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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옷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어제저녁 텔레비전 뉴스 시간에, 어느 유명 ‘상조회사’가 수년간 중국산 수의(壽衣)를 국내산이라고 속여 팔아 오면서 부당이득을 엄청 챙긴 것으로 보도하는 걸 시청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몰염치한 짓이다. 다른 사업도 아닌, 남의 집 장례를 도와주겠다고 나선 회사가 그러한 짓을 했으니… . 사실 중국산이라고 하여 모든 제품의 질(質)이 모두 떨어진 것은 아니라고 본다. 다만, 그쪽의 인건비가 우리나라의 그것보다 싼 관계로, 제품의 원가가 본디는 싼데, 턱 없이 이문을 많이 남긴 것이 일단 문제가 된다. 거기다가 중국인들은 재주가 아주 교묘해서 수의에 쓰이는 삼베조차도 100% 진짜 삼베가 아닌 합성수지 즉, 마대(麻袋) 등이 섞여있을 개연성이 있다. 나아가서, 질 나쁜 삼베천에다 물까지 들였을 개연성도 있다. 그러면 문제는 더욱 커진다. 사실 수의가 갖추어야 할 조건은, 시신과 함께 땅에 묻히자마자 속히 썩어 주는 재질이어야 한다. 고인이 걸친 수의는, 시신이 속히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데 걸림돌이 되어서는 결코 아니 된다. 해서, 일찍부터 우리의 전통예법에는 인조 섬유로 짠 옷을 입히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상조회사의 부도덕성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더더욱 커진다.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 왔다가 저승으로 떠날 적엔 한 벌의 옷만 후손들로부터 얻어 걸치고 간다. 그러한 점에 비추어 볼 적에, 유족들은 고인이 마지막으로 입고 가는 그 옷만은 아무리 비싸더라도 정성스레 해드리고자 한다. 당연히 고가품이다. 그러함에도 고인과 유족들을 그처럼 속여 왔다니… .
문득, 내 어머니와 내 손위 누이들과 삼베와 베틀 등이 마치 윤무(輪舞)를 추듯 내 머릿속에 떠오른다. 내 고향 쪽 어르신들은 그 옷을 수의라고 하지 않고, ‘먼 옷’이라고 하였다. ‘아주 먼 곳, 미지의 그곳으로 떠날 때에 입는 옷’이란 뜻을 지닌 듯하니, 아름답고도 슬픈 표현이다. 그리고 ‘지금 당장이 아닌 아주 먼 훗날 옷으로 지어 입었으면 좋겠다’는 장수 기원의 의미도 녹아있는 듯하다. 실은, ‘壽衣’라는 어휘도 ‘장수(長壽) 후에나 입을 옷’이란 의미가 들어 있는 듯하다. 대체로, 노인들은 자신의 묘터와 더불어 수의도 미리 장만해두면 든든해 하고 흐뭇해 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해두면 오래 살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 또한 없지 아니 할 것이다. 마치 암보험에 가입해두면 암에 걸리지 않는다는 속설(俗說)처럼. 내 어머니는 손수 베틀에서 짠 삼베를 장에다 내다팔기 전에 몇 필(疋) 베내어 당신의 남편이자 내 아버지인 분의 몫으로 장롱에 고이 간직했다. 그리고는 나의 맏형수한테 일렀다.
“숙이 에미야,이 삼베천을 잘 간수해야 된대이. 느그 어른 ‘먼 옷’ 감이다. 좀이 안 슬도록 자주자주 살피거래이.”
그 정성,그 수고로움으로 말하자면 참으로 대단했다. 실은, 내 어머니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내 어릴 적 이웃의 부인들은 대개가 길쌈을 하였고, 자기네 시어른들과 친정어른들과 남편 등의 ‘먼 옷’ 삼베를 손수 장만하곤 하였다. 그러면서도 정작 부인들 자신들의 몫은 따로 남기지 않고 몽땅 장에다 내다 팔아 살림에 보탰다. 그렇게 하였던 베짜기가 차츰 산업화,기계화되면서 양질(良質)의 삼베천도 동시에 구하기 힘들어졌다. ‘안동포(安東布)’로 그 명맥을 유지한다고는 하나, 그 많은 수요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일 테니,우리들은 앞으로 수작업으로 정성스레 짠 ‘삼베 먼 옷’을 입고 가기가 다 틀렸다.
잠시 ‘쉬어가기’를 하자. 아래는 내가 이미 적어 인터넷 매체 등에 소개한 수필,’베짜기새’의 한 단락이다.
‘정작, 내가 아는 뛰어난 베짜기새는 따로 있다. 내 어머니와 손위 누이들이다. 50여 년 전 나는 그 여성들을 가까이에서 똑똑히 보았다. 그들은 일 년 내내 길쌈을 했다. 찐 삼의 껍질을 벗겨, 가는 실오라기를 만든 다음 끊임없이 이어나갔다. 한쪽 끄트머리를 이빨로 능수능란하게 ‘Y’자로 찢고, 그 틈새에 또 다른 자투리의 끝 ‘I'자를 끼운 다음, 무릎에다 얹어놓고 손바닥으로 쓱쓱 비비면 놀랍게 실이 이어지곤 했다. 동시에 물레작업이 되어 실이 꼬여졌다. 그것이 ‘삼 삼기’다. 누이들의 하얀 이빨은 위에서 말했던 새들 부리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참으로 가지런하고 이뻤다. 누이들은 삼 삼기가 화근이 되어 이빨이 다 망가져, 지금은 저마다 의치(義齒)로 지낸다. 누이들은 이웃의 또래들과 어울려 삼을 삼곤 했다. 이웃집에 놀러 갈 적에도 삼광주리를 끼고 다녔다. 물론, 그 광주리 안에는 삶은 감자 등 주전부리와 함께 고담책(古談冊)도 담겨 있었다. 하나같이 삼단 같은 머리를 한 처녀들이었다. 그것이 누이들의 일과였다. 실은, 길쌈솜씨가 좋아야 총각들이 데려가려고 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방학 숙제를 하면서, 이웃 누이들의 흰 허벅지를 맘껏 훔쳐볼 수 있어 좋기도 하였지만, 터실터실한 무릎이 언제나 안타까웠다. 한편, 어머니는 꾸리실 감기, 베 날기, 베 매기, 도투마리 감기, 잉아 걸기, 바디 끼우기 등 무수한 과정을 거쳐 베틀에 앉게 되었다. 내가 기억하는 베틀 부품만 해도 제법 된다. 뱁댕이, 잉앗대, 눈썹노리, 사치미, 말코, 북, 앉을개, 부테허리, 나부산대, 신나무, 눈썹끈, 바디집, 비거미…. 어머니는 소녀시절부터 익힌 대로 이들 부품을 오차 없이 조립하여 시운전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구성지게 베틀가를 부르며 ‘스르르 딱 스르르 딱’ 한 자 한 필 베를 시름없이 짜고 있었다.
작가인 내가 이 시점에 베짜기를 새삼 떠올리고 있다. 어머니의 베는 ‘한결같이’ 고왔다. 이제야 생각해보니, 날줄에 그 비밀이 숨겨져 있었던 것 같다. 날줄은 그 굵기와 올수에 따라 생냉이길쌈, 익냉이길쌈, 무삼길쌈으로 나뉘어진다. 폭당 올수가 많으면 옷감 결이 고와지는 것은 당연하다. 어머니는 이들을 11새, 7새, 5새 따위로 부르곤 했다. 새[升]는 날줄 80올을 이르는 말이고, 가장 고운 생냉이길쌈을 11새로 불렀으니, 한 폭당 날줄이 880가닥 된다는 뜻이다. 이들 날줄이 잉아를 통해 건넘수로 상하 440가닥으로 교차된다. 이 틈새로 씨줄 즉, 꾸리실이 담긴 북이 넘나들면서 교직(交織)되어 갔다. 북은 마치 작은 배가 880개 물이랑을 헤집고 지나가는 듯했다. 중년 여인의 가슴속 물결과도 같은… . 한편, 참빗같이 생긴 바디는 올 간격을 언제나 일정하게 유지하는 몫을 했다. 손놀림과 발놀림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져야 ‘올바른’ 베가 짜였다는 점도 유의한다. 한편, 바디집을 잡은 두 손의 힘이 균형을 이룰 때, 내내 일정 강도로 내리칠 때 베가 ‘한결같이’ 다져졌다는 점도 유념한다. 사실, 어머니 몰래 몇 올 베를 짜다가 이를 터득했다. 어머니는 금세 불량 부분을 찾아내었고, 나는 회초리같이 생겨먹은 뱁댕이로 종아리를 맞아야 했다. 단정하게 참빗으로 머리를 빗어 비녀를 꽂았던 어머니. 흐트러짐 없는 여인의 마음가짐으로만 가능한 작업이 베짜기일 줄이야! 하여간, 엉성하면 아무짝에도 못 쓴다. 이질적(異質的) 요소가 끼어들어도 곤란하다. 소위, 혼방(混紡)이라는 방식도 있지만, 이 또한 어우러져 ‘한올 같았음’을, ‘한결같았음’을 기억한다. 새들 가운데도 어떤 새는 여러 재료를 써서 혼방형태로 둥지를 짠다. 그렇더라도, 전체적으로 보아 일정 규칙을 지켜 탄탄한 둥지가 되어 있었다.’ (이상 본인의 수필, ‘베짜기새’의 한 단락임.)이제 다시 못다 한 ‘먼 옷’ 이야기로 돌아가자. 이번 어느 상조회사의 가짜 국산 수의 사건을 통해, 날로 문명화 되어가는 게, 황금만능만을 좇는 게 과연 바람직하냐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한평생 손수 길쌈도 한 올 하지 않고, 심지어 손수 단추 하나 달지도 않고 살아가는 우리네 여성들. 연로한 시어른들을 모시면서도 미리미리 ‘먼 옷’ 한 벌을 장만해두는 이들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큰일을 당하면, 그제야 부랴부랴 돈을 싸 들고 가서 장의사 등에서 기성품인 장례용품을 구입해다가 일을 뚝딱 해치워버리는 경향이 없지 않냐고? 한 생명이 이 세상에 왔다가 그곳으로 돌아가는 게 참말로 허망한 일인데, 삼가는 기간이나 삼가는 방식 등이 너무 졸속이라는 생각을 하여 본다. 고인의 입장이 아닌, 어디까지나 산 이의 편의에 따라 행해진다는 것을. 우리가 두루 잘 아는 바, 공자님은 어릴 적에 공동묘지 옆에서 살았다고 한다. 당신은 어릴 적부터 그 많은 장례를 보면서 자랐고, 집집마다 그 장례 행위가 다름을 보았다고 한다. 당신은 그 많은 예절 가운데 장례가 으뜸임을 알게 되었고, 장례에 관한 사항을 정리하고 통일한 것이 유교사상의 근간이라고 배운 바 있다.
이제 두서 없는 이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우리네 거의 모두는 어차피 수공예품 ‘먼 옷’ 한 벌 얻어걸리기에는 다 틀렸다. 염량세태(炎凉世態)를 보아하니, ‘수목장’이니 ‘화장’이니 하며, 죽어서도 땅 한 평 얻어걸리기에도 다 틀렸다. 그러니 살아생전 모시적삼저고리 한 벌이라도, 삼베적삼저고리 한 벌이라도 입고 지내는 게 좋겠다. 설령 그렇게 입던 옷이 해지더라도, 평소 즐겨 입던 그 옷을 ‘먼 옷’으로 삼아달라고 슬하의 자녀들한테 자주 일러두는 게 피차간 좋을 성 싶다. 이젠 참말로 하다가 하다가 별 짓들을 다 한다. 실로,죽어서도 외국산 싸구려 삼베옷을 걸치고 가야 하는 우리네 모습이 서글프기만 하다. 공자님이,염라대왕이,부처님이,하느님이 같잖아 다 웃으실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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