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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들 이야기(1)수필/신작 2014. 5. 23. 22:51
바보들 이야기(1)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1. 진짜 바보인 ‘요란이’
사람이 모인 곳이면, 어디에서든 자기가 잘난 듯 행동하거나 자기가 최고인양 나대는 이가 한, 둘 있게 마련이다. 내가 지난 2월 12일 재취업한 이곳 연수원. 사실 나는 그 동안 미화팀장(美化팀장)인 그녀를, 조심해야 할 인물 제1호로 마음속으로 꼽고는 있었다. 그녀는 나와 동갑내기이며, 나와 마찬가지로 회갑을 목전에 두고 있다. 며느리도 보았다고 한다. 그러한 그녀는 위 아래가 전혀 없다. 한마디로, 예의라고는 눈 닦고 찾아보아도 없다. 불쑥불쑥 말을 함부로 내뱉음으로써 동료들의 가슴을 다치게 하는 예가 빈번하다. 그래도 7,8년차 고참인데 싶어, 그저 좋은 게 좋다고 여기며, “네~. 몰랐던 거 깨우쳐 주셔서 고맙습니다.”를 연신 해왔다. 이렇게 말하면, 여성 독자님들이 무척 싫어할 줄 뻔히 알지만, 그래도 이야기는 해야겠다.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가급적 여직원들과 언쟁을 않는 게 좋다는 거. 아니, 말도 아껴야 한다. 한마디로, 본전도 못 건진다는 걸 사반세기 직장생활을 하면서 깨우친 바 있다. 아파트 경비는 더러워서 못 해먹을 짓이라도들 하는 이유도 사실은… . 어쨌든, 그렇게 겉으로는 허허 하면서 지내왔으나, 엊그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기네 미화팀에서 사용하는 세탁기에다, 빨기 위해 넣어둔 수건 한 장이 없어졌다며 요란을 떨었던 것이다.
“윤 사감님, 이러면 안됩니다. 소장한테 말해야겠어요. 사감님이 수건 물어내세요. “
나의 애독자님들! 회갑을 목전에 둔 부인의 입에서 그러한 말이 나왔다는 게 믿어지는가? 사실 이 사감실에는 나의 맞교대자 ‘장 아무개 사감’도 근무하고 있으니, 언제 잃었는지도 모를 일인데 나만 지목해서 그렇게 말해서는 아니 된다. 또, 그까짓 수건 한 장이 그리 대수냐고? 요즘 흔해 빠진 게 수건 아니더냐고! 설령, 내가 그 수건 한 장을 훔쳐 가는 걸 보았더라도 그렇게 말해서는 아니 된다. 또, 침소봉대(針小棒大)하여, 귀때기 새파란 소장한테, 윤 아무개 사감이 세탁실 세탁기도 제대로 지켜주지 않았다고 일러바치겠다니 도대체 말이 되느냐고?
나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어 대꾸했다.
“수건이 발 달린 짐승이 아닌 바에야 어디선가 나타나겠지요. 그래도 한번 찾아나 보겠습니다.”
그랬음에도 그녀는 목소리를 더욱 높여 요란을 떨었다. 자기 몸종한테도 그렇게는 아니 할 것이다. 내가 늘 만만한 상대라고만 여겼던 모양이다. 나도 그 동안 꼬깃꼬깃 말아두었던 말을 처음으로 언성 높여 내뱉었다.
“보시오. 당신 말이야, 해도 해도 너무 하군요. 세탁기와 세탁물이 사감 담당업무입니까? 나는 세탁기를 조작할 줄도 모르고, 당신이 또 무슨 구실을 달까 싶어 그곳 근처에 아예 얼씬 하지도 않아요.”
그러자, 곁에서 그녀의 휘하에 있는 미화팀 부인들 셋은 손바닥을 자기네 가슴팍에 붙여 아래 위로 흔들며, 내가 그녀에게 더 세게 나갈 것을 주문하였다. 즉, 부추겨 주었다는 말이다. 그 정도면 그녀가 얼마나 별난 여편네인지 다들 충분히 이해하실 것이다.
요컨대, 그녀는 바보천치 가운데서도 급수가 아주 높은 이다. 내가 그 동안 허술하게 보였다는 말이다. 난들 왜 ‘무는 개도 돌아본다.’는 속담을 모르고 지내 왔겠냐만, 그저 바보인 척 지내고 싶었다. 지난 날 영광만 생각한다면야 이 늦은 나이에 재취업할 턱도 없었을 것이고. 그 ‘요란이(내가 지어 몇몇한테 흘린 그녀의 별명이다.)’가 밤새 또 어떤 직원을 헐뜯고자 연구할 동안, 나는 그 시간에 그 누구의 간섭도 아니 받고 수필작품을 적는다는 사실. 그렇게 따지면, 나는 그녀보다 큰 바보인 셈이다. 그 단순무식쟁이가 창작열에 불타 밤을 꼬박 새는 이 예술가를 알 턱이 없다. 글쟁이를 그렇듯 건드려댔으니, 어디 붓으로 얻어맞는 맛이 어떠할지… .
2. 바보인 내 친정 KT의 핵심간부들
요즘 기업들이 하는 짓들을 보면, 참으로 가관이다. 자기네 상품을 어찌 하면 더 팔아 돈을 챙길까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나는 일편단심 내 친정 KT의 휴대전화를 사용하고 있는데, 하루에도 몇 차례 S사,L사에 배를 갈아타라고 전화나 문자가 온다. 짜증 수준이 아니라, 아예 휴대전화도 없애고 살까 싶을 정도다.
1991년, 내가 ‘주임’에서 ‘대리’로 승진하여 울릉전화국에 갔을 때 일이다. 당시 울릉도 부속도서인 독도에는 일반전화가 없었다. 그랬는데, 독도의 어로권(漁撈權)을 가지고 있던 분의 사위가 청와대 민원실에다 독도에도 일반전화를 넣어주십사 민원을 넣었던 모양이다. 그것이 건설적인 민원이라서, 청와대에서는 KT 본사에다 지시를 내려, 일반전화를 넣어주라고 했던 모양이다. 그러자 KT 본사에서 직접 발주하여 마이크로 웨이브(무선) 회선으로 그 민원인에게 전화를 달아주게 되었다. 자그마치 20억여 원의 공사비를 들여서. 당시 울릉전화국장은 대단히 옹졸한 사람이었고,학력 또한 중졸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학력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이로 비쳐지겠지만, 뒤에 따라올 이야기를 마저 들어보시면 이해가 될 것이다. 그 전화국장은 입이 쑥 나왔다. 본사에서 전화가설공사에 따른 특별예산을 내려주었더라면,떡고물이라도 떨어지겠다 싶어 룰룰랄라 하였겠지만… . 그는 심술을 부리게 되었다. 컴퓨터에서 자동으로 부여되는 전화번호 5개 가운데 아무 것이든 주라고 담당자한테 특별지시 하고 말았다.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자, 대구본부에서는 그게 아니다 싶었던지 의미 있는 번호를 찾아서 부여하라고 지시가 떨어졌다. 나의 애독자들께서는, 그 국장 같은 양반들의 공통적 사고체계는 어떠한지 아시는가. 윗사람한테는 엄청 비벼대며 “네.네.”하는 사람들이라는 점. 그는 직원들에게 일러, 머리를 짜내 의미 있는 전화번호를 찾아보도록 하였다. 당시 울릉도의 지역번호는 ‘0566’이었으며, 국번호는 예나 지금이나 ‘791국’ 뿐이다. 직원들 모두가 좋다고 창출한 번호는 ‘1228’이었다. 사실 그것조차도 국장이 썩 좋은 번호라고 여겨 자신이 창출했다고 거들먹거렸다. 군민회관을 빌려 갖게 될 ‘개통기념식’ 날짜가 그해 12월 28일었던 관계로. 그 번호로 거의 굳어질 형편이었다. 막걸리를 거나하게 마시고 퇴근한 나는 밤새도록 괴로워하였다. 아내는, 무슨 고민거리라도 생겼느냐 하며 불안해 하였다. 새벽녘에 가서야 나는 영감(靈感)을 얻었고,A4용지에다 타이핑하여 과장을 통해 국장께 진언을 올렸다. 도대체 어떤 내용이었느냐고? 해마다 다가오는 ‘1228(12월 28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1991’이어야 한다고 했다. 1991년에 한국이 일본보다 먼저 일반전화를 독도에 달았다는 역사성을 부여한 것이다. 사실 일반인들의 소박한 견해와 달리, 국제법상 독도는 무인도(無人島)이다. 유인도(有人島)의 지위를 갖추자면, 3가구 이상 살아야 하며, 지하수가 나와야 하고, 초목이 저절로 자라야 한다. 그런데 독도엔 드센 바닷바람으로 인해 초목이 제대로 자라지 않는다. 자연수가 나온다는 말도 들어본 적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독도는 한국 땅도 일본 땅도 아닌 셈이다. 다만, 괭이갈매기네 땅이다. 그러니 마치 계절병인양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대는 일본을 생각해서라도 1991번으로 쐐기를 박아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대구전산국에서 1991번을 선호번호로 붙들어 둔 상태였다. 그 업무를 맡은 후배한테 전화를 걸어, 그 번호를 자유롭게 풀어줄 수 있냐니까 “OK!” 했다. 100년, 1000년 시간이 흐른 후에도 한국이 일본에 앞서 1991년에 독도에다 일반전화를 달았음을 만방에 알리겠다는 의미였다. 또 하나 재미나는 사실. 당시 노태우정권은 자기네 주머니에서 돈이 나오지 않았다 하여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KT한테다 그 일을 맡기면서도 쉬쉬 하였다. 사실 군인이 주둔하면 분쟁지역임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래서 그곳 독도에 근무하는 군인들은 울릉경찰서 소속이다. 즉 실제로는 군인이되, 경찰복을 입힌 이들이다. KT는 더 말할 게 없다. 그렇게 공사비를 들여서 전화를 달아주고서도 크게 자랑도 못하고 있었다. 자, 독도의 전화번호는 그렇듯 내가 창안하였다. ‘1991년’, 그거야 사실 남들도 생각해낼 수 있는 번호다. 그러나 내가 그러한 역사인식을 가졌다는 게 중요하다. 나는 그 번호를 통해 국토 막내둥이에 대한 애정도 담았다. 1991을 ‘한번 구경, 구경 또 한번… .’이라고 새겨, 한번 가보았으면 좋겠다는 의미를 부여 했으니까. 나아가서, 맨 좌측 ‘1’은 뾰쪽 솟은 동도(東島)를, 맨 우측 ‘1’은 뾰쪽 솟은 서도(西島)를 각각 나타내며, 중간의 ‘99’는 동도와 서도 사이를 자유로이 날으는 괭이갈매기들의 울음 소리 ‘구구’라고 새겼다. 내가 이런 내용을 A4용지에다 담은 건의서를 아무리 무지막지한 국장인들 그냥 지나쳤겠는가. 그는 울릉경찰서장한테 곧바로 전화를 걸어, 그 특유의 아부를 하였던 모양이다.
“영감님, 저희가 이번에 독도 주민 ‘이ㅇㅇ’한테 전화를 달면서 예비회선 두 가닥을 더 펴게 되었어요. 독도 경비대에 전혀 비용 없이 1991번을 드리고 싶은데요.”
결과적으로 일이 잘 되었다. 그 주민은 1228번을 가져갔고, 후일 가입권을 반납하였다고 한다. 대신, 내가 창출한 054)791-1991은 여전히 독도 경비대에서 쓰는 것으로 알고 지낸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세월이 제법 흘러갔다. 나는 영양전화국에서 대리이면서 과장보직으로 지내고 있었다. 내가 예견했던 일이 벌어졌다. 일본에서 다시 병이 도져,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또다시 우겨댔다. 국내에서는 ‘D’사가 자기네도 국제전화 사업을 하겠다며 ‘002’ 인식번호를 따내서 내 친정 ‘KT’를 괴롭혔다. 나는 이래저래 화가 치밀었다. 서울 본사 홍보실 ‘김현’ 과장한테 전화를 걸었다. 그는 귀가 열린 사람이고, 나처럼 수필작가인 사람이기도 하여 평소 제법 통했던 사이다.
“김과장님, 대체 지금 뭣들 하시는 겁니까? 제가 자료 하나를 팩스로 부쳐드릴 테니, 출입기자 등에게 건네 주세요.”
물론, 위에서 소개했던 독도 전화번호 ‘1991’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는 역시 나와 통했다. 곧바로 광고안을 만들어 나한테 부쳐 왔다. 사실 그제나 이제나 비싼 대가를 지불하면서 광고대행사에 맡겨 전문 카피라이터들의 손에 의해 광고가 만들어진다. 그는 모험적으로 단 한번의 예외로, 그렇게 광고안을 만들었던 것이다. 당시 광고에 관한 사항은 부사장(요즘은 부회장이라고 부를 것이다.) 전결사항이었다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광고안 결재권자는 일개 시골 전화국 과장인 나였다는 사실. 몇 차례 광고안을 고치는 등 팩스로 주거니 받거니 한 끝에 나는 그제서야 “OK!”했다. 겉으로는 일본, 속으로는 경쟁사를 매섭게 쏘아붙이는 헤드카피였다.
‘독도에도 우리 전화가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당시 울릉전화국에서 독도에 일반전화를 달기 위해 고생했던 윤근택씨는 이렇게 증언합니다.(이하 생략)’
이를 테면, 당신네들은 20억 들여서 전화를 독도에 달 수 있겠느냐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출발은 중앙의 4대 일간지 동시 전면광고였다. 공익광고였던 관계로 당시 5천만 원씩만 들였다고 한다. 반응이 좋자, 지방 유력지 23개 신문에도 전면광고를 실었다. 해서, 내가 친정 KT에 돈을 11억 5천만 원씩이나 쓰도록 한 장본인이다. 내 이름 ‘윤근택’을 찍는 데 쓰인 잉크만 하더라도 몇 드럼은 될 것이다. 그러자 어느 경쟁사에서는 우리 광고를 모방하여 어느 연예인이 동해 바다에서 휴대전화를 들고서 ‘짜장면 시키신 분?’이란 광고를 내보냈다.
그것도 이미 옛이야기. 하지만, 우리네는 돈만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조급하게 나대는 풍조가 만연하다. 그러기에 여전히 그 광고는 유효하다.크고 작은 사고들이 모두 돈을 밝히는 바람에 생겨난다는 것을. 국내 거의 모든 기업들이 돈벌이에만 눈이 어두워 공격적이고 자극적인 광고를 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거기에 인간미라는 게 없다. 공존동생(共存同生)도 ‘나눔’도 찾아볼 수가 없다. 내 친정 KT의 핵심간부들 내지 경영진들도 문제가 참으로 많다. 도대체 또 뭣들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지난 번 8300여 명이나 되는 나의 후배들을 명예퇴직시킨 CEO. 그도 정신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는 개인 블로그도 개인 카페도 개인 이메일 주소도 공개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고객의 소리를 직접 아니 듣고 ‘딸랑이들’을 통해서만 듣겠다는 말 아닌가. 내가 보기에,그도 바보다. 이 글이 그에게 굴절 없이 직행되길 바라나, 곤란하다. 회사 홈페이지도 나 같은 무지렁이들은 찾아들어갈 수조차 없도록 자기네들만 아는 말로 되어 있다. 남들이 돈벌이에만 혈안이 되어 있을 때 역(逆)으로 공익성을 내세운다면 국민은 그 기업을 따사롭게 받아들일 게 아닌가. 구질구질한 이야기 더는 필요치 않다. 홍보실 사료(史料) 담당한테 일러, 그 ‘독도에도 우리 전화가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전면광고를 찾아보라고만 하면 될 일. 그런 연후에 그걸 그대로 다시 찍어 신문에다 내라고 하면 되지 않겠냐고? 발상의 대전환이니,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이니 하는 게 어디 멀리 있는 게 아니라는 점. 큰 바보가 되면 사물이 제대로 보인다는 것을. 나는 이 글이 그에게 어떤 경로로든 전해지길 바랄 따름이다.
(다음 호 계속)
예고편 : 분량이 길어지면 독자님들 벅찰세라… . 다음 호에는 바보 온달,바보야(김수환 추기경), 바보 노무현 등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 이 글은 본인의 블로그, 이슬아지 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한국디지털도서관 본인의 서재,
한국디지털도서관 윤근택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본인의 카페 이슬아지 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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