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곶감을 걷고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지난 해 시월 초부터 시작된 나의 감 수확과 가공은, 해가 바뀐 올 일월 중순에야 겨우 끝내게 되었다. 지난해엔 예년과 달리, 감 풍년이었기에 나의 감 작업기간도 그리 길어졌던 것이다. 나의 감 가공작업은 크게 세 갈래였다. 감 껍질을 깎아 실에 꿰어 단 후 그늘지고 통풍이 잘 되는 원두막에 곶감으로 말리는 일, 새로 산 ‘감 박피기’로 감 껍질을 깎은 후 각각 4등분하여 채반에 담은 후 자동건조기에 넣어 감말랭이로 만드는 일, 물러터진 감을 옹기항아리에 넣어 ‘감식초’를 만드는 일 등.
오늘은 한나절 원두막에 널어둔 곶감을 걷어 갈무리를 하고 있다. 내가 만든 곶감은 어디 내어놓아도 손색없으리만치, 그야말로 작품이다. 사실 곶감 만들기에 가장 중요한 요인은 날씨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마음이 아무리 급하더라도 서두르지 말고 느긋하게 기다려, 서리가 내릴 적부터 곶감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잖으면 내 농장 단골손님인 나의 넷째누님 내외분처럼 말리는 과정에서 곰팡이가 피어 죄다 버리고 만다. 언뜻 생각하기에, 내 넷째누님 내외분처럼 비교적 가을볕이 따가운 이른 때에 곶감을 만들면 더 잘 마를 것 같으나,전혀 그렇지 않다. 곶감은 일교차가 심할수록 더 잘 마르고, 더 달게 된다. 아울러, 미생물 등의 활동이 멈춤으로써 곰팡이가 피거나 썩거나 하지 않는다.
이처럼 곶감을 갈무리하면서, 곶감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유사성을 지닌 것들을 새삼스레 차례차례 더듬어보게 된다. 시래기·사과·낫·황태·오징어·고구마·바나나·온대성 수목·온탕과 냉탕... . 요컨대, 하나같이 ‘생물화학적변화’를 한껏 응용한 것들이다. 이제 이들에 관해 낱낱이 살펴보기로 하자.
시래기
시래기도 곶감과 마찬가지로,서리가 내리기 시작할 적에 엮어 말리게 된다. 얼었다가 녹았다가를 반복하면서 찬바람에 마르게 된다. 그러는 과정에서 무청은 생화학적 변화를 일으켜, 우리 인간에게 아주 유익한 성분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시래기는 무청 시절보다 철분과 칼슘이 풍부해지는 식품으로 알려져 있고, 각종 질병예방약과 치료약으로도 각광받는다. ‘얼었다가 녹았다가’가 만들어내는 조화다.
사과
사과는 그 재배적지(栽培適地)가 차츰 북쪽으로 올라간다고 하지 않던가. 예전에는 ‘대구사과’로 알려져 있었지만, 요즘은 내 고향 경북 청송의 사과를 최고로 꼽는다. 나의 신실한 애독자들께서도 자주자주 노점(露店)에서 보았을 테지만, 시중에 나온 사과는 대부분 ‘청송사과’ 또는 ‘청송꿀사과’로 속여 파는 실정이다. 산간지역이고 고도(高度)가 높은 내 고향 청송. 그곳은 일교차가 심해 숙기(熟期)에 이른 사과가 생리적으로 활동을 멈추었다가 재개하였다가 하며 육질에 ‘켜’가 거듭거듭 생긴다. 그것을 ‘착색(着色)’이라고 한다. 일교차가 심할수록 착색이 잘 된다는 거. 그렇게 되면,카로티노이드·엽록소·안토시나인 등의 색소 분해가 촉진되어 겉보기에도 태깔이 고와지지만, 생화학적 변화가 왕성하게 일어나 당도(糖度)를 더한다는 사실. 우리나라 기후가 점차 열대화하면서 사과 재배 북한계선도 차츰 북쪽으로 올라가게 될 것은 자명한 이치다.
낫
낫은 대장장이의 손길에 의해 담금질·풀림질·불림·뜨임 등 일련의 열가공을 두루 거쳐 만들어진다. 좋은 연장일수록 훌륭한 대장장이의 손에서 만들어진다는 사실. 벌건 낫을 물이나 기름에 순식간에 집어넣어 식히는 일은 담금질, 벌건 낫을 공기 가운데 그대로 내어놓아 서서히 식히는 일은 풀림질... . 연금술(鍊金術)이니 연금술사니 단련(鍛鍊)이니 하는 말들 모두가 한 자루의 낫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관련된다.
황태와 오징어
황태는 명태를 말리되, 초기에 눈[雪]을 맞혀 즉시 얼리는 게 핵심이라고 한다. 그러면 비린내가 싹 없어진다고 한다. 해서, 황태의 별칭 가운데는 ‘설태(雪太)’가 있다. 지지난해던가, 춘천에 사는 나의 유일한 글 제자 ‘강 동규 수필가’는, 내가 그의 작품을 심사하여 등단(登壇)까지 시켜 주었더니, 답례로 그곳 특산물인 황태를 부쳐온 바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소갯글을 쪽지로 함께 부쳐주었다.
‘ 선생님, 강원도 ’인제 용대리(麟蹄 龍垈里)‘ 덕장에서 말린 황태입니다. 함경북도에서 월남한 나종호 옹이 그곳에서, 지난날 함경북도에 살면서 익힌 대로 그 맛을 잊지 못해 황태를 말리기 시작했죠. (중략) 육질이 부드럽고 영양가가 뛰어나요. 밤새 글 쓰시느라 마신 술 깨우시기에 딱 좋을 듯해서요.’
오징어를 비롯한 대부분의 건어물은 짭조름한 바닷바람에 쐬어 말리는 데 비해, 황태만은 유독 내륙 산간지역에서 말리는 게 이채롭다. 사실 내가 소주 안주로 그리도 즐겨했던 마른오징어도 내륙에서는 쉬이 만들 수 없다. 오로지 짭조름한 바닷바람에, 진득거리는 해풍(海風)에, 끼룩대는 갈매기울음을 들으며 시나브로 말라가야 제 맛이다. 갯가 아낙네의 콧노래까지 묻어 있어야 진짜 오징어 맛이 나온다. 더욱이 내륙에서 말리면 파리를 비롯한 온갖 잡충들이 설치지만, 갯가에서는 그런 일이 거의 없었다. 내가 지난날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통틀어 5년여 물편에 살았던 덕분에 그 점 충분히 알고 지낸다.
고구마와 바나나
고구마는 가을날 밭에서 캔 후 이내 삶아먹으면 맛이 적다. 그러나 일정기간 두었다가 꺼내 삶아 먹으면 더 달다. 사실 대부분의 과일과 곡식이 그러하다. 농학(農學)에서는 그처럼 맛 드는 데 소요되는 기간을 ‘후숙기(後熟期)’라고 한다. 이 후숙기 내지 후숙도 광의(廣義)의 단련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후숙이 가장 두드러지는 과일은 바나나로 알려져 있다. 대개 우리가 먹는 바나나는 열대지방에서 푸르딩딩한 상태에서 딴다고 보면 된다. 바나나를 수입해 오는 과정에서 후숙이 일어난다. 그런가 하면, 거의 후숙이 일어나지 않는 과일이 있는데, 그것이 포도란다. 그러니 포도만은 줄기에 달린 채 완숙이 이루어진 과일만을 골라 따야함을 간단히 유추해낼 수 있다. 후숙은 우리네가 살아가면서 조급증을 가져서는 아니 됨을 웅변 이상으로 일러준다. 달리 말해, 세상사 모두 때가 있다는 거.
온대성 수목
온대성 수목이냐 그렇잖으면 열대성 수목이냐를 육안으로 구별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톱으로 잘라 그 단면(斷面)을 보아 나이테가 곱게 나 있으면 볼 것 없이 온대성 수목이다. 온대성 수목이라도 사계절이 뚜렷한 곳에서 자란 나무일수록 나이테가 곱다. 기온에 따라 부피성장의 정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의 상식과 달리, 임학도(林學徒)였던 우리들은 나이테가 한 해 하나가 아닌 둘이 만들어진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봄에 만들어지는 춘재(春材)와 가을에 만들어지는 추재(秋材). 앞의 것은 비교적 그 두께가 뒤의 것보다 두껍다. 봄철엔 가을철에 비해 왕성하게 비대생장을 하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동일한 수목일지라도 나이테가 주변과 이상적(異常的)으로 된 부분이 있게 되는데, 뛰어난 전문가는 나이테 하나 가지고도 기후의 역사(?)를 읽어내게 된다. 그 어느 해에 가뭄이 심했다거나 추위가 대단했다거나... . 우리가 흔히 비유적으로 쓰는 말, ‘연륜[나이테]이 쌓였다’는 말이 온갖 풍상을 겪은 수목의 나이테를 염두에 둔 말이라는 거 모르는 이는 없을 터.
온탕과 냉탕
대중목욕탕에 가면, 거의 예외 없이 온탕과 냉탕이 따로 있기 마련이다. 그 온탕과 냉탕의 기능에 관해서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알몸을 한 채로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동안 우리네 몸은 한층 단련된다는 사실.
이밖에도 내가 예로 들 수 있는 사례는 많지만, 이 즈음에서 생략한다. 자연풍(自然風)에 내맡기되, 얼리고 녹이고를 번갈아 하는 거. 어디 곶감 만들기에만 적용되는 이치이겠는가. 비닐하우스에서 속성(速成)으로 기른 채소보다도 노지(露地)에서 더디 기른 채소가 더 달큰하다는 것은 내남 없는 보편적 믿음이다.
끝으로, 내 넷째누님 내외분도 운이 닿아 이 글을 읽길 바라며, 올해에는 각종 농사를 막무가내 서두르지 말고, 제때를 제대로 지켜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이 글 맺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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