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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수(哀愁)
    수필/신작 2018. 2. 13. 00:23


                                                    애수(哀愁)

     

                                                          윤근택(수필작가/ 문장치료사/ 수필평론가)

     

       '애수(哀愁)’, 내가 기억하며 여러 차례 본 비극적 러브 스토리의 흑백영화, ‘워털루 브리지(Waterloo Bridge)’의 번역된 영화 이름이기도 하다. 참말로 최루성(催淚性)이 강했던 1940년작 영화.

       애수란, 두루 아는 사항이지만,‘마음속 깊이 스며드는 슬픔이나 시름을 일컫는다. 그런데 오늘밤 예기치 않았건만, 내가 겪었던 어린 날 한 순간이 떠오를 줄이야! 돌이켜본즉, 나는 본디부터멜랑콜리[melancholy;흑담즙질(黑膽汁)] 체질로 태어났던 거 같다. 나는 곧잘 울곤 하였다. 나이 대여섯일 적에, 낮잠에서 깨어나 둘러보면, 우리 초가삼간에는 아무도 없고 ... .나 혼자임을 알게 되었다. 마구 앙앙울어댔다. 집 앞 이웃집 밭둑에는 뽕나무가 잎사귀들을 거의 다 떨구고, 겨우 두어 장만 가을바람에 달랑대고 있었다. 그 모습은 더욱 눈물 나게 하였다.

        어느 가을, 어머니는 나한테 제의했다.

       “근택아, , 이 에미랑 외가에 가지 않으련? 내가 하도 아이들이 많아, 어떤 놈을 외가 구경 한 번도 못시켰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아마 니가 여태 외가에 가본 적 없는 것 같구나.”

       참말로, 내 나이 여섯 될 때까지 외가 구경은 해본 적 없었다.

        어머니는 풍습에 따라, ‘첫 외가 나들이라며, 내 얼굴에다 아궁이에서 꺼낸 검댕을 발라주었다. 그렇게 하는 게 액운(厄運)을 떨치는양밥이라고 하였다. 사실 당시 부모님 회갑잔치 때에도 그 자녀들은 얼굴에 검댕을 바르곤 하였다.

       어린 나는 어머니를 쫄랑쫄랑따라 장도(壯途)에 올랐다. 신작로길을 접어들었다. 자갈이 깔린 비포장도로. 미루나무들이 양 길가에 늘어서 모자(母子)를 환송(還送)해주었다. 그 이후에도 내 고향 쪽 가로수는 주욱 미루나무였다. -민학교(나는 결코초등학교가 아닌, ‘-민학교에 다녔다.), 중학교를 거치는 동안에도 미루나무였다. 등학굣길에는 언제고 그들이 벗이었다.

       어머니는 당신의 친정이자 내 외가인 곳의 주소를 딱 한번 일러주고는, 나더러 거듭거듭 외워 보라고 일렀다. 나는 또박또박 스타카토로 읊어댔다.

      “청송군. 청송면. 송생리.”

       내 친가(親家) ‘청송군 청송면 초막골(금곡2) 447번지에서 곰나골(곰이 나왔다는 골짝)’을 지나, 여름에도 찬물이 나오는 개머리구석을 지나자, 10리쯤 떨어진 윗마을 청운리(靑雲里)’가 나타났다. 황씨네 집성촌인 청운리에는 청송국민-학교 청운분교가 있었고, 그 작은 학교에는 태극기가 펄럭였다.

       모자는 청운교(靑雲橋) 다리를 지났다. ‘물레방앗간도 지났다. 어머니는 당신의 친정이, 아니 내 외가가 이제 그리 멀지 않다고 말했다. 그 길을 끝까지 가다가 보면,‘주왕산이 나온다고 했다. 그때 어머니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던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맨 처음으로, 30여 리 신작로를, 까만 고무신을 신고, 여인과 동행했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내 개인사(個人史)에 길이 남을 일.

    곁에 누군가가 있음에도 쓸쓸하다는 것도 맨 처음 느꼈던 날이다. 심지어 나를 낳아준 어머니가, 품안에 안고 길러준 어머니가 곁에 있음에도. 실제로, 그날 둘레가 그런 분위기를 연출해내었다. 도로변 땅콩 밭에는 주인이 땅콩을 캐고 버린 땅콩줄기가 있었으며, 수숫대에서는 수수이삭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수숫대들은 서로부비어 서걱이고 있었다. 빨갛게 익은 고추들과 빨갛게 익은 사과들도 탐스럽기는커녕 쓸쓸하게만 여겨졌다. 정말로 왜인지 모를... .

       외가에 도착하자, 외숙모님만 있었다. 다들 저녁 무렵에 돌아올 거라고 했다. 같이 놀아줄 또래 외사촌 인세도 보이지 않았다. 툇마루에 나를 혼자 남겨둔 채 외숙모는 올케인 내 어머니와 무엇이 그리 정겹던지. 참말로, 심심하기만 하였다. 괜히 어머니를 따라 나섰던 거 같아, 후회막급이었다. 요즘 흔히 하는 말로, ‘이러려고 외가에 왔던가싶었다.

       북향집인 외가 툇마루에 저녁이 찾아들었다.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기분에 삽시간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해서, 마구 앙앙울어댔다.

      “엄마, 집에 가자. 엄마, 집에 가자. 엄마 엄마... .”

       머리가 깨어지게 아프도록 울기만 하였다.

      내 기억 속에 희미한 그때 외숙모의 말.

      “야가, 낯을 타는 모양이야. 집을 가리는 모양이야.”

       어머니와 외숙모는 어떻게 나를 달래어서 그 하룻밤을 넘겼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나는 그날 머리가 깨질 듯 아프도록 울기만 했다는 거. 그 울음에 관한 기억은 벌써 세월이 50년도 넘게 흘렀어도 또렷하기만 하다.

       그 울음이,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최초로 맛본 향수(鄕愁) 때문일 수도 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최초로 내 집에서 가장 먼 거리인 30리 반경으로 벗어났던 데 대한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다. 그 쓸쓸함을 부추긴 이들은 어둠, 부엉이 울음, 희미한 호야등(남포등), 걷는 동안 마주쳤던 가을 풍경 등일 수도 있다.

    이 밤 그때 일을 문득 다시 떠올리게 되다니!

      그때 일을 다시 떠올리자니, 또다시 쓸쓸하기만 하다. 이미 오래 전에 저 세상에 가 계신 내 어머니도 보고 싶고 ..... 다시 그 꼬맹이시절로 돌아가, 지금은 허물어져 온데간데없는 내 외갓집을 당신 손을 잡고 걷고도 싶고 ...... 어머니, 어머니! 애수여, 나의 애수여!

     

     

     

     

      * 이 글은 본인의 블로그, 이슬아지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한국디지털도서관 본인의 서재,

       국디지털도서관 윤근택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본인의 카페 이슬아지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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