끼는 집집이 상비약이기도 하였지만, 국 민학교 시절 교실에도, 양호실에도 상비약으로 비치되어 있었다.
그 빨간 약은 거의 만병통치약이었다. 따로 이유식(離乳食)이란 게 나오기 이전. 엄마들은 아가 젖떼기를 할 적에도 이 아까징끼를 종종 사용하였다면, 요즘 젊은이들은 이해하실까? 엄마들은 자기 젖꼭지에다 아까징끼를 발라, 아가가 겁을 먹어 더 이상 젖을 빨 수 없도록 했다는 사실. 어떤 엄마들은 자기 젖꼭지에다 ‘소태나무’의 껍질을 물에 태워 바르기도 했다. 우리가‘소태처럼 쓰다’라는 비유적 표현을 종종 쓰게 되는데, 정말 소태나무 껍질은 쓰다. 내 아버지는 그 소태나무 껍질을 우린 물을 송아지 젖 뗄 때에 응용하기도 하였다. 송아지한테만은 아까징끼가 잘 안 들었던 모양.
아까징끼의 위력은 대단하였고, 널리 사용되었다. 오죽했으면 이러한 우스갯소리도 했을까?
“배(뱃속)가 아플 때에는 아까징끼가 최고! 아까징끼를 뱃가죽에다 발라도 속병이 낫는다?”
실제로 그리 하여도 심리적 치료 내지 심리적안정감을 주었으리라.
3. 안티푸라민(Antiphlamine)
간호사 모자를 쓴 간호사가 양철통뚜껑에 도안되어 있고, 버드나무 심벌 그림이 그려져 있던 ‘유한양행(柳韓洋行)’의 그 연고. 우리나라 최초 자체개발한 의약품이라는데... .
그 제품명 ‘안티푸라민’은 ‘ant-(저항, 반대)’와 ‘-inflame(염증)’의 합성어란다. 그러니 염증치료제임을 금세 알 수 있다.
‘유한양행’은 초대회장 유일한(柳一韓, 1895~1971, 독립운동가, 교육자, 사회사업가)의 이름에서 따온 이름. 그의 본디 이름은 ‘유일형(柳一馨)’이었다. 9세 때 미국으로 건너가 신문배달을 하면서까지 공부를 했다는데, 당시 신문보급소 동료가 이름 부르기가 어렵다고 ‘一韓’으로 바꾸어주었단다. 그렇게 자수성가한 그는, 독립운동에도 적극 몸담아, 서재필이 후일 ‘유한양행’의 로고를 버드나무로 그려주었다는 일화.
때는 1926년. 그는 유한양행이란 제약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마침 그때 그 건물 2층에는 그의 부인 ‘호미리(胡美利, 중국계 미국인 소아과전문의)’가 개업 중이었다. 그녀는 많은 환자들을 대하며 안타깝게 여겨, 유한양행 학술과에다 염증치료제 개발을 권유하게 된다. 해서, 태어난 약이 ‘안티푸라민’. 잘은 모르겠으나, 그 약 깡통 뚜껑에 도안된 간호사의 모델은 호미리인 듯. 참고적으로, 미국이 1889년 개발한 유사 효능을 지닌 소염치료제‘멘소래담’ 로고는 어린아이 간호사 그림. 한국에서는 ‘안티푸라민’,미국에서는 ‘맨소래담’,그리고 싱가포르에서는 ‘호랑이 연고(1870년대 초 개발)’. 염증 치료제로서는 이들 세 제품이 우리들한테 익숙한 게 사실이다. 그 이후에 ‘후시딘 연고’와 ‘마데카솔’이 등장했지만... . 잠시. 인터넷 검색창에다 ‘윤근택의 상처 치료제에 관해’를 치면, 후시딘연고와 마데카솔 탄생 비화를 비교적 소상히 읽으실 수 있다. 기왕지사 ‘호랑이 연고’ 이야기를 꺼냈으니, 마저 하고 넘어가자.
호랑이 연고. 1870년대에 본초학자 즈친[胡子钦]이 개발하여, 그의 아들 후원후와 후원바오 형제가 상업화했다. 후원후[胡文虎]의 이름이 호랑이이다. 그래서 ‘호랑이표 만금유(虎標萬金油)’라고 해서 호랑이연고라고 부른다. 옛날 약장수들은 ‘백두산 호랑이뼈를 통째로 갈아 넣은’ 이 약을 이곳저곳 아픈 데다 바르기만 하면 낫는다는 만병통치약으로 소개하곤 했다. 오늘날 호랑이 연고는 6개국에서 생산되어 70여 개 국에 수출되고 있다.
4. 이명래(李明來)고약
이명래(세례명 요한, 1890~1952),그는 서울 남산동에서 9남매 가운데에서 맏이로 태어났다. 그는 충남 아산의 ‘공세리(貢稅里) 성당’의 평신도로 지냈다. 당시 공세리 성당의 초대 주임신부는 파리 외방 선교회 ‘에밀 드비즈(1871~1933)’. 드비즈 신부는 35년간 그 성당 재임하게 된다. 그는 신자들이 온갖 종기에 시달리자, 약용식물학 서적과 한의학 서적을 섭렵하고, 민간요법까지 응용하여, 무려 15종의 약제를 버무려 고약을 만들게 된다. 그 고약명은, 드비즈 신부의 한국식 이름을 따서 ‘성일론(成一論) 고약’. 사실 이명래는 그 신부의 조수였다. 1920년 이명래는 독자적으로 ‘명래 한의원’을 열고, 우리나라 최초의 이름상표인, ‘이명래고약’을 출시하게 된다. 화농성 종기치료제이다. 위에서 언뜻 소개하였지만, 15종의 각종 약제를 적정 비율로 섞어 만든 고약. 특히, 우리가 기억하는 그 ‘이명래 고약’은 팥알 크기의 ‘발근고(拔根膏)’가 있어, 고름덩어리를 쏘옥 빼주어, 피부에 구멍이 날 정도였다는 점.
집집이 ‘이명래 고약’은 상비약이었다. 살펴본즉, 아직도 약국에 ‘이명래 고약’이 있다고 한다.
5. 됴고약
위 4에서 소개한 ‘이명래 고약’에 어금버금인 ‘됴고약’도 우리네 가정에 상비약으로 있었다.
됴고약은, 조선말기 ‘조근창(趙根昶)’이란 외과의사(요즘 식 표현임.)가 개발한 고약. 그 고약의 성분은 거의 밝혀져 있다. 다소 내 글이 길어지더라도, 그 성분을 다 열거하고자 한다. 행인·황·황백·황납·황기·황금·현삼·유향·적작약·연단·생지황·백렴·백지·백급·몰향·목별자 등 무려 16종의 약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전한다. 얼마나 정성스럽게, 얼마나 이것들 성분의 구성비를 정교하게 하여 만들었는지를 생각해본다. 담황갈색 내지 황갈색의 고약이었으되, 그 고약의 중앙부에 콩알 만한 ‘발근고’를 얹어 환부(患部)에 바르면, 영락없이 고름의 뿌리, 곧 ‘세균과 싸우다 전사(戰死)한 백혈구들의 시체 덩어리’째 뽑혀 나와 환부에 구멍이 다 뚫릴 정도였다. 시원하게 종기 등을 낫게 했던 됴고약.
됴고약은 이명래고약과 더불어 우리네 종기치료 상비약이었다. 그런데 그 댁 가업(家業)은 1945년에 접고 말았다니, 다소 아쉽다.
다시 돌이켜본다. 시간을 거슬러, 지금으로부터 50년~60년. 우리는 그렇게 유년시절, 소년시절을 지냈다. 그런데 의학은 거듭 발전하였고, 평균 수명도 늘어났으니, 이 얼마나 복 받은 일이냐. 사실 내 어릴 적에는 이웃 어른들이 회갑을 맞으면, 성대히 회갑잔치도 벌이곤 했는데... 이 글을, 인내심 있게 여기까지 따라 읽어온 독자들한테 덤이다. 사실 우리가 쓰는 지폐의 위인들 초상화 아래에는 자잘한 글씨로 그 위인들의 출몰년이 기록되어 있다. 일만 원 지폐 세종대왕은 고작 54세, 오만 원 지폐 신사임당은 겨우 48세, 오천 원 지폐 율곡은 48세로 생을 마감했다. 단, 일천 원 지폐 퇴계는 69세로 당시 기준으로 장수했을 따름. 그러니 67년 동안 무탈하게 살아온 내가 선인(先人)들에 비해 얼마나 행복하냐고? 어디 나뿐일까? 모두 위에서 낱낱이 소개한 ‘추억의 상비약들’ 덕분이리니!
* 이 글은 본인의 블로그, 이슬아지 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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