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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는 다들 이뻤을까수필/신작 2015. 9. 8. 00:28
왕비는 다들 이뻤을까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사극(史劇)은 언제 보아도 흥미롭다. 다들 그런 생각을 하겠지만, 나는 사극을 통해 몇 가지 분명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선, 역사는 반복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것은 ‘랑데부’와도 통한다. 다음은, 인간의 권력욕과 신분상승욕이 빚어내는 비극을 보게 된다. 그 어느 영웅도 영원히 살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영원하리라고 믿는 듯 어리석음을 저지른 이들의 비참한 뒤끝도 종종 보게 된다. 그 유명한 말,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을 제때 깨닫지 못한 이들의 행태. 다다음은, 자신의 영달(榮達)을 위해 애지중지하는 어린 딸을 왕비로 간택케 하는 등 조선조 여러 애비들의 비정한(?) 모습도 보게 된다. 왕궁에 들어간 어리디 어린 그들의 딸들이 마냥 행복했던 것은 아닌 듯싶다. 그들 딸들은 정쟁(政爭)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양이 된 예도 참으로 많았다.
문득, ‘왕비로 뽑힌 아가씨가 다들 이뻤을까?’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그 해답은 ‘글쎄올시다.’다. 정략결혼 등으로 인해 얼굴이나 됨됨이보다는 가문과 가문과 결합이 더 중시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몇몇 예를 들어봐도 금세 알 수 있다. 세종대왕의 비(妃)인 소헌왕후(昭憲王后)의 경우, 살짝곰보였다는 말이 전해진다. 소헌왕후의 후손들인 내 고향 경북 청송(靑松)에 본관을 둔 ‘청송 심씨’들이 내 이야기에 명예훼손 등 소송 걸어오더라도 도리 없다. 당시 세종대왕이 15세 나이였고 세자로 책봉되기도 전인 때였다. 문하시중 심덕부(沈德符)의 손녀이고, 영의정 심온(沈溫)의 딸인 청송 심씨 가문의 심양(沈孃)의 나이는 고작 13세였다. 내가 딸아이 둘을 키워봐서 잘 아는 일인데, 아이들의 얼굴은 커갈수록 그 윤곽은 비교적 그대로이되, 조금씩 바뀌게 된다. 즉, 어릴 적에 이쁘다 하여 나이가 들어가도 그대로 이쁘다는 보장이 없다는 이야기. 그러니 그 어린 나이에 왕비나 세자빈으로 뽑았다는 것은, 조선조 왕비나 세자빈 간택 기준이 단지 얼굴 생김새만이 아니었음을 반증한다. 사도세자(思悼世子) 세자빈이었으며 우리의 문학사(文學史)에도 길이 남을 궁중문학 <<(閑中錄(한중록)>>을 적은 혜경궁 홍씨의 경우, 고작 10세 나이에 동갑내기인 사도세자의 배필로 뽑혀 궁궐로 들어가게 된다. 마찬가지로 얼굴만 보고 뽑힌 게 아니었을 거란 이야기다. 왕비로 뽑힌 여성 가운데 가장 추녀(醜女)는 아무래도 중국 제나라 시절의 종리춘(種離春)일 테고, 왕비로 뽑힌 여성 가운데 가장 이야기를 잘 지어낸 이는, 페르시아의 폭군(暴君) ‘샤리아르’ 곁에서 천일야화(千一夜話)를 들려주어 감화시킨 세헤레자데(Scheherzade)왕비일 것이다.
이제 나는 왕비나 세자빈으로 간택된 여성들 가운데 그 얼굴 생김새와 상관없이, 현명했거나 어질었거나 불행했던 이들 몇에 관해 간략간략 소개코자 한다.
1. 소헌왕후
위에서 아주 간략하게 소개했지만, 그분은 13세 어린 나이에 궁궐에 들어가게 된다. 당시 세종대왕은 세자로 책봉되지도 않은 15세 대군(大君)의 지위에 지나지 않았다. 시어른인 태종 이방원(李芳遠)의 성정(性情)은 너무도 잘 알려진 대로였다. 소헌왕후는 불행을 맞게 된다. 중국에서 돌아온 백부(伯父)가 반역질했다는 이유로, 백부의 반역질에 부친(父親)도 가담했다는 이유로, 백부와 부친은 즉시 죽임을 당했고, 모친은 관노(官奴)가 되었다고 한다. 소헌왕후도 세자빈의 지위를 잃을 뻔했으나, 아이를 쑥쑥 잘 낳는다는 이유로 시어른인 태종으로부터 귀여움을 받아 세자빈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소헌왕후는 8남 2녀를 낳았다. 게다가 성품이 온화하여 총 9명(본인 포함)이나 되는 세종의 부인들간에 이른바 내명부(內命婦)의 기강을 잘 유지했다고 한다. 어질어서 투기(妬忌)를 결코 않았다는 거 아닌가. 총 22명의 배다른 자녀들도 잘 건사했을 터. 역사학자들 가운데 몇몇은 소헌왕후의 내조(內助)에 힘입어 세종대왕이 성군(聖君)이 되었을 거라고까지 할만치.
2. 혜경궁 홍씨
편의상 ‘네이버 한국여성문인사전’의 내용을 일부 수정 후 베껴다 붙이기로 한다.
헌경왕후(獻敬王后), 경의왕후(敬懿王后)로 알려짐.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正祖)의 어머니이며, 본관은 풍산(豊山)임. 1735(영조 11)년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로 태어나 10세가 되던 1744년에 사도세자(思悼世子)로 일컬어지는 동갑내기 장헌세자(莊獻世子)의 빈(嬪)으로 책봉되었음. 1762년 사도세자가 죽은 뒤 혜빈(惠嬪)에 추서되었음. 1776년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자, 궁호가 혜경으로 올랐고 1899년 사도세자가 장조(莊祖)로 추존됨에 따라 경의왕후(敬懿王后)에 추존되었음. 1815(순조 15)년에 81세로 별세함.
당시 왕후의 아버지와 작은아버지 홍인한(洪麟漢)은 외척이면서도 세자의 살해를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던 까닭에 경의왕후는 세자의 참담한 운명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음. 후에 1795년 남편인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참사를 중심으로 자신의 한 많은 일생을 자서전적인 사소설체로 적은 <<閑中錄>>을 남겼음. 채제공(蔡濟恭)에게 보낸 한글 편지가 전하는데, 이 편지에는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으로 옮길 때 내린 봉서라는 해설이 붙어 있음.
3. 종리춘((種離春)
춘추전국시대 제나라의 ‘무염읍’에는 성이 ‘종리’이고 이름이 ‘춘’인 추녀가 살고 있었다. 얼마나 못 생겼느냐 하면, 머리와 눈은 절구처럼 움푹 들어갔고 손가락 발가락은 길고 울퉁불퉁했으며 들창코에다 목젖은 남자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목은 두꺼웠고 머리숱이 별로 없었으며 허리는 굽었고 피부는 칠흑처럼 새까맣기만 하였다. 이와 같은 종리춘의 몰골을 풍자하여 사람들은 추녀를 보면 ‘무염녀’라 일컬었다.
종리춘은 세간의 조롱을 받으며 나이 사십에도 시집을 가지 못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지혜가 남달랐던 그녀는 황당하게도 황후가 되겠다는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그녀는 어느 날 제나라의 도성에 들어가 수문장에게 청했다 .
“ 저는 저 시골 무염읍에 사는 여자이옵니다. 대왕을 뵈옵고 긴히 드릴 말씀이 있사오니, 제발 대왕을 알현케 해주십시오.”
옥신각신 끝에 결국은 선왕(宣王) 앞에 서게 되었다.
그날도 주색에 빠져 해롱대던 선왕이 큰소리로 다그쳤다.
“보아하니, 촌뜨기 여자 같고, 너무도 못생겨 아직 시집도 못 갔을 것 같은데, 어인 일로 감히 어전에?”
그러자 종리춘이 당당하게 말했다.
“저는 별 다른 재주는 없으나, 시늉으로 뜻을 전하는 법은 조금 압니다. 제가 시늉하는 몇 가지 수수께끼를 푸신다면, 곧바로 제 목을 베셔도 좋습니다.”
이에, 임금은 어디 한번 시늉을 지어보라고 하였다.
종리춘은 곧바로 눈을 치켜뜨고 그 못생긴 입을 크게 벌려 이빨을 드러낸 다음, ‘하하하’ 미치광이처럼 크게 웃으며 두 손을 두세 번 치켜들었다가 내리면서 무릎을 세게 쳤다. 그리고는 두 번 외쳤다.
“위태롭구나. 위태롭구나.”
종리춘의 시늉에 관해 임금은 물론 중신들도 알지 못했다. 임금은 도대체 무슨 뜻이냐고 묻게 된다.
“눈을 치켜뜬 것은 이 나라에 적이 쳐들어와 봉화(烽火)가 타오른 걸 본다는 뜻입니다. 이빨을 보인 것은 올바른 말을 하는 신하들의 입을 막는 폐하의 입을 벌준다는 뜻입니다. 두 손을 번쩍 들어올려 ‘훠이훠이’ 한 것은 입에 발린 아첨이나 하는 신하들을 물리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무릎을 내리친 것은 매일같이 잔치나 벌이는 이 별궁 ‘설궁(雪宮)’을 무너뜨린다는 뜻입니다."
선왕은 화가 잔뜩 나서 종리춘의 목을 당장 베라고 명했으나, 그녀는 눈 하나 깜작하지 않고 조곤조곤 설명했다. 다른 나라 임금들은 나라 다스리는 일에 힘을 써서 나날 부강해져 제나라를 위협하고 있는데, 강성했던 제나라는 지난 날만 믿고 선왕이 매일 잔치나 벌이고 간신들의 말만 듣는 바람에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다고 고해 바쳤다.
그제야 선왕이 정신이 번쩍 들어 종리춘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선왕의 눈에 비친 종리춘이 이 세상 어느 여성보다 아름답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선왕은 꿇어앉은 종리춘한테 다가가 일으켜 세웠다.
“ 그대가 아니었다면, 영영 내 허물을 모를 뻔 했소. 나와 함께 수레를 타고 궁으로 갑시다. 나의 배필이 되어주오.”
정작 종리춘은 사양했다.
“폐하, 제 말씀은 끝까지 아니 들으시고 어찌 제 몸만 왕비로 삼으시려 하십니까? 먼저 나라 다스리시는 일을 잘 하시고 널리 인재를 뽑으십시오. 맹자(孟子)님도 꼭 뽑으셔야겠습니다.”
그리하여 종리춘은 왕비가 되었고, 종리춘의 추천으로 맹자도 뽑혔다고 한다.
땡잡은 이는 종리춘이 아니라, 선왕이었다. 아니, 제나라였다.
4. 세헤레자데
내가 이미 적은 ‘세헤레자데를 흠모함’이란 수필작품에서 부분 부분 떼다 붙이는 것으로 마감코자 한다.
‘(상략)그녀는 참으로 존경스럽다. 다들 알다시피, 그녀는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다. 1001일간 즉, 약 3년간에 걸쳐 하루도 빠짐없이 이야기를 왕에게 들려주었다니! 물론, 그것이 이미 아라비아 지방에 널리 퍼져 있던 민화(民話)였다고 하나, 그걸 수집하여 머릿속에 담아둔 것도 놀랍기만 하다. 나아가, 듣고 있던 샤리아르 왕이 재미를 느끼지 못하였다면, 날이 새자마자 그 많은 ‘하룻밤 왕비’와 마찬가지로 목이 달아났을 텐데… . 더군다나, 그녀의 기지(奇智)는 여간 신비롭지가 않다. 하나의 이야깃거리로 완급(緩急)을 조절하여, 사형에 처해질 새벽녘까지 왕의 품에서 재잘재잘 끌고 갔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 결말을 알려주지 않고 다음날, 또 다음날로 넘겼다는 것은 더욱 놀랍다. 즉, 여운(餘韻)을 남김으로써 왕의 마음을 사로잡아 나갔다는 말이다. (중략)
세헤레자데라는 인물에 관해 소개하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자. 그녀는 재상의 큰딸이었다. 재상은 또 이번엔 어느 처녀를 왕한테 제물(祭物)로 바쳐야 하나 큰 고민에 빠져 있었다. 이미 많은 백성이, 특히 딸 가진 어버이들이 폭정에 시달려 외국으로 탈출한 상태였다. 폭군 ‘샤리아르’가 본디는 폭군이 아니었다. 어느 날 사냥터에서 돌아온 왕은, 못 볼 걸 보고 말았다. 요조숙녀 같던 왕비가 흑인노예와 놀아나는 걸 보고,시쳇말로 훽 돌아 버렸다. 그 길로 여자를 증오하게 되었다. 처녀를 불러들여 하룻밤을 지낸 다음, 목을 베곤 했다. 그러한 가운데 재상의 큰딸 세헤레자데는 아버지를 설득했다.
“아버지, 고민하지 마세요. 이 딸이 갈 게요. 설마하니 죽어 나오기야 하겠어요?”
세헤레자데는 이처럼 대담함과 지혜를 지닌 처녀였다. 그녀 여동생 ‘둔야자드’는 언니를 굳
게 믿었다. 세헤레자데는 동생 둔야자드한테 미리 계획을 말했다. 왕궁에 들어간 세헤레자데는 왕
에게 간청했다. 동생을 한번만 만나게 해주십사고. 왕은 그까짓 정도의 청을 거절할 것은 없다고 쾌
히 승낙했다. 세헤레자데는 동생으로 하여금 왕한테 흥미로운 사실을 흘리게 했다.
“제 언니는요, 옛날 이야기를 좔좔 꿰고 있어요. 언니한테 조르기만 하면 흥미진진한 이야기 다
들으실 수 있을 걸요.”
이 부분도 작가인 내가 감탄하는 부분이다. 세헤레자데는 자신이 아닌, 남의 입을 통해 진실을 전함으로써 그 효과를 극대화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왕으로 하여금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고, 끊어질 듯 이어진 1001일간의 베개맡 이야기를 매일매일 이어나갔다. 목숨이 달아날 듯 이어진 1001일. 아침이면, "오늘은 여기까지에요. 제2부는 내일 밤 잠자리에서 듣기로 해요. Oh my baby!" 했다. 상상해보면, 기가 막힌 연속극이었다. (중략)
1000일이 되던 밤, 샤리아르 왕은 세헤레자데의 재능과 지식 과 언변에, 요즘 흔히 하는 말로, 감동먹게 되었다. 회개하고 악법을 폐하고 그녀를 왕비로 맞아들이고 선정을 베풀게 되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 참, 마지막 하루 1001일째 이야기는 왕과 왕비가 된 세헤레자데 자신들의 이야기로 꾸며져 있다고 들었다.(하략)
제법 분량 넘치는 예화(例話) 총정리해볼 차례다. 위 여인들 공히 얼굴이 이뻐서 왕비가 되었다기보다는 현명하고 지혜로운 여인들이었다는 사실.
* 이 글은 본인이 이미 적은 ‘세헤레자데를 흠모함’과 곁들여 읽으시면 좋습니다. 하이퍼 링크 되어 있습니다.
* 이 글은 본인의 블로그, 이슬아지 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한국디지털도서관 본인의 서재,
한국디지털도서관 윤근택 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본인의 카페, 이슬아지 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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