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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 수필가가 쓰는 미술 이야기(13)수필/미술 이야기 2014. 4. 17. 14:59
농부 수필가가 쓰는 미술 이야기(13)
- 대량학살을 고발한 작가-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그는 프랑스 공산당원이었으며, 미국과 나치 정권 등에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전쟁으로 인한 대량학살을 고발하는 그림을 그렸다. 그는 자신보다 135년 전 세상에 태어난,자신의 조국 선배 화가인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스페인,1746~1828)’의 그림을 본따서 어떤 대학살에 관한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고야가 그린 그 그림은, <<The Third of May(‘1808년 5월 3일’라고 번역하기도 한다.)>>다. 나폴레옹 군사들이 자신의 조국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젊은이들을 대량 학살한 사건을 실감나도록 그린 그림이다. 아무튼, 이 글의 주인공은 그 그림을 거의 본따서 어떤 대학살 그림을 그렸다. 구도상, 학살자들이 화폭 우측에 서 있고 피해자들이 좌측에 서 있는 등 거의 판박이 같다. 그의 어떤 대학살은, 자신과 엇비슷하게 태어난 ‘마네(E’douard Marnet,프랑스 1832~1883)의 그림에서도 영감을 얻어 그린 그림이기도 하다. 마네가 그린 그 그림은,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1867년작>>이다. 작품 속 그는 멕시코 황제로 임명되어 그 나라를 통치하던 오스트리아인을 일컫는다. 멕시코의 군인들이 그에게 총구를 겨누고 처형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 글 주인공인 그는 프랑스에서 한평생을 살았으며, ‘조르주 브라크(Gerorges Braque, 프랑스, 1882~1962)’와 같은 화실(畵室)을 썼던 이다. 브라크는 나무무늬 등을 살아있는 듯 기차게 그렸으며, 오브제(objet)의 빛과 색을 그대로 재현해 내는데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브라크가 그린 그림들은 마치 동전의 부조(浮彫)처럼 느끼게 하며, 잘 닦은 스텐레스 냄비에서 생겨난 얼룩처럼도 느끼게 한다. 이를테면, 브라크의 그림은 그림이되, 2차원이 아닌 3차원 즉, 입체감을 느끼게 한다. 그게 바로 큐비즘(입체파)의 실체다. 이러한 브라크와 이 글 주인공은 같은 화실에서 그림을 그렸으니, 당연히 서로 영향을 끼쳐 큐비즘을 열게 되었으리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이 정도 뜸을 들인 데다가 이 연재물을 이미 12화까지 적어왔으니, 하마나 하마나 기다렸을 독자님들께서는 이 글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금세 눈치챘을 것도 같다. 그가 바로 ‘피카소(Pablo Ruiz y Picasso, 스페인, 1881~1973)’다. 그의 생애와 작품세계에 관해서는 문외한인 내가 더 이상 이야기할 것도 없다. 그러니 위에서 소개한 그 어떤 대학살과 또 다른 그의 대학살 작품에 관해서만 집중 조명해보기로 한다.
위에서 소개한 작품은 바로 <<Massacre in Korea(한국에서 대학살)>>이다. 당시 그는 프랑스 공산당원 신분이었고, 공산당이 반미 선전을 위해 작품을 의뢰해서 그린 그림이다. 사실 그는 ‘미술치료’란 수업을 듣고 발표 차례를 기다리던 중 한국전 소식을 접하게 된다. 1951년,황해도 신천군 양민 3만 5천명을 그 누구의 소행이지는 모르지만, 대학살했다는 소식이었던 것이다. 그는 곧바로 그림을 그렸다. 화폭의 우측에는 무장한 군인들이 총부리를 겨누는 모습을, 화폭 좌측에는 발가벗긴 아낙네들과 철모르고 노는 어린아이 둘이 거의 무채색에 가깝도록 그렸다. 발가벗긴 임신부들과 철갑을 두르고 총칼을 든 병사들이 아주 대조적이다. 그 그림은 구상화(具象化)에 가까우리만치 사실적이다. 사실 그는 한국전에 참전한 바도 없지만, 미국이 한국전에 간여한 데 관해 비판적이었다고 한다. 이 그림에 관해 1980년대까지 한국 정부는 ‘쉬쉬’ 하였으며, 반입금지를 하였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정부 관계자들은 반미 성향의 그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란다. 이 그림은 나무판 110cm X 210cm에 그려져 있고, 현재는 파리의 피카소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한국의 비극적 상황은 입체파의 거장 피카소의 마음도 아프게 한 셈이다.
그런가 하면, 그는 또 다른 대학살 그림을 그렸다. 그 그림이 진정한 그의 데뷔작이며 대표작이기까지 하다. 바로 <<Guernica(게르니카)>>가 그것이다. 그 그림을 그리게 된 것도 아이러니다. 때마침 파리에서는 파리만국박람회가 열리게 되었다. 그의 조국 에스파냐 정부에서는 인기작가인 그에게 박람회 에스파냐관(-館)에 붙일 걸개그림(벽화)을 그려줄 것을 요청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전세계민들한테 자기네 나라를 홍보하는 성격의 그림이었다. 그런데 그는 엉뚱하게도, 조국의 요구와는 반대 성격의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그 그림의 역사적 배경은 이렇다. 1937년, 프랑스에 있던 그는 조국 스페인의 비보(悲報)를 접하게 된다. 내전이 발발하자, 프랑코 총통이 독일 나치에 군사적 도움을 요청하였고, 나치는 에스파냐 북부 바스카 지방의 작은 도시 게르니카에 무자비하게 포탄을 퍼부어대었다. 그리하여 무고한 양민들이 떼죽임을 당한다. 그는 얼마나 슬퍼했겠는가. 그 상황을 캔버스에 담게 되었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커다란 종이에다 소·말·사람·눈알[안구]·총·칼·철모 등등의 작은 그림을 가위로 오려다 무수히 붙인 듯한 그림이다. 작은 그림을 오리되, 아직 손조차 둔해서 한쪽 귀퉁이를 베어버리고서 오려 붙인 그림 같다. 어떻게 보면, 아직도 그림 그리기를 제대로 못 익힌 유아(乳兒)들이 그린 듯한 그림. 바로 그게 그 유명한 <<게르니카>>라는 추상화다. 온갖 이야기를, 일련의 비극적 상황을 캔버스 한 폭에다 다 그려 넣은 것이다.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이렇게 이야기한다. 육체에서 떨어져 나온 눈[目]은 폭탄 혹은 희망과 자유를 뜻하는 것이고, 상처받은 말[馬]는 또 이러저러한 걸 뜻하며… 무채색은 암울한 분위기를 나타내며… 추상화된 형태와 신화적 상징주의와 서사적 증거가 변모한 것이며 등등. 그 많은 평론가들의 의견과 달리, 내가 그 그림을 아동화처럼 여긴다는 점은 꽤나 중요하다. 독자님들께서는 그 이유를 곧 알게 될 것이다.
아무튼,그는 대량학살에 관한 그림으로 유명해진 작가다. 그 하나는 자기 조국 스페인의 내전으로 말미암아, 또 하나는 대한민국 한국전으로 인해 얻은 작품이다. 꼭히 말은 않았으나, 그는 전쟁의 참화를 그렇게 그림으로써, 평화와 자유에 대한 갈망을 그림으로써 나타낸 것만은 확실하다. 그리고 뜨거운 조국애를 화폭에 담은 것도 확실하다. 그는 평화주의자였던 셈이다.
그 걸작 <<게르니카>>는 온 유럽을 순회하며 전시되었고, 그 유명세는 대단했다. 그의 조국 에스파냐에서 그 그림을 국내에 들여 보내라고 요청하였으나, 그는 단호히 거절했다. 프랑코 총통이 살아 있는 한, 조국의 민주주의와 자유가 회복되지 않은 한 그리 할 수 없다고 고집 부렸다. 대신, 그의 <<게르니카>>는 미국 ‘뉴욕 근대미술관’에 무기한 대여 형태로 전시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그 그림은 1981년에야 드디어 그의 고국 당을 밟게 되었고, 지금은 ‘파리 피카소미술관’에 방탄유리로 보호를 받으며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한편, 우리의 비극을 그린 그의 또 다른 대학살 <<한국에서 대학살>>도 서서히 일반인들한테까지 공개되었다.
이제 위에서 내가 뱉은 말에 관해 책임질(?) 차례다. 나는 그의 <<개르니카>>를 두고, ‘어떻게 보면, 아직도 그림 그리기를 제대로 못 익힌 유아(乳兒)들이 그린 듯한 그림.’ 이라고도 하였으며, ’아동화처럼 여긴다’고도 하였다. 사실 이 이야기를 하면, 다들 깜작 놀라고 말 것이다. 바로 작가 스스로가 그렇게 말했다는 사실. 뭐라고 했기에?
“나는 열 다섯 살에 註)’벨라스케스(Velazquez)’처럼 그렸다. 덕분에 나는 80년 동안이나 아이처럼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전문가라고 나부대는 양반들, 들어보시오. 내 말이 틀렸냐고? 사족을 하나 붙여야겠다. 어린애 같은 시선으로 사물을 보아야 하며, 어린애 같은 글을 적어야겠다는 생각. 천상병 시인이 그러했듯이.
끝으로, 너무 이야기가 길어질 듯하여 부득이 위 문장에 나오는 벨라스케스에 관해서는 ‘註)’ 형태로 덧붙이기로 한다.
註)’벨라스케스(Velazquez)’ :
벨라스케스(Velazquez, 스페인 화가, 1599~1660)는 궁중화가로 지내며 많은 초상화를 그렸다. 사진기가 나오기 전이었던 관계로, 사물을 사진기로 찍은 듯 그렸던 그는 인기 화가였을 게 뻔하지 않은가. 그의 그림은 세밀하여 인간의 표정과 음영 등이 분명히 살아 있다. 피카소는 그를 대단히 좋아했던 모양이다. 피카소는 그의 그림 ‘시녀들’ 한 장을 앞에다 두고, 무려 40회 모방해보았으나, 번번히 실패하였노라고 술회한 바도 있다. 그러했던 벨라스케스는 피카소한테만 영향을 끼친 게 아니다. 우리들한테 ‘볼레로’라는 음악으로 유명한 ‘라벨(Joseph Ravel,프랑스 작곡가,1875~1937)’한테까지 영향을 끼쳤다. 라벨은 루브르 미술관을 찾게 되었다. 그곳에는 벨라스케스가 그린 젊은 왕녀 마가리타(Infanta Magarita)의 초상화가 한 장 걸려 있었다. 사실 내가 보아도 너무도 품격있는 어린 소녀의 자태다. 라벨은 그 그림에서 영감을 얻어, ‘죽은 황녀를 위한 파반느’란 곡을 적게 된다. 명작으로 꼽히는 곡이다. 화가였던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 비교적 어릴 적부터 정상적인 그림 공부를 하였던 피카소. 그에게 대선배인 조국의 화가 벨라스케스의 화법(畵法)은 교재였을 게 뻔하다.
(다음 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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