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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막에서 초저녁잠에서 깨어나니, 밤 10시 무렵.
사실 아파트 경비원으로 지내다 보니,
불규칙적인 잠인데다가... .
다시 잠은 아니 오고,
심심해져 글을 쓸밖에요.
그러한데 탈이 났어요.
식수가 떨어졌어요.
갈증은 나고,
개울 물마저 꽁꽁 얼어버렸으니!
부득이 시내 아파트로 내려가야겠어요.
참,
아름다운 꿈 꾸고 계시는 거 맞죠?
오늘의 음악은요,
<저는 별밤의 피아니스트는 아니지만요,
'별밤의 수필가'는 되지요.
별밤의 피아니스트는 흰 건반과 검은 건반을 두드리지만,
별밤의 수필가는 컴퓨터의 키보드를 이처럼 두드리지 않아요?
그 노랫말엔 아마 이렇게 되어 있을 거에요.
'나는 피아노의 건반을 두드리고, 그대는 내 가슴을 두드리누나.'
검은 자판에는 흰 모음과 흰 자음이 찍혀있고,
저는 그것들을 조합해서 글자를 만들어내고 있지요.
'나는 컴퓨터의 키보드를 두드리고, 그대는 내 가슴을 두드리누나.'
어때요? >
Richard Clayderman - 별밤의 피아니스트 (거듭듣기 가능함.)는 별밤의 피아니스트는 아니지만요.
호주머니 속 송곳
윤근택(수필작가/ 문장치료사/ 수필평론가)
우리는 흔히 ‘자천(自薦)’이니 ‘타천(他薦)’이니 하는 말을 쓰게 된다. 또, ‘타의반 자의반(他意半自意半)’이란 말도 자주 쓰게 된다. 이들 말 가운데에서 ‘자천(自薦)’, 즉 ‘스스로 천거하는 일’에 관한 유명한 고사가 있다. 그게 바로 ‘호주머니 속 송곳’ 곧 ‘낭중지추(囊中之錐)’다.
때는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이하 ‘Daum’ ‘고사성어대사전’에서 그대로 베껴왔다. 이 방식은 내가 몇 해 전부터 즐겨쓰는 ‘꼴라주(collage) 형태의 수필’임을 다시 한 번 밝혀둔다.
<진(秦)나라가 조(趙)나라의 한단을 공격하자 조나라 왕은 평원군(平原君)을 초(楚)나라에 보내 합종의 맹약을 맺도록 했다. 평원군은 식객들 중에서 문무를 겸비한 20명을 골라 함께 가기로 했는데, 19명을 고른 뒤에는 더 이상 고를 만한 사람이 없었다. 평원군의 문하에 모수(毛遂)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앞으로 나와 자찬하며 평원군에게 말했다. “군께서 초나라와 합종을 하러 가시는데 외부에서는 찾지 않고 문하의 식객 20명과 함께 가기로 했다고 하는데 한 사람이 모자란다고 들었습니다. 저를 수행원으로 데리고 가 주시기를 바랍니다.” 평원군이 물었다. “선생께서는 내 집에 오신 지 몇 해나 되었소?” “3년입니다.”
“현사가 세상에 처해 있는 것은, 비유하자면 송곳이 주머니 속에 있는 것과 같아 그 끝이 튀어나온다고 하는데, 지금 선생은 내 문하에 3년이나 있었다지만, 주변 사람들이 칭찬하는 소리도 없었으며 나도 듣지 못했소. 이는 선생이 아무런 재주도 없는 까닭이오. 선생은 할 수 없으니 남아 있으시오.(夫賢士之處世也, 譬若錐之處囊中, 其末立見. 今先生處勝之門下三年於此矣. 左右未有所稱誦, 勝未有所聞, 是先生無所有也. 先生不能, 先生留.)”
그러자 모수가 말했다. “신은 지금 주머니 속에 넣어 주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만약 일찍이 주머니 속에 넣었더라면 송곳이 주머니를 뚫고 나왔을 것입니다. 어찌 그 끝만 보였겠습니까?(臣乃今日請處囊中耳. 使遂蚤得處囊中, 乃穎脫而出, 非特其末見而已.)”
평원군은 모수와 함께 가기로 결정했다. 다른 19명은 서로 눈짓으로 모수를 비웃기를 그치지 않았다. 모수는 초나라에 도달하는 동안 19명과 이야기를 하여 모두 굴복시켜 버렸다. 평원군이 초나라와 합종의 맹약을 협상하면서 이해관계를 논하는데, 해가 뜨면서부터 협상을 시작하였는데 해가 중천에 걸리도록 결정이 나지 않았다. 19명이 모수에게 올라가라고 말하자 모수는 장검을 비껴 들고 계단으로 뛰어 올라가 평원군에게 말했다. “합종의 이해관계는 두 마디면 결정되는 건데 오늘 해가 뜰 때부터 협상을 시작해서 해가 중천에 걸리도록 결정이 안 나는 것은 왜입니까?” 초왕이 평원군에게 물었다. “이 사람은 무엇 하는 사람이오?” “저의 사인입니다.” 초왕이 꾸짖었다. “어서 내려가지 못할까! 나는 너의 주인과 협상을 하고 있는 중이다. 지금 무엇을 하자는 것이냐!”
모수가 칼에 손을 대고 앞으로 나아가 말했다. “왕이 저를 꾸짖는 것은 초나라가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지금 열 발짝 안에서는 왕은 초나라의 많은 사람들을 의지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왕의 목숨은 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주인이 앞에 있는데 왜 꾸짖는 겁니까. 탕 임금은 70 리의 땅으로 천하의 왕 노릇을 했고, 문왕은 백 리의 땅으로 제후들을 신하로 만들었는데, 그들이 군사가 많았습니까? 모두 그 세력에 의하고 위엄을 떨쳤을 뿐이었습니다. 지금 초나라는 땅이 사방 5천 리에 군사가 백만으로 패자의 자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초나라의 강함을 천하는 당할 수가 없습니다. 백기는 새파란 놈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수만의 병사를 이끌고 초나라와 전쟁을 하여 한 번 싸움에 언정(鄢郢)을 함락시키고 두 번 싸움에 이릉(夷陵)을 불태웠으며 세 번 싸움에 왕의 조상을 욕되게 했습니다. 이는 백세의 원한이자 조나라도 수치로 여기는 일인데 왕은 어찌 수치로 여기지를 않습니까. 합종을 하는 것은 초나라를 위한 것이지 조나라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 주인 앞에서 꾸짖는 것은 웬일입니까!”
초왕은 모수의 말에 사직을 받들어 합종에 따르겠다고 약속을 했다. 모수는 개와 말의 피를 가져오게 하여 초왕, 평원군의 순서로 마시게 한 다음 자신도 피를 마시고, 왼손으로는 쟁반을 들고 오른손으로 19명을 불러 말했다. “그대들은 당하에서 피를 마시도록 하시오. 그대들은 한 일도 없이 다른 사람에 붙어서 일을 성사시켰을 뿐이니까요.”
평원군은 합종을 성사시키고 조나라에 돌아온 후 말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선비들의 상을 보지 않겠다. 내가 많게는 수천 명, 적게는 수백 명의 상을 보면서, 천하의 선비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고 자부했는데 오늘 모 선생을 보지 못했구나. 모 선생은 초나라에 가자마자 조나라를 구정(九鼎)과 대려(大呂)보다 더 무겁게 만들었다. 모 선생은 세 치의 혀로 백만의 군대보다 더 강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제 감히 선비의 상을 보지 않겠다.” 그러고는 모수를 상객으로 대우했다.
이 이야기는 《사기(史記) 〈평원군우경열전(平原君虞卿列傳)〉》에 나온다. ‘낭중지추’는 ‘추처낭중(錐處囊中)’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재능이 충분히 발휘된 것을 가리켜 ‘탈영이출(脫穎而出)’이라고 한다.>
(이상 ‘Daum’ ‘고사성어대사전’에서 그대로 따옴.)
요약컨대, 조나라 왕인 평원군(平原君)은 뒤늦게 합류한 식객 모수(毛遂)한테 잠재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주었고, 모수는 큰일을 해내었다. 이때 둘은 선대(先代)로부터 흘러내려오던 ‘호주머니 속의 송곳’이야기로 수작(酬酌)하여 일을 성사시킨다.
사실 우리 속담에도 ‘낭중지추’에 해당하는 게 있다. 바로 ‘구무(‘구멍’의 고어임.)에 든 뱀이 긴지 짧은지는 재어봐야 안다.’하는 말. 대체로, 현대사회는 공개채용시험을 통해서 학술 위주로 인재를 등용하게 된다. 그 대상자들의 인성 내지 인격은 일단 뒷일이다. 막상 그렇게 하여 뽑힌 공직자들. 그들은 남다른 머리로 승승장구하여 높은 지위에까지 닿는 예가 많다. 그러한데 그러한데 ... 아쉽게도 청백리(淸白吏)로 마감하는 이들이 극히 드물다는 거. 권력과 재력에 도취해서 말년이 추해지는 경우도 왕왕 있다. 우리 수필문단엔들 왜 그러한 ‘수필권력’이 없겠는가.
다 접어두고, 내가 30여 년째 수필가 행세를 하고 있으니, 이 대한민국의 수필계에서 나의 위상(位相)에 관해서만, ‘호주머니 속 송곳’과 연관시켜 이야기하고 글을 맺을 요량이다. 나는 멋모르던 데뷔 초기에 연달아 두 권의 개인 수필집을 낸 이후, 여태 책을 내지 않았다. 아니, 낼 수가 없었다. 종이책 분량으로 20권도 넘을 2,000여 편의 작품들을 빚었고, 이제는 시대구분도 아니 되는 까닭이다. 저 유명한 추상파 미술가 피카소의 경우, 그의 작품 세계를 ‘청색시대’니 ‘황금빛 시대’니 하며 시대 구분하는데... . 종이책으로 더 이상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으니, 많은 문학평론가 등에게 잘 알려지지 도 않았을 것이다. 특히, 내가 데뷔한 이후에 태어난 신진 수필작가들한테는 내 이름이 생소할는지도 모른다. 전혀 개의치 않는다. 한 때 생면부지(生面不知)의 학자 겸 시인이, 자신이 집필한 어느 출판사 중학교 1학년 1학기 국어교과서에 나의 작품 ‘유품’을 픽업해서 3년간 실은 적도 있다. 그 하나의 예(例)만으로도 만족해한다. 대신, 파급력이 크다는 ‘인터넷 매체’에다 나의 신작(新作) 등을 거의 무차별적으로(?) 자천(自薦)하여 도배를 한 적도 있었다. 그 또한 어느 순간 심드렁해졌다. 요즘은 그저 본인의 카페와 블로그와 전자도서관에 글을 올려둘 따름이다. 그런데 용케도, 몇몇 분이 나의 글을 퍼가서 자기네 문학단체 카페 등에 올리는 수가 있다. 정말로, 그것만으로도 행복해할 일이며 고마워해야 할 일.
끝으로, 남이야 알아주든 말든 내 수필창작은 죽는 그 순간까지 이어갈 것이다. 내 사후(死後)에라도 어느 뜻있는 학자가, 수필평론가가 마치 보옥(寶玉)을 찾은 듯 이렇게 말해도 좋으리.
“그는 낭중지추였어. 우리는 왜 여태껏 그 송곳을 발견하지 못했을까?”
* 이 글은 본인의 블로그, 이슬아지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한국디지털도서관 본인의 서재,
한국디지털도서관 윤근택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본인의 카페 이슬아지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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