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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이 덩굴에 참외 열렸다’
    수필/신작 2019. 9. 13. 01:26

     

                              ‘오이 덩굴에 참외 열렸다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내 양친은 살아생전 이웃집이 일 잘 풀리는 등의 경사를 일컬어 자주 쓰던 말이 있다.

      “가지남(내 양친은가지 나무의 고어로 씀.)에 수박 열렸네.”

       그러한데 오늘에야 그 말의 원전(元典)을 알게 되었으니... . 고려시대 유행어, ‘ 오이 덩굴에 참외 열렸다.’가 그게 아닐까 하고서.

        때는 897, 당시 궁예(弓裔,?-918)의 지배하에 있던 황주(黃州) 토산(兎山)대상(大相)’이란 관직을 지닌 최우달(崔祐達)의 집에 이러한 일이 생겨났다. 최우달의 아내는 임신 중이었다. 그녀는 한가로이 이웃 아낙들과 대청마루에 앉아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런데 담장에는 잎과 줄기가 말라버린 오이 덩굴에 누런 오이가 탐스럽게 달려 있었다. 아낙들은 그처럼 탐스런 오이가 달리려고 잎과 줄기가 다 말랐을 거라고 입을 모아 이야기를 하였다. 며칠이 지나자 그 오이가 오이가 아니고 참외였다. 일설에 의하면, 최우달의 아내가 오이 덩굴에 참외가 열린태몽을 꾸었다고도 한다.

       어쨌거나, 그 소문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 소문은 궁예의 귀에까지 닿고 말았다. 본디 궁예는 신라의 왕손(王孫) 설도 있고, 그 괴이한 소문과 유사한 비극적인(?) 출생비화도 지닌 이. 궁예는 뭔가 짚이는 게 있어 어떤 두려움으로, 용한 점쟁이를 불러 묻게 된다.

       “그 부인이 낳는 아이가 딸이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으나, 아들이면 전하의 나라에 변고(變故)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해서, 궁예는 그 임산부댁을 감시토록 한다. 저 이스라엘 헤로데(Herod) 이 구세주 예수님의 탄생이 두려워, 베들레헴과 그 주변의 두 살 이하 남자아이들을 모두 살해하라고 명령을 내렸던 일과 오버랩되는 사건이기도 하였다.

       산월(産月)이 되자, 산모는 뱃속의 아이가 아들일까 두려워 산속으로 도망가서, 남들 몰래 혼자서 아이를 낳게 된다. 불행인지 행운인지, 태어난 아이는 고추를 달고 있었다. 부부는 자기네 아이가 딸아이라고 속이며 그 아이를 여장(女裝)하여 숨죽이며 키우게 된다.

       그 아이는 공부하기를 좋아했다. 글을 잘 짓고,‘오경(五經)’도 달달 외울 정도였다. 그날도 아이는자치통감(資治通鑑)책을 끼고 흥얼대며 길을 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주 오는 이와 그만 부딪치고 만다. 맞은편에서 오던 일행은 아이를 탓하지 않았다. 대신, 애꾸눈이는 길바닥에 떨어진 그 책을 들어 먼지를 털어 아이한테 건네주며 묻게 된다.

       “어린 네가 이 책을 어찌? 그 안에는 무어라 적혀 있던?”

        아이는 참말로 총명했다.

       “무룻, 제왕은 덕을 갖추어야 하고... .”

       그 애꾸눈이가 바로 궁예였다. 궁예는 그 아이의 나이와 상관없이 자기 사람으로 쓰게 된다. 그는 입궁하여 한림의 자리에 앉아 왕명을 받아쓰곤 하였다. , 그의 어머니는 우쭐대며 입궁하려는 아들을 보며 한걱정을 하게 된다. 이를테면, 그의 직무는 왕명(王命)을 받아 적는 속기사(速記士). 그가 바로 최응(崔凝, 898 ~ 932)이다. 궁예가

      “이른바 성인(聖人)을 얻는다 함은 이 사람을 얻는 게 아닌가!” 할 정도로 최응은 신임을 얻었다.

       915(신라 53대 왕 신덕왕 4) 궁예가 왕건을 불러들여, 이른바 관심법(觀心法)’으로 모반의 누명을 씌울 때 이를 변명하자, 그 자리에 장주(掌奏)로 있던 최응이 일부러 붓을 뜰에 떨어뜨린 다음, 주우려고 뜰에 내려가 왕건한테 귀뜸을 하게 된다.

      “굽히지 않으면 위태롭습니다. 모반을 꾀했노라고 얼른 말씀하세요.”

       왕건은 최응의 충고에 따라, 거짓 고백을 하게 되고, 궁예는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역시 내 아우야!”

       최응은, 목숨이 달아날 뻔했던 왕건을 그렇게 극적으로 도와주었다.

    왕건이 포악한 군주인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개국하였다. 왕건은 최응을 지원봉성사(知元奉省事)로 책봉하게 되었다. 최응은 광평낭중(廣評郎中내봉경(內奉卿광평시랑(廣評侍郎)을 역임하며 태조의 총애를 받았다.

       여기서 잠시. 궁예와 왕건과 최응의 나이 관계를 따져 보고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하겠다. 궁예(? ~ 918), 왕건(877~943), 최응(898~932)이다. 왕건이 자기 주군으로 모셨던 궁예한테, “형님!형님!” 하였던 걸로 봐서 궁예가 왕건보다 연장자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왕건과 최응의 나이 차이는 21. 궁예가 살해된 918년에다 왕건이 태어난 877년을 빼기 하면, 왕건이 집권하여 고려를 세운 나이가 41세임을 알 수 있다. 다시 왕건이 집권한 918년이면, 최응은 약관(弱冠) 21세에 불과했던 셈이다. 궁예가 발탁해서 중책을 맡겼을 적에는 최응이 10대 후반이었던 셈. 최응은 그 나이로 따져, 왕건의 아들뻘 되는 이였다.

       위에서 이미 한 차례 적었지만, ‘최응은 공부하기를 좋아했으며, 글을 잘 짓고, 오경(五經)도 달달 외울 정도였음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태조 왕건은 최응을 대단히 아꼈고, 반란에 성공하여 고려를 통치하는 동안에도 그의 학식을 중시했다.

       최응은 항상 재계(齋戒)하고 고기를 먹지 않는 채식주의자였다. 한 번은 그가 병들어 누웠을 때 태조가 동궁(東宮)을 보내 병문안을 하고 육식을 권하며, “다만 손수 죽이지 않으면 될 것이지 고기를 먹는 것이야 무슨 해가 되리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굳이 사양하고 먹지 않자 태조가 그 집에 행차해 일렀다.

       “()이 경이 고기를 먹지 않다가 몸이 쇠약해지면 경의 부모님이 걱정하실 것이니 그것은 바로 불효라고 할 수 있소. 또한 경이 고기를 먹지 않고 회복하지 못하여 임금이 좋은 신하와 함께하지 못하면 그것은 또한 바로 불충이오. 그러니 고기를 안 먹는 것은 불효 불충이오.”

       이에 그는 비로소 고기를 먹어 병이 나았다고 한다.

       또 태조가 그에게 일렀다.

      “옛날에 신라가 9층탑을 세워 삼국을 통일했는데 개경에 7층탑을 세우고 서경에 9층탑을 세워 삼한을 합해 일가를 삼고자 하니 경은 나를 위해 발원소(發願疏)를 지어 달라.”

       그러자 최응은 그 뜻을 따랐다.

       훗날 고려 태조 왕건의 사당에는 왕건의 얼굴을 그려 놓은 그림과 더불어 여섯 신하들 즉 6(六公)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는데, 6공을 배홍신복유최(裴洪申卜庾崔)’로 성을 따서 부르고 있었다는 거 아닌가. 이들은 각각 배현경, 홍유, 신숭겸, 복지겸, 유금필, 최응을 말하는 것이다. 이들 가운데 배현경, 홍유, 신숭겸, 복지겸 네 사람은 왕건에게 궁예를 몰아내는 반란을 일으키라고 옆에서 부추겨 공을 세운 사람들. 그리고 유금필은 후삼국을 통일하는 전투에서 가장 공을 많이 세운 명장. 그런데 최응은 비록 나이는 어렸으나, 전투와 싸움이 아니라 글을 잘 짓고 학식이 풍부해서 6공에 들었던 것이다.

       왕건의 책사 최응은, 왕건이 후삼국 통일에 성공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93235세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떴다. 왕건은 재주가 뛰어난 최응의 요절을 무척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 가인박명(佳人薄命)이여!’

       왕건의 둘도 없는 책사였던 최응. 궁예가 그때 그 점쟁이의 점괘대로 최응을 진작에 색출하여 살해해버렸다면, 후삼국 가운데에서 가장 세력이 강했다던 궁예가 후삼국을 통일했을까? 그때 최응이, 목숨이 경각(頃刻)이었던 왕건한테 그처럼붓 사건만 펼치지 않았더라면, 과연 고려가 세워질 수 있었을까? 물론, 역사는 가정(假定)이 통하지 않지만... .

       하여간, 난세에 출현했던 최응. 고려시대 사람들이, “오이 덩굴에 참외 열렸다.”를 유행어로 삼을 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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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글은 한국디지털도서관 본인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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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글은 본인의 카페 이슬아지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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