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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귀인을 위한 환상곡수필/음악 이야기 2014. 4. 15. 07:48
어느 귀인(貴人)을 위한 환상곡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어제 아침, 퇴근을 하여 다시 내 농장으로 가고자 하였다. 평소 습관대로, 승용차 시동과 동시에 F.M. 라디오를 켰다. 마침 기타가 이끄는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나왔다. 흔히, 음악에서 ‘주제’라고 일컫는 그 반복적인 리듬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그 연주곡이 끝나자, 여성 진행자는 ‘로드리고’의 ‘어느 귀인을 위한 환상곡 제 2악장 아다지오 콘 브리오’였음을 알려 주었다.
‘아, 바로 로드리고의 곡이로구나!’
사실 나는 호아킨 로드리고(Joaquin Rodrigo; 스페인; 1901~1999)에 관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지내 왔다. 그는 ‘아랑훼즈 협주곡’이란 유명한 기타 협주곡을 적은 분이다. 나는 그 ‘아랑훼즈 협주곡’ 가운데서도 제2악장을 무척 좋아해 왔다. 또, 그의 작품 가운데는 그 ‘아랑훼즈 협주곡’ 외에도 ‘ 어느 귀인을 위한 환상곡’도 있음을 알고 지냈고, 그 곡에 얽힌 이야기도 대충은 알고 지내왔다. 그렇지만 어제 승용차에서 들은 그 2악장이 그렇게 감미로운 곡인지까지는 모르고 지냈다.
오늘 다시금 내 자리인 어느 연수원 사감실에 앉아 있다. 컴퓨터를 통해 그 곡 제2악장을 거듭거듭 흘려놓는다. 그리고는 그 곡에 얽힌 이야기까지 다시 꼼꼼하게 읽게 된다. 그 곡에 관한 이야기는 잠시 미루어 두고, 로드리고의 생애에 관한 사항부터 독자님들께 전해드리고자 한다.
호아킨 로드리고. 그는 스페인 발렌시아 지방의 ‘사군토’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는 3세 때 디프테리아를 앓으면서 시력을 거의 잃어버린다. 그러나 자애로운 그의 어머니가 음악 쪽으로 그를 인도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앞 못 보는 소경이었음에도, 불굴의 정신으로 음악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좋은 스승과 좋은 학교를 찾아 이곳 저곳을 두루 다녔다. 그리고 여러 장르의 음악을 섭렵했다. 그가 39세가 되던 해 1901년, 수도 마드리드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거리 ‘아랑훼즈’에 있는 왕궁을 묘사한 곡을 발표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기타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아랑훼즈 협주곡’이다. 한번 생각해보라. 앞을 볼 수 없는 이가 왕궁의 아름다운 풍광을 시적 정취로 그렇게 묘사했다니 놀랍지 아니한가. 그의 음악세계는,스페인의 색채를 신고전주의적 양식으로 소화한 것으로 크게 평가 받는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그가 이 곡을 기타리스트 산츠(Regino Sainz)에게 헌정코자 적었다는 점이다.
이제 잠시 미루어두었던 ‘어느 귀인을 위한 환상곡(Fantasia para un Gentilhombre)’ 이야기를 마저 들려드려야겠다. 그가 61세가 되던 1954년,그는 같은 나라 출신이며 당대 최고의 기타리스트이고 작곡가였던 안드레스 세고비아(Andres Segovia, 1893~1987)에게 헌정코자 그 곡을 적었다고 알려진다. 하지만, 작품명에 나오는 ‘귀인’은 정작 세고비아가 아닌 이였단다. 그 귀인이란, 바로 가스파르 산츠(Gaspar Sanz)라고 알려져 있다. 산츠는 17세기 에스파냐(스페인의 옛 이름)의 기타연주자이자 작곡가였단다. 산츠가 작곡한 그 유명한 기타 곡은 ‘에스파뇨레타(Espanoleta)’이며, 이를 풀이하면 ‘에스파냐풍(- 風)’ 또는 ‘에스파냐풍으로’가 된다고 한다. 로드리고는 평소 산츠를 너무도 존경했고, 그의 곡 ‘에스파뇨레타’도 무척 좋아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그 곡을 교묘히 원용(援用)하여 작곡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어느 귀인을 위한 환상곡’이다. 4악장으로 구성된 그 곡. 특히 제2악장은 산츠의 그 곡에 흐르는 주제를 그대로 쓰게 된다. 심지어 제2악장의 부제(副題)에도 ‘Espanoleta’라는 말이 그대로 쓰여 있다. 이 ‘어느 귀인을 위한 환상곡’은, 위에서 소개한 ‘아랑훼즈 협주곡’과 더불어 로드리고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로드리고는 이 곡도 남한테 헌정하기 위해 적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대상이 1차적으로는 세고비아였지만, 2차적으로는 이미 수 세기 전 자신과 같은 나라에서 살다가 간 산츠였다. 나는 자료를 통해, 로드리고가 이들 두 곡 외에도 곡을 적을 때마다 어느 특정인을 그리워했으며 그를 염두에 두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어제 퇴근길 승용차에서 로드리고의 ‘어느 귀인을 위한 환상곡 제2악장’을 들었다. 오늘 나는 다시 그 곡을 들으면서, 그 제2악장이 산츠의 ‘에스파뇨레타’가 주된 주제임을 알게 되었다. ‘에스파뇨레타’와 나폴리 기병대의 팡파르가 연주되고, 시칠리아 무곡을 스페인풍의 궁정무곡으로 바꾼 악장임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참으로 감미로운 곡이다. 내가, 수필작가인 내가 그저 이 감미로운 음악만을 소개코자 이렇듯 글을 적고 있었을 리 만무하다. 그 누구한테 이 곡을 음악선물로 드리는 한편, 그와 더불어 문학인의 길을 나란히 걸어가고픈 욕심이 생겨나기에 이런 글을 적고 있었노라고. 그러한데 둘러보아도 없다. 이럴 때일수록 참으로 외롭단 생각을 하게 된다. 사실 몇 분 아니 되지만, 나한테는 e메일 수신자들이 계신다. 나는 그분들께 거의 매일 새벽 신작(新作)과 함께 나의 일상을 전한다. 하지만, 그분들은 하나같이 언제부터인가 꿀먹은 벙어리들이 되어버렸다. 사실 나의 잘못이 크다. 나는 그분들을 질식시키고 말았던 게 분명하다. 매일매일 쏟아붓는 나의 수필폭탄(?)에 그분들마저 지쳐버렸을 테니까. 사실 내가 생각해보아도 나는 아주 별난 사람이다. 대한민국의 수필작가 가운데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사람일 것이다. 1001일 야화의 주인공 세헤레자데도 아니면서, 매일매일 한 개의 알을 낳는 ‘레그호온’ 닭도 아니면서… . 그보다 내가 저지른 더 큰 잘못은, 나는 여태 생존해 있는 그 누구한테 바치고자 적은 글이 거의 없다는 사실. 사실은 편편의 글을 적을 적마다 특정인에게 최초로 보여드리고 싶어 적기는 하지만… . 그러기에 내 몇 아니 되시는 e메일 수신자들께서도 앞발뒷발 다 드셨을 게 아니겠는가.
나는 이제 나직하게 탄식한다.
‘나는 언제쯤에나 ‘어느 귀인을 위한 수필’이라는 걸 세상에 선보일 수 있을까?’
작가의 말)
내 곁에 열정적인 수필작가를 오래 두지 못한 걸 크게 반성한다. 사실 한,둘 계시기도 했지만, 나는 그분들을 제대로 모시지 못했다. 수필폭탄(?)으로 그분들을 온통 질리게 했을 것이다. 아마 이 글을 읽게 될 분들도 대체로 그러하리라. 만약, 더 이상 e메일 따위를 부치지 말라고 하는 분 계시면, 귀의(歸意) 대로 할 용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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