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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 수필가가 쓰는 미술 이야기(7)수필/미술 이야기 2014. 4. 15. 09:25
농부 수필가가 쓰는 미술 이야기(7)
- ‘현대미술’의 이단자(異端者)-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우선 밝혀둘 게 있다. 내가 새롭게 추구하는, 또 하나의 수필 형태를 두고, ‘꼴라주(collage) 기법의 수필’이라고 이 연재물 제2화에서 이미 강조한 바 있다. 수필문단 경력이 25년째 되며, 쉼 없이 글을 적어온 나. 그러니 이젠 윤아무개 수필가가 아무렇게나 휘갈겨도 그것은 수필이라고 받아들여야 할 줄로 안다. 정작 내가 어떤 제재나 어떤 소재를 글감으로 챙기려 들면, 이미 다른 이들이 다 써먹어버렸다는 걸 알게 될 때가 많다. 그럴 적마다 막막해지는 게 사실이다. 내가, 그들이 썼던 재료를 다시 쓰더라도 그 글을 능가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될 때에 느끼는 막막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바로 이러한 때에 ‘현대미술의 이단자’가 문득 떠오른다. 첫 줄에서도 밝혔듯, 나는 한 편의 글을 쓰는 동안 굳이 내가 직접 처음부터 끝까지 나의 글로 채울 생각도 이젠 없어져 버렸다. 그것이 곧 ‘꼴라주 기법의 수필’의 핵심이다. 다음은 어느 전문가의 글을 ‘꼴라주’ 한 것이다. 이는 꼴라주이기도 하지만, 뒤에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레디 메이드(ready-made)’이기도 하다.
“그 땐 정말 분통이 터졌다. 약속을 그렇게 쉽게 져버리다니. 창작의 자유가 훼손당한 건 둘째였다. 전시회의 기본 취지는 참가비만 내면 누구나 전시를 허용한다는 것이었다. 참가비도 아주 낮게 잡았다. 미술에 새로운 자유의 물결을 불어넣기 위한 시도였다. 새로운 시대를 열자며 했던 숱한 다짐들이 이슬처럼 흩어졌다. 전시회 준비위원인 내 작품의 전시가 거부될 줄이야.
나름 고심을 한 작품이었다. 일단 남자 화장실 소변기를 작품의 소재로 선택했다. 미술에 붙어있는 아름다울 미를 떼고 싶었다. 갈팡질팡하는 고뇌와 번민에서 예술이 비롯되건만, 아름다움에 대한 미술의 과도한 집착이 싫었다. 미술가는 미장이가 아니라고 외치고 싶었다. 그렇게 세상을 뒤집고 싶었다. 그래서 가게에서 산 소변기를 집으로 가지고 와서 뒤집었다. 물구나무 선 소변기. 역류 형 소변기다. 제목은 자연스레 뒤따랐다. 샘. 가명으로 샘터에 이름을 적었다. 그리고 참가비를 동봉해 전시회 주최 사무실로 보냈다. 1917년의 일이었다.
작품은 전시가 거부되었다. 그리고 사진만 남긴 채 사라졌다. 이 작품이 부활한 것은 내 공이라기보다는 후배들 덕이다. 후배 예술가들이 샘을 흉내 내 유사한 작품을 만들고 후배 비평가들이 그런 현상에 대해 갑론을박을 벌인 탓이다. 그 덕에 샘의 명성은 높아가 복각되었고 미술관에 전시되었다. 마르셀 뒤샹이라는 내 이름은 역사에 남았다. 그러므로 부활한 까닭을 굳이 알고 싶다면 그들에게 물어보기 바란다. 나는 생애 대부분을 침묵과 체스로 보냈고, 이미 지상을 떠났다.“
부활만 했는가. 슈퍼스타가 되었다. 20세기 전반의 슈퍼스타가 피카소라면, 후반의 슈퍼스타는 뒤샹이다. 미술계뿐만 아니라 학계의 반응도 뜨겁다. 숱한 연구 논문들이 뒤샹을 향해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샘>이 놓여있다.
<샘>은 모든 것이 예술이 될 수 있는 촉매 구실을 하였다. 변기가 예술이 될 수 있다면 망치, 티끌, 꽃가루, 쓰레기, 변도 예술이 될 수 있다. 의미를 부여하고 개념을 심어주고 제목을 달면 된다. 무엇을 만드느냐보다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더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왜 티끌을 모아 접착제로 붙여 산처럼 쌓아놓은 작품을 만드셨습니까? 티끌모아 태산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요. 뻔하고 진부하다. 졸작으로 평가받는다. 코끼리 똥을 경단 모양으로 만들고 거기에 쇠사슬을 두른 작품을 왜 만드셨습니까?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끌려온 흑인들의 아픔을 표현하기 위해서입니다. 글쎄. 그럴 듯하네. 의견은 갈리지만, 그래도 제법 작품 대우를 받는다. 작가가 적절한 개념을 부여하고 감상자들이 그럴듯하게 해석할 수 있다면, 그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다. 도전하라.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라. 그런 삶이 예술이다. - 이상 김진엽(서울대 인문대 미학과 교수)의 <<현대미술산책>> 글에서 따옴.
정작 내가 할 이야기가 다 사라져 버렸다. 바로 ‘다다이즘’의 창시자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프랑스 태생 미국 국적,1887~1968)’에 관한 이야기다. 앞의 인용부는 뒤샹 본인의 말이며, 뒷 부분은 필자인 김집엽 교수의 말이다. 독자님들께도 위의 ‘꼴라주’를 통해 뒤샹이 추구했던 미술세계가 어떠했는지 짐작하실 수가 있으리라. 한마디로, 그는 골 때리는 작가였던 셈이다. 어느 곳에서 남자변기를 하나 떼다가 뒤집어 놓고, 출품자 이름을 가명으로 써놓은 것에 불과했다. 또 한번은 ‘모나리자’ 사진에다 수염을 그린 후 그 그림에다 ‘L.H.O.O.Q. – R.Mutt.1917’이란 서명을 해서 제출한 바도 있다. ‘L.H.O.O.Q. ‘는 ‘그녀는 엉덩이가 뜨겁다.’의 약칭 작품명이며, ‘R.Mutt.1917’는 가명으로 쓴 출품자명과 연도 표기다. 물론 당시는 툴품 자체가 퇴짜를 받았음을 위 인용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요컨대, 그는 기존의 모든 질서와 고정관념을 모두 부셔버렸다. 그가 추구한 미술세계를, ‘레디 메이드(ready –maded; 기성품을 활용한 작품)’라고 한다.
다다이즘이란, ‘다다(Dada)’에서 온 말로 ‘어린아이들이 타는 목마’를 일컫기도 하지만, 독일어로 ‘아무 의미 없음’을 이르기도 한단다. 1차 대전을 겪은 후 작가들이 박해가 없는 중립국 스위스에 모여 팀을 결성한 후 반문명,반질서,반전통 등을 표방하고 그러한 사조(思潮)를 잠시 잠깐 만들어냈다고 한다.
뒤샹을 두고 이렇게 말하는 미술 평론가도 있다.
“양자(陽子)역학이 고전 물리학을 죽였고, 니이체가 신을 죽였고, 뒤샹이 미(美)를 죽였다. 뒤샹은 미를 죽이는 대신 의미를 살렸다.”
즉, 뒤샹은 오브제(objet)에 의미를 부여했다는 말이다. 물론 그의 대표작은 <샘>이다. 그 <샘>은 어느 화장실에서 뜯어다가 뒤집어 전시했던,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전시하려다 거절당한 남자변기에 불과했음을 재차 이야기한다.
내가 ‘현대미술의 이단자’인 뒤샹을 통해 하고자 하는 말이 진짜 무엇일까? 한마디로, “다 집어치워.”다. 수필가라고 하는 이들, 당신네들도 이젠 그 틀에 박힌 글 다 집어치우라. 비평가라고 하는 이들, 당신들도 이젠 헛소리 다 집어치우라.
굳이 뒤샹의 예를 들 것도 없다. ‘비디오 아트’의 대가였던 고 백남준 선생이 아주 적절한 말을 남겼다. 그분은 한창 잘 나갈 때에 외국 언론과 인터뷰에서 이 말을 했다.
“ Art is just fraud( 예술은 사기다). 그 누구도 하지 않았던 것을 그냥 하기만 하면 된다.”
나도 한마디 하고 끝내자.
“예술은 코에 걸면 코걸이요, 귀에 걸면 귀고리다.”
독자 여러분, 됐습니까?
(다음 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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