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길에 관해
어떤 길에 관해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옛말에 ‘세상에 산 좋고 물 좋은 곳은 없다.’고 하였다. 또, 풍수지리학에서조차도 이상적인 양택(陽宅)의 조건을 ‘배산임수(背山臨水)’ 로 꼽는다. 나의 농장, ‘만돌이농원’은 그 옛말과 달리,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자리하며, 배산임수를 정확히 갖춘 곳이기도 하다. 농막을 앉힌 자리를 기준하여 바로 뒤에는 ‘선의산(仙義山)’이란 명산의 산자락이 펼쳐진다. 어느 풍수는 산의 형상을 두고 이렇게 일러준 적도 있다.
”윤과장(나의 택호임.), 저 산을 자세히 보시게. 저기 봉우리는 거북등 같이 생기지 않았는가? 그리고 거북이가 자네 농막을 쓰다듬으며 목을 쭈욱 빼어 자네 아래밭 합수머리(合水머리)에서 물을 먹으러 내려오지 않았는가? 그러니 더 이상 거북이 목을 건드리지 말게나.”
이 정도이니 뒷산에 관해서는 더 이상 이야기할 것도 없다. 그리고 개여울은 800여 평 내 농토를 휘감고 있으며,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른다. 개여울엔 갈겨니· 버들치· 퉁가리· 다슬기 등이 어우러져 산다. 게다가 마치 사포(沙布)로 문지른듯한 바윗돌들이 즐비하다. 사실 우리 내외는 버들치,다슬기 등이 사는 개울을 낀 곳을 찾고 찾은 끝에 이곳을 택했다.
아무튼, 위와 같은 구비조건만으로도 내 농장은 유토피아다. 그러나 아쉬운 점이 영 없지는 않았다. 농로가 비좁은 데다가 비포장이었기에 승용차 바닥을 긁은 적도 많았다. 그러나 몇 해 전 정부에서 작자(作者)들을 위해 농로를 넓혀 시멘트포장까지 해주었기에 그 문제도 한 방에 해결되었다. 그게 꼭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또 다른 문제를 낳았다. 인적이 드물던 이곳에 사람들이 자주 드나들게 되었고, 다슬기 등을 마구잡이로 잡아가게 되었고… 맞은편 농로가 끝나는 곳에다 어느 젊은이가 나를 흉내 내어 농막을 짓게 되었다. 물론 나는 그들 내외와도 사이가 좋기는 한데, 최근에 그가 자기네 마당이라면서 ‘주차금지’ 팻말을 꽂았다. 사실 나를 의식하여 그리 한 것은 아닌 줄로 안다. 또 그들 내외도 그렇게 말하였다. 하지만, 날로 늘어나는 나의 방문객 등을 생각하면… . 사실 막다른 골목이자 마당인 그의 땅을 밟지 않으려고, 개울을 건너는 현재의 콘크리트 다리를 넓히고 튼튼하게 하여야겠다고 수없이 별렀다. 드디어 나는 H빔과 전주(電柱)를 걸쳐 두어, 다리를 넓힐 준비작업을 얼추 끝낸 상태다. 이제야 ‘십 년 체증’이 확 내려가는 기분이다. 아내의 숙원사업(?) 해결도 그리 오래 남지 않았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제법 장황하였다. 이제 내 이야기의 가속페달을 밟아야겠다. 어느새 우리네 명당 개념은 바뀌어졌다. 교통이 편리하여 소위, 접근성이 좋은 곳에다 조상들의 음택(陰宅)을 모시고자 한다. 전통적으로는,앞이 확 트이고 멀리 바라볼 수 있고 발 아래 굽어볼 수 있는 곳 등이 명당이었으나, 그러한 곳에다 선조들을 모시면 묘를 묵히기 십상이다. 아마도 살아생전에는 낮은 지위로 살았지만, 사후에라도 덩그렇게 지위가 상승된 곳에서 천하를 호령하며 지내고 싶어서 그러한 풍습이 생겨났으리라. 명당의 개념은 그렇게 바뀌었다. 농토 개념은 또 어떻게 바뀌었나? 화물차나 경운기가 썩썩 들어설 수 없는 농지는 농지 취급을 못 받는 실정이다. 그러한 농토를 ‘맹지(盲地)’라 부르며, 헐값에 팔리거나 아예 묵정밭으로 버려지기 십상이다. 사실 나의 농장도 거의 맹지나 다름없었다. 물론 10여 년 전 그러한 까닭에 비교적 싸게 구입할 수 있었다. 그나마 개여울을 가로질러 좁은 다리가 놓여 있어서, 위에서 소개한 대로 그 젊은이네 마당에 승용차를 세워 둔 채 건너 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더 한심한(?) 토지는, 내 다리를 건너고 내 토지를 밟고서 가야 하는 ‘강씨네 밭’ 700여 평이다. 그 댁에서는 아예 그 밭을 묵정밭으로 팽개쳐 둔 채 지냈다. 그러했던 밭을 내가 이곳에 들어오면서부터 10여 년째 새로 일구어 부치고 지냈다. 형편없던 감나무들의 원기를 회복시키고 고추를 심는 등. 그러했는데, 그 댁 둘째아들이 불쑥 나타나 말 한마디 없이 감나무 묘목을 빼곡하게 심어두었음을 보게 되었다. 나한테 기별하면 설마 내가 선선히 돌려주지 않았겠냐만, 내가 막노동을 하기 위해 며칠간 농막을 비운 사이에 그런 일을 행했다. 실제로는 내가 심술을 부릴 일이 없겠지만, 그가 앞으로 확장될 내 다리와 내 밭을 어떻게 지나가려고 그리 하였는지 모르겠다. 즉, 나는 예의와 예절을 생각한다는 말이다. 무슨 일이든 순서가 있기에 하는 말이기도 하다. 사실 부동산이란 게 당대의 문제만은 아니다. 사람 사이가 어떻게 변할지도 모르니, 지금 당장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처리해서도 아니 된다. 장차 내 두 딸아이와 그 젊은 강씨네와도 영원히 사이 좋을 거라는 법도 없고. 그러기에 우리네는 냉정하리만치 일을 처리하고자 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물길싸움 즉, 물꼬싸움과 농로싸움 등은 오랜 기간 이어져 온 우리네 관습(?)이다. 사람이 자주 다니게 되면 그곳이 길이 되고, 그 길은 넓혀져 차로(車路)가 되고, 아주 길로 굳어지게 된다. 법률적인 문제는 뒤로 젖혀두더라도 일이 그렇게 된다. 그러기에 땅 주인은 야속하리만치 오솔길조차 내어주지 않는 관행이 있다. 사실 지난 해까지만 하여도 우리 가족과 방문객들은 ‘만돌이농원’ 건너편 언덕길을 이용해 왔다. 저 높은 곳에 자리한 등산로의 너른 곳에다 차를 10여대나 세워둘 수가 있었다. 그랬던 것이 산주(山主)네 문중에서 언덕을 어떤 이한테 팔게 되면서 그 오솔길은 사라지고 말았다. 아니, 새로 산 이가 언덕을 굴삭기로 확 까뭉개서 밭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그리 되었다. 거기 심겨졌던 직립홍도,직립백도,플루오트 등 그 많은 꽃나무들마저 다 사라졌다. 가끔씩은 이 골짝을 너무 이쁘게 가꾸어 온 걸 후회 아닌 후회도 하였다. 또 내 가족들로부터 비난도 받았다. “죽 쑤어서 개 주었다.”거나 ”초롱이 애비야, 남 좋은 일 다 하였다.”하면서. 그러나 크게 후회하지는 않는다. 세상천지에 본디 나의 것은 없었던 게 아니냐고! 그때그때마다 잠시씩 빌려 쓰는 것에 지나지 않거든, 내가 크게 아파할 일도 없다. 이건 너무 비약인지는 모르겠으나, 심지어 내 아내의 성기(性器)조차도 내 몫이 아닌 아내 본인의 것이었다. 다만, 내가 필요할 때 졸라서 잠시씩 이용할 뿐이거늘!
길에 관해 빠뜨릴 수 없는 사실들. 한번 길난 곳을 다시 틀어막는 법은 없다고 하였다. 이미 난 길을 틀어막으면, 이녁 자식들이 잘 풀리지 않는다는 말이 분명코 있다. 1952년 왜구의 수장(首長)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의 선조한테 해괴한 논리로 이른바,’정명가도(征明假道)’를 내어달라고 요구했다. 조선은 그럴 수 없다고 했다. 그게 빌미가 되어 임진왜란을 겪기가지 했지만,아니 되는 것은 아니 된다고 말한 게 옳았다. 나한테는 추억 속의 길도 있다. 우리는 그 길을 ‘개구멍’이라고 불렀다. 바로 대학 캠퍼스 둘레를 친 철망을 뚫어 낸 길이었다. 우리가 사는 하숙집과 우리가 자주 드나든 할매 막걸리집 등은 캠퍼스 옆에 바로 붙어 있었으면서도 한참이나 돌아가야 하는 형국이었다. 때로는 우리들이, 또 때로는 가겟집 어른들이, 또 때로는 하숙집 주인어른들이 번갈아 가며 개구멍을 몰래 뚫곤 하였다. 그때마다 학교 당국은 기를 쓰고 되막곤 하였다. 지름길 하나도 배려치 못하던 그 공무원(국립대학교였으니까.) 고유의 경직성이 끝내는 누그러졌다. 지름길마다 아예 문짝을 달게 이르렀다. 외국의 어느 명문대학의 실제 사례라고 들은 바 있다. 그 학교에서는 건물을 짓되, 교문을 애당초 만들지 않았단다. 그러다가 학생들이 많이 드나들어 뺀질뺀질해진 곳으로 그제야 길을 내어 정문을 달았다고 한다. 얼마나 합리적이며 얼마나 지혜로운 행정처리냐고? 기왕지사 모교 이야기를 꺼냈으니, 길과는 상관없지만 수목 이야기마저 해야겠다. 농과대학만으로 지내던 모교가 강원대,제주대와 함께 종합대학으로 승격하면서 마구 건물들을 지어 나가고 있었다. ‘산48번지’에 그렇게 아름답게 들어섰던 나무들이 매일 베어나가게 이르렀다. 내가 다녔던 임학과 교수님들이 주축이 되어 데모를 하였다. 건물을 짓되, 나무 한 그루도 건드려서는 아니 된다고, 그 나무들을 살리고 그 나무들을 중심으로 건물의 모양을 갖추라고. 실제로 그리 되었다. 특히, 농과대학 강의동과 연구동은 숲속에 지어졌다. 한 그루의 나무가 성목(成木)이 되자면, 30여 년 한 세대가 걸리는데 비해 콘크리트 건물이야 하룻밤 새라도 지을 수 있다는 논리였다. 너무 멋있는 발상 아닌가.
이제 내 두서 없는 이야기를 맺어야겠다. 독자 여러분께서도 길을 내거나 집을 짓거나 땅을 살 적에는 위에서 소개한 몇 가지를 응용해보실 것을 권유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