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농부 수필가가 쓰는 미술 이야기(16)수필/미술 이야기 2014. 6. 14. 16:49
농부 수필가가 쓰는 미술 이야기(16)
- 환락가(歡樂街)에서 살았던 화가-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그에 관한 별명과 꾸밈말은 많다. 대체로, ‘물랑 루즈(Moulin Rouge ; ‘빨간 풍차’를 뜻한다고 한다.)의 화가’라는 별명으로 많이들 부른다. 물랑 루즈는 1889년에 개업하고, 프랑스 환락가인 몽마르뜨에 자리한 극장식 카바레라고 한다. 그곳 외벽에는 상징물인양 ‘빨간 풍차’가 달려 있단다. 어떤 이는 그를 ‘몽마르뜨 언덕의 작은 신사’라고도 부르고, 또 어떤 이는 그를 ‘몽마르뜨 언덕에 피어난 난장이 꽃’이라고도 한다. 또 어떤 이는 그를 ‘비운의 천재화가’라고도 한다. 이 모두가 그의 생애와 미술세계를 요약하고 함축한 별칭임에 틀림없다.
그는 명문 귀족인 백작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자신의 이종산촌과 정략적인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그러한 근친혼이 이 글의 주인공을 불행으로 몰아넣게 된다. 다들 아시다시피, 근친혼은 우성(優性)이 아닌 열성(劣性)의 유전자를 후손에게 대체로 물려주게 된다. 이 글의 주인공은 그로 인해 선천적 장애를 앓게 된다. 태어나면서부터 속된 말로 골골거리게 되었다. 특히 뼈가 허약하여 13세 때 한 차례,14세 때 또 한 차례 가벼운 다리 골절상을 당하게 되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나이가 들어가도 더 이상 키가 자라지 않았다. 죽는 날까지 152cm의 단신(短身)으로 살아야만 했다.그가 앓았던 희귀병은 많은 의학박사들의 연구거리가 된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선천적 장애와 그에 따른 내면의 상처를 이기기 위해 그림 공부를 시작하였고, 22세가 되던 해에 홀연히 집을 떠나게 된다. 도착한 곳이 몽마르뜨이고, 그는 그곳에 아뜨리에를 차리게 되었다. 그는 몽마르뜨의 여러 곳을 드나들게 된다. 물랑 루즈는 단골손님으로 드나들었고, 카바레, 무도장, 카페, 창녀촌 등도 서슴지 않고 드나들게 된다. 한마디로, 몽마르뜨의 현란한 밤 풍경을 즐긴, 밤의 보헤미안이었다. 그곳에서 그의 미술적 명성은 날로 높아졌으며, 몽마르뜨의 스타로 떠오르게 된다. 1889년 물랑 루즈가 개업하면서, 1891년 그곳 관계자는 그에게 포스터를 의뢰한다. 당시 그 업소의 전속 무희(舞姬)였던 ‘라 굴뤼’와 ‘발랑탱’. 그는 이들 가운데 ‘라 굴뤼’를 포스터에다 그려 넣게 된다. 아마 그녀가 그의 첫사랑 내지 짝사랑의 대상이었던 듯하다. 사실 그 포스터로 인해 그곳 인기스타였던 라 굴뤼를 뜨게 하는 한편, 자신의 미술적 명성을 드높인 일이기도 하였다. 그것이 일종의 기업홍보 포스터였다. 동시에, 최초 현대적 포스터였다. 그는 물랑 루즈와 관련된 그림을 퍽이나 많이 그렸다. <물랑 루즈에 들어가는 라 굴뤼>, < 물랑 루즈의 카트리느>, <물랑 루즈에서>, <물랑 루즈에서 나오는 잔 아브릴> 등등. 그러한 관계로, 위 첫 단락에서 소개한 대로 그를 ‘물랑 루즈의 화가’라고 하는 것 같다. 나아가서, 그는 그곳의 단골손님이었으며, 매일 그곳 지정석에서 그림을 그렸다고 하니… .
불운의 귀족 후손.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상아며 금이며 은이며 승마며 온갖 걸 다 준비해놓고 기다렸다고 한다. 그러한 선천적 질환을 타고 난 그로 인해 그의 아버지 백작 양반은 남들한테 창피하여 자기 아들 이야기도 꺼낸 적도, 또 아들을 뒷바라지해 주지도 않았다고 전해진다. 심지어 그림을 그리는 게 하류인생들이나 하는 거라고 여겼으며, 그의 그림을 조잡한 스케치 정도로 여겼단다.
152cm의 땅딸막한 키에 늘 지팡이를 짚고 살아가던 화가가 대체 누굴까? 그의 이름은 제법이나 길다. ‘앙리 마리 레이몽 로트레크 몽파’다. 그 이름을 통해서도 그가 지체 높은 귀족 가문의 자손임을 가늠할 수 있다. 그러나 화가로서 그의 이름은 ‘앙리 툴루즈 로트레크 (Henri de Toulouse Lautrec, 1864~1901)’다. 더욱 약칭하여 ‘로트레크’라고 부르기도 한다.
로트레크, 그는 귀족이었으면서도 정작 귀족 사회의 허위와 위선을 미워했다. 그는 카바레, 무도장, 카페, 창녀촌 등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애환을 그대로 화폭에 담았다. 20세가 되던 해, 당대 인기 화가였으며 자신보다 40세가 더 많은 ‘퓌비 드 샤반’의 그림 < 신성한 숲>을 패러디 한 그림을 선보인 바 있다. <퓌비 드 샤반의 ‘신성한 숲’에 대한 패러디>가 바로 그것이다. 본디 그림에다 자기 친구들과 왁짜지껄 소란을 피우는 그림을 숲 사이에 어둡게 삽입한 게 특징이다. 그는, 천사들이 모여 노는 본디 작품 속에서 작은 체구에 다리 불편한 꼬맹이가 보임에 착안해서인지, 그 꼬맹이의 모습을 부각시킨 게 압권(壓卷)이다. 바로 자신의 몰골임을 그렇게 표현한 듯하다. 한마디로, “퓌비 드 샤반, 당신 엿이나 먹어.” 라고 외치는 듯싶다. 그는 인습에 매달리지 않았다. 그는 괴상한 명함을 들고 다녔다고 한다. ‘미술 낙제생 앙리 드 툴루즈 로트테크’가 그것이다. 그가 미술대학 입학시험에 떨어진 걸 남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그렇게 자랑하듯 했다니… . 사실 그는 앞뒤가 막힌 이는 아니었던 거 같다. 선배 화가들의 그림에서도 배울 것은 배우고, 고흐와 고갱과도 친분을 나누었다고 한다. 유머와 위트가 넘쳤고, 남으로부터 동정 받기를 원치 않았다고 한다. 그러한 지체장애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품성으로 인해 동료들로부터 늘 존경을 받았다고도 한다. 한편, 그는 거리낌 없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22세 때 집을 떠난 이후 무려 13년 동안 술집, 매음굴, 뮤직 홀 등의 정경을 소재로 하여 유화를 그리고 석판화를 만들고 하였다. 대체로, 그의 작품들은 젠체하는 귀족 등 상류사회의 타락과 퇴폐를 폭로한 것들이 주를 이룬다. 동시에, 어느 미술평론가는, ‘자신을 세상에 내던짐으로써 있는 그대로의 비극을 사랑했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타고 난 지체장애를 작품 창작으로 승화시킨 그. 정작 그는 말년에 이르러 아예 사창가에서 지냈는데, 알코올 중독과 매독 등으로 요양소에서 보내야 했다. 그의 아버지야 본디부터 그를 제대로 돌보아 준 적도 없지만, 그의 어머니는 아들 걱정과 아들 사랑을 그 누구보다도 하였던 모양이다. 그처럼 자애롭던 어머니가 멀리 사라져버리자, 그는 낙망하여 악화일로를 걸었던 듯하다. 그는 미술작가로서 명성이 자자했지만, 그는 정작 그러한 명성에 관해서도 관심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사실 우리끼리 터 놓고 하는 이야기지만, 그처럼 신체불구인 남정네를 좋아할 여인네는 그리 흔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도 남자였던 관계로 여인네를 그리워했을 것은 뻔하다. 더군다나 바람둥이였던 그의 부친의 피가 어디 가겠냐고? 그는 차츰 페티시즘(fetishism) 환자가 되어 갔다. 이성의 몸 일부나 그 이성이 사용하던 속옷이나 물건 등을 성적 대상으로 삼는 이상 변태 성향. 그는 향수,보석, 모자,코르셋, 속옷 등에 애착을 보였다고 한다. 그는 여자의 맨살과 구석진 부분의 피부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는 그 부위를 ‘결코 닿지 않는, 살아있는 비단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했단다. 여자의 손을 몇 시간식이나 만지작거리며 자신의 뺨과 귀와 코에 대고 그 감촉을 느끼기도 했단다. 그는 고유한 여자의 냄새를 좋아했다고 한다. 머리카락이나 팔과 무릎 안쪽의 내음을 좋아했고, 모델이 벗어놓은 스타킹 냄새도 좋아했단다. 여자의 겨드랑이 내음을 ‘코담배 가게’라 부르며 좋아하기도 했단다. 사실 그쯤 되면, 그는 색마(色魔) 수준이었던 셈이다. 어쩌면 그러한 기질이 그 많은 작품으로 변용(變容)되었을지도 모를 일.
그는 37세 일기로 세상을 떴다. 알코올중독과 매독이 사망원인이란다. 아니, 그는 내면에 쌓인 고독과 광기(狂氣)를 더 이상 감내치 못하고 요절하였다. 누구 말마따나 그는 ‘비운의 천재화가’였음에 틀림없다. 그의 아뜨리에를 뒤늦게 방문한 그의 모친은 그의 유작(遺作)들을 모아 그의 고향 ‘알비시(-市)’에 기증하였다. 그의 작품 가운데 <세탁부(洗濯婦)>는 경매가가 약 250억원이었으며,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제 내 마음도 가다듬어볼 차례다. 모름지기 예술가란, 온몸으로 작품을 빚어대는 사람을 이르는 칭호임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평론가들이 어느 특정 예술가의 작품세계에 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걸까에 관해서도 새삼 생각하게 된다. 사실 미술작품의 경우는 30여 년 후에나 제대로 된 평론이 나온다고 들었다. 또 하나의 사실. 어느 작가나 그의 작품세계를 도덕적 잣대로 함부로 재려 해서는 아니 된다는 점.
(다음 호 계속)
(* 이 글은 본인의 블로그, 이슬아지 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한국디지털도서관 본인의 서재,
한국디지털도서관 윤근택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본인의 카페 이슬아지 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수필 > 미술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농부 수필가가 쓰는 미술 이야기(18) (0) 2015.04.06 농부 수필가가 쓰는 미술 이야기(17) (0) 2014.12.19 농부 수필가가 쓰는 미술 이야기(14) (0) 2014.04.29 농부 수필가가 쓰는 미술 이야기(13) (0) 2014.04.17 농부 수필가가 쓰는 미술 이야기(12) (0) 2014.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