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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리(別離)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나한테 일이 생겨났다. 벌써 서너 달째 그분은 나의 e메일을 읽지를 않으신다. 잘은 모르겠으나, 장기간 해외여행 등으로 컴퓨터와 떨어져 계실 수도 있다.
사실 나의 애독자 그룹(?)에 든 분들한테는 내가 거의 매일 한 통의 e메일을 부쳐드리곤 한다. 그 애독자 그룹에 든 분들 가운데에서 그분은 제일 먼저 나의 e메일을 읽으시곤 하였다. 그분은 새벽이면 득달같이 나의 e메일을 읽으시곤 하였다. ‘읽음’으로 메시지가 뜨기에 나는 그걸 너무도 잘 안다. 그러한 그분의 부지런함과 성의가 늘 고마웠다. 수필작가인 나는 흥이 나는 일이기도 하였다.
어쨌든, 그러했던 그분한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해서, 그분의 글 제자이자 그분과 마찬가지로 나의 애독자 그룹에 든 수필작가님한테 그분의 근황이 궁금하다며 e메일을 따로 부쳐드렸는데... . 어제 아침 나의의뢰를(?) 받은 분한테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답신이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전주에 최상섭입니다. 제가 존경하며 그의 수제자이기를 자청했었는데 지난 1월 77세를 일기로 타계하셨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제자들도 조문을 꺼려했고 쓸쓸히 그분을 떠나보냈습니다. 전주에서 문단의 큰 별이 한 분 떠나셨습니다. 아파트 리모델링 관계로 오늘에서야 메일을 열어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윤 선생님의 여러 편 수필도 한꺼번에 읽었습니다.>
이렇게 멍할 수가? 이렇게 황망(慌忙)할 수가? 나는 귀인(貴人)을 놓치고 말았다. ‘별리’를 이렇게 체험하게 될 줄이야 ! 즉, 사귐이나 맺은 관계를 끊고 따로 갈라서게 될 줄이야!
그분은 저 아랫녘 전주에 사시던 김학(金鶴) 수필작가님. 그분은 수필작가 윤근택의 홍보대사였다. 나의 신작들이 e메일로 도착되면, 이내 당신의 수필 제자들한테 전달하시는 등 공유를 해 오셨다. 언젠가 한 번은 친히 전화를 주시어 다음과 같은 말씀도 해주신 적 있다.
“윤 선생, 나 전주의 김학이오. 하여간 윤 선생은 대단한 사람이오. 그 창작의욕이며 창작편수며... . 이곳 전라도에서 윤 선생은 아주 사이비교 교주 수준의 대접을 받고 있다오.”
대체, 그 말씀이 무슨 뜻이냐고? 당신은 나의 글을 당신의 블로그에 곧바로 올리기도 하고 당신의 문하생들한테도 풀어먹이기도(?) 하고, 당신이 길러낸 100여 명의 수필작가들한테도 본보기로(?) 보여줌으로써 그러한 일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자, 나는 귀인을 황망히 떠나보내고 말았다. 비보(悲報)를, 그것도 3개월 여 후에야 전해들은 나. 무척이나 섭섭해 하며 맥을 놓고 있는 나를 위로코자 아내가 내 농막에 와서 이틀째 머무르고 있다.
“여보, 당신도 너무 무심한 사람입니다. 그러게 ... 30여 년 알고 지내왔던 문우(文友) 사이였다면, 단 한 번이라도 그쪽으로 걸음을 하여 인사라도 나눴어야 했지 않아요? 때 늦게 후회한들... .”
사실 나는 그분을 알게 된 지가 30여 년 된다. 한국문인협회 기관지인 <月刊文學> 수필부문 신인상에 번번이 최종심에만 머물렀던 나. 그분은 경쟁자였던 나를 젖히고 ‘전화’라는 수필로 데뷔하셨다. 나는 장거리전화(시외전화를 예전에는 그렇게 불렀다.)로 당선을 축하해드렸다. 그것이 우리 인연의 시작점이었다. 그 이후 1989년 8월호 <월간에세이>를 통해 나도 수필문단에 데뷔했다. 당시 30대 초반이었던 나한테는 다소 과분하고 고속인(?) 데뷔였던 셈. 그분은, 이따금씩 읽게 된 그 많은 수필작가들 글 가운데에서 나의 수필세계 내지 수필지향점을 ‘콕 찍어’ ‘우리 수필문단에도 족집게도사가 있다’라는 제하의 월평을 적은 바도 있다.
하여간, 그렇게 시작된 전화교신· 서신교환· e메일 주고받음이 30여 년간 이어져 왔다. 그러했건만, 나의 가장 신실한 애독자였던 그분한테는 아무리 e메일을 보내도 이젠 더 이상 그분은 열어보실 수가 없다.
요컨대, 나는 지금 패닉 상태(panic常態)이다. 윤근택 수필가의 홍보대사였던 그분. 그분의 수고와 배려에 힘입어 나의 글들은 그야말로 산지사방(散之四方)되었는데... 심지어 여러 해외 교포사회에까지 퍼졌는데... .
어쨌든, 윤근택 수필작가 홍보대사였던 그분과 별리하게 되었다. 사귐과 맺은 관계를 끊고 따로 갈라서게 되었다. 이승과 저승 갈라서게 되었다.
끝으로, 수필 저변확대에 온 정성을 다했던 고인(故人)의 업적을 기리며, 아울러 삼가 명복(冥福)을 빈다. 유가족과 그분의 수많은 수필제자들께도 심심한 위로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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