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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송(治送)’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깊은 밤, 산골 외딴 농막(農幕) 창밖에는 장맛비. 이런 날에는 시조시인 가람(嘉藍) 이병기(李秉岐,1891~1968)의 ‘비(2)’를 또다시 암송(暗誦)하기에 딱 좋다. 사실 나는, 당시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려 있던 이 시를 50여 년째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우고 지낸다.
짐을 매어놓고 떠나려 하시는 이날
어둔 새벽부터 시름없이 나리는 비
來日도 나리소서 連日두고 오소서
부디 머나먼 길 떠나지 마오시라
날이 저물도록 시름없이 나리는 비
저으기 말리는 정은 나보다도 더하오
잡았던 그 소매를 부리치고 떠나신다
갑자기 꿈을 깨니 반가운 빗소리라
매어둔 그 짐을 보고는 눈을 도로 감으오
한편, 나는 이런 날엔 으레 그룹 ‘배따라기’가 불렀던 ‘그댄 봄비를 무척 좋아하나요’도 흥얼대곤 한다. 내 젊은 날 가요방에 가면, 그야말로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금영반주기 선곡번호 833을 입력했던’ 바로 그 곡. 특히, 이 곡은 남녀 가수가 한 소절씩 대화 내지 화답하는 형태의 노래인 점이 이색적이다.
그댄 봄비를 무척 좋아 하나요(남)
나는요 비가 오면 추억 속에 잠겨요(여)
그댄 바람 소릴 무척 좋아하나요(남)
나는요 바람 불면~~ 바람 속을 걸어요(여)
외로운 내 가슴에 남 몰~래 다가와(남)
사랑만 심어놓고 떠나간 그 사람을
나는요 정~말 미워하지 않아요
그댄 낙엽지면 무슨 생각하나요(남)
나는요 둘이 걷던 솔밭길 홀로 걸어요(여)
그댄 봄비를 무척 좋아 하나요(남)
나는요 비가 오면 ~ 추억속에 잠겨요(여)
외로운 내 가슴에 남 몰~래 다가와(남)
사랑을 심어놓고 떠나간 그 사람을
나는요 정~말 미워하지 않아요
그댄 낙엽지면 무슨 생각 하나요(남)
나는요 둘이 걷던 솔밭길 홀로 걸어요(여)
솔밭길 홀로 걸어요~(여)
솔밭길 홀로 걸어요~~(여)
듣기)
https://www.youtube.com/watch?v=crBVVxNkLhc
위 두 작품 공히 여성적 감성(感性)이 묻어난다. 그리고 ‘떠나보냄’과 ‘떠나보냈음’에 관한 애틋함도 깃들여 있다. 사실 나는 후자(後者)‘배따라기’라는 그들 그룹명을, 그들이 부르는 ‘그댄 봄비를 무척 좋아하나요’ 만큼이나 좋아한다. ‘배떠나기’ 혹은 ‘배떠나보내기’의 평안도 사투리임을 알기에. ‘배떠나보냄’의 아쉬움과 ‘배가 떠날 때에 순풍(順風) 기원’이 함께 묻어나는 그룹명 아닌가. 참,‘배가 떠날 때에 갯가에서 (아낙들이 손을 흔들어보이며) 순풍(順風)을 기원하는 일’을 두고,‘후풍(候風)’이라고 한다는 걸, 나의 신실한 애독자님들께 덤으로 알려드려야겠다.‘위키백과’는 ‘배따라기’에 관해 이렇게 적고 있다.
<배따라기는 평안도 민요의 일종으로 ‘배떠나기’가 와전된 것이다. 민요보다 장절형잡가로 볼 수 있는 노래이다. 사설의 내용은 뱃사람의 고달픈 생활을 서사체로 엮고 있다. 후렴이 붙지 않는 장절형식이며, 장단은 불규칙 장단이고 가락은 수심가형이 주가 되나, 경기잡가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비장한 민요이다.
‘자진배따라기’는 평안도 민요의 일종이다. 배따라기에 이어서 부르는 빠른 장단으로 된 노래이다. ‘긴 배따라기’가 뱃사공의 고달픈 생활을 그리는 비장한 노래인 반면 자진배따라기는 풍어를 기원하는 노래이다. 고기잡이가 잘되어 봉죽을 박고 오는 노래라 해서 봉죽타령이라고도 한다. 장단은 세마치장단이고 가락은 수심가형이 주가 되고 잡가목이 끼여 있다. 후렴이 붙는 장절형식이며, 매우 씩씩하고 장쾌한 민요이다.>
어쨌든, 나는 위 두 작품을 무척 좋아한다. ‘고운 이 떠나보내기 아쉬움’과 ‘후풍(候風)하기’가 어우러진 작품들.
깊은 밤, 산골 외딴 농막(農幕) 창밖에는 장맛비가 하염없이 내리고... . 참말로, 어젯밤 나는 가람 선생께서 위 시에서 노래했듯, ‘짐을 매어놓고 떠나려 하는 이’를 안타까운 맘으로 말없이 마주할밖에 없었다. 그는 내 수필작품, ‘황소를 몰고 온 남자’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어제 초저녁에, 나는 그의 맏아들이자 내 장조카인 이한테서 한 통의 급한 전화를 받았다. 사실 ‘하마나하나마’ 했던 일.
“작은아버지, 이젠 올 데까지 다 온 거 같애요. 마지막이 될는지도 모르니, 저희 아버지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셔야 하지 않겠어요? 칠곡의 경북대병원 8층 병실인 걸요. ”
해서, 여러 남매들이 여러 곳에서 우루루 모여 그곳 병원으로 달려갔다. 환자는 3년 여 혈액암으로 투병 중인 나의 백씨(伯氏). 정작, 본인은 자신이 다시 퇴원하여 시골의 그 너르고 반듯하게 한평생 다듬어 둔 농토를 다시 가꿀 거라고 태연하게 의욕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참말로 기가 막힐 일. 양친, 셋째 누이, 다섯째 누이이며 막내누이였던 이, 둘째 매형에 이어 나의 백씨도 그처럼 ‘짐을 매어놓고’ 곧 길을 떠나겠단다. 우리는 가까운 장래에 그를 ‘치송(治送)’해야 한다. 참말로, 그 일은 치송. 치송은,‘행장(行裝)을 꾸려 길을 떠나보냄’을 이르는, 제법 품격 있고 가슴 아릿해 오는 어휘가 아닌가. 참으로 절절한 어휘. 언젠가 나는 과년한 두 딸아이들도 치송해야 할 테고... .
창작후기)
우리한테는 품격있는 어휘들이 참으로 많다. 서양의 무지막지한, 상놈들은 위아래 없이 ‘YOU’라고 하지만... . 그것들 어휘들 가운데에서 내 신실한 애독자님들과 이참에 꼭 짚고 넘어가고픈 어휘들 몇 개를 소개코자 한다.
가) 치송(治送) : ‘행장(行裝)을 꾸려 길을 떠나보냄’을 이르는 말.
* 실생활에 적용해볼 만한 사례
_ “자네, 슬하의 자제들은 다 ‘출가’시켰는가?(X)..... ‘서울 상놈들’의 말이다.
* 위 표현이 틀린(X인) 이유 : 그 족보가(?) 희미하다.
出家 : 머리 깎고 스님이 되는 일.
出嫁 : 시집보내는 일.
家出 : 비정상적으로 집 나가는 일. 무단가출 등.
出稼 : 일정한 기간 다른 곳에 가서 돈벌이를 하는 일.
出駕 : 가마나 수레를 타고 나가다
- “자네, 자제들은 다 치송했는가?”(O)
- “나는 아들딸 다 치송했네만, 자네는?”(0)
나) 후풍(候風) : 배가 떠날 때에 순풍(順風)을 기원하는 일.
다) 말씀 : 1.상대방의 말을 높여 이르는 말.
2.상대방에 대해 자기의 말을 겸손하게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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