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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보들 이야기(2)
    수필/신작 2014. 5. 25. 14:21

    바보들 이야기(2)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이 글은 바보 이야기(1)의 후속작임을 밝혀둔다. 그러기에 이어가는 이야기는 3, 4,5가 될 것이다. 우리가 누구를 두고,어린애 같다.라고 할 적에는 두 갈래 상반된 뜻을 지닌다. 어린애같이 유치하다.라는 뜻도 있으며, 아이같이 순진하다.는 뜻도 있다. 영어에서는 전자(前者)childish, 후자(後者)childlike라 각각 표현한다. 나의 이번 이야기는  지난 이야기 주인공들과 달리, 아이같이 순진한 분들, 즉 그러한 의미를 지닌 바보들 소개다.

     

    3. 바보 온달(溫達)

     

    그의 이름에서 느끼게 되는 것은, 그믐달이 아닌 온달 보름달이다. 그 음()이 같다는 말이다. 너무도 잘 알려진 인물이기는 하지만, 다시 기억을 더듬는양 여기며 읽어주기 바란다.

    그는 고구려 평원왕(정식호칭은 평강상호왕이다.?~ 590) 때 사람이다. 평원왕은 자식이 여럿 있었다. 그 가운데 평강공주는 어릴 적에 그렇게 잘 울 수가 없었다. 평원왕은 딸을 곧잘 놀려댔다.

    네가 항상 울어서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커서는 좋은 데 시집 보낼 수 없겠구나. 자꾸 우니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보내야겠다.

         바보 온달. 그는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성 근처에 살았다. 그의 얼굴은 비루먹은 당나귀처럼 파리하여 우습게 생겼다. 그는 집이 몹시 가난하여 밥을 빌어다가 앞 못 보는 모친을 봉양하였다. 온달은 항상 떨어진 옷과 해진 짚신을 신고 평양 시내를 돌아다녔고, 남들이 뭐라고 하더라도 늘 명랑하게 웃으면서 받아 넘겼기에 사람들은 그를 바보 온달이라고 불러댔다. 그는 본디부터 바보는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의 능력을 감추고 세상을 달관했던 사람은 아니었을까 싶다. 궁궐 밖 이야기가 임금의 귀에 들어갈 정도였으면, 그의 행동거지와 말투 등이 특이하기는 했을 터. 평원왕은 공주가 16세가 되자, 당시 권력을 가진 고씨 집안 아들과 혼인을 시키려고 하였다. 이에, 공주는 고씨 집안으로 시집갈 생각을 전혀 않았다. 평강공주는 실로 비범한 인물이었다.

         대왕께서는 항상 저를 온달에게 시집 보낸다고 하시고서 이제 와서 어찌 다른 이에게 시집 보낸다고 하십니까? 보통 사람도 거짓말을 하지 낳으려 하는데, 대왕께서 거짓말을 하신다면 누가 왕명을 따르오리까? 지금 대왕의 명령은 잘못된 것입니다. 저는 온달에게 시집을 가겠습니다.

         평원왕은 크게 역정을 내었다. 지난 날 농담을 했을 뿐이라고 하며,달래려 하였으나, 평강공주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부녀간 다툼 끝에 평강공주는 보따리를 싸서 금팔찌 등 패물을 들고 궁궐을 나서게 된다. 그리고는 수소문 끝에 온달의 집에 이른다.

          온달은 산에 느릅나무껍질을 벗기로 가고 없고, 앞 못 보는 그의 모친은 화장품 내음으로, 보드라운 손으로 이 귀한 처자(處子)의 신분을 눈치채고 한사코 배필이 될 수 없노라고 달래게 되는데 . 한편, 온달로부터도 내침을 당한 공주는 사립문 앞에서 몇 날을 버티게 되고, 끝내는 그의 아내 아니, 동거자가 된다. 평강공주는 자기가 들고 나온 패물 등을 팔아 농토, 노비, 우마, 세간 등을 사서 온달네를 금세 부자로 만들 수 있었다.

          평강공주는 온달한테 장에 나가서 말 한 필을 사오라고 하였다. 그녀는 말[]을 보는 눈이 뛰어났기에 신신당부를 하였다. 시장에서 파는 말을 사지 말고, 꼭 나라에서 파는 말을 사되, 병들어 백성에게 불하하는 군마(軍馬)를 사오라고 한 것이다. 착하디 착한 온달은 색시의 말을 잘도 들었고, 열심히 말을 돌보아 서서히 군마 본디의 모습을 되찾아갔다. 평강공주는 동거남인 온달이 훌륭한 장수가 될 거라고 타인암시를 해주었다. 온달은 평강공주의 기대에 부응코자 글 공부를 익히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고구려에서는 해마다 3 3일 삼짇날에 낙랑 언덕에서 사람들이 모여 사냥을 하는 축제가 열렸다. 평강공주는 본디 사냥을 좋아하던 부친 평원왕한테 자기 남자인 온달의 무예를 한번 보여주어야겠다고 계획했을 법하다. 온달은 그 축제에서 가장 많은 짐승과 가장 큰 짐승을 잡아 왕한테 바쳤다. 왕이 그를 불러, 그대 이름이 무엇인고?하였다. 이에, 온달은 온달이라고 합니다.라고 고하게 된다. 평원왕은 크게 기뻐하며, 신료들에게 자기의 사윗감이라고 추켜올린다. 그 사냥대회는 장수를 등용하기 위한 장이기도 하였다. 온달은 장수로 뽑혔고, 평원왕은 그 뒷면에 영민한 자기 딸 평강공주의 지원이 있었음을 알아, 둘을 정식부부로 맺어준다.

          때마침 577년 중국 북주(北周) 무제가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게 되었다. 이때 장수이자 평원왕의 사위인 온달장군은 크게 승리하였다. 평원왕은 대신들 앞에서 자기 사위를 크게 자랑하였다.

    여기서 잠시. 그 아버지에 그 딸, 그 장인에 그 사위였다. 평원왕의 그릇 큼도 빼놓을 수 없다. 평원왕 5년인 563년 여름에 큰 가뭄이 들었다.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는데, 어찌 백성들의 어버이 된 자가 홀로 배부르게 먹을 수 있겠느냐. 앞으로 내게 올리는 식사를 크게 줄이도록 하라. 나 역시 백성들과 고통을 나누겠노라. 이렇게 비가 오지 않으니 내가 산천에 나아가 천신에게 기도하여 가뭄이 멈추기를 기도해야겠다.


     
    평원왕은 이렇게 말하며 직접 산천에 나아가 종일토록 비가 오기만을 기도했다. 또 왕이 솔선수범해서 식량을 절약했던 일은 삼국시대 왕들 가운데  평원왕이 유일하다.

    그렇게 무공을 세운 온달장군. 590년 평원왕이 죽은 후 처남인 영양왕이 왕위에 올랐다. 온달의 직위 또한 올라갔다.온달은 평소 자신이 생각했던 것을 왕에게 아뢰었다.

     
    “신라가 우리 한강 유역의 땅을 빼앗아 저들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곳의 우리 백성들은 하루빨리 자신들을 구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원하옵건대 대왕께서 저를 믿어 주시어 군사를 주신다면 반드시 우리 땅을 도로 찾아오겠습니다.


    . 영양왕은 온달의 제의를 기꺼이 수락했다. 온달은 전장에 나가기 전에 평강공주에게 맹세했다.

     
    “조령과 죽령 이북의 땅을 되찾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을 것이오.


     
    온달은 강한 의지를 갖고 싸움터에 나갔다. 온달은 신라가 차지하고 있던 아차성을 공격했다. 아차성은 서울과 구리시 사이에 있는 아차산성으로 추정되는데, 단양에 있는 온달산성이란 견해도 있다. 온달은 아차성 아래에서 신라군과 싸우다가 그만 화살에 맞아 죽었다. 평강공주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온달은 편히 눈을 감지 못했다. 장례를 치르고자 온달의 시신을 넣어 둔 관을 옮기려고 했으나,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온달이 약속을 지키지 못한 한 때문이라고 여기고 평강공주를 모셔왔다. 평강공주는 온달의 관을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장군, 살고 죽는 것이 이미 결정되었는데, 이제는 돌아갑시다.


     
    그러자 관이 움직였다. 온달의 시신은 평양으로 옮겨졌고, 성대한 장례가 치러졌다. 영양왕도 이를 듣고 크게 슬퍼하였다. 백성들도 고구려 영웅의 죽음 앞에 크게 슬퍼했다. 온달은 바보라고 놀림을 받았지만, 고구려의 위대한 장군으로 백성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평강공주는 자신의 뚜렷한 의지를 갖고 삶을 스스로 개척하여, 바보라 놀림받던 온달을 고구려의 영웅으로 변모시킨 현명한 아내이자 위대한 여성이었다.

    (이상 네이버지식백과 인물로 보는 고려사,김용만,도서출판 창해에서 따와서 재편집함.)

        사실 내가 더 보태어 쓸 것까지도 없다. 온달은 바보가 아니었다. 설령 바보였더라도,그 바보스러움은 이 글 허두에도 밝혔듯이 어린애같이 순진한,’childlike’였다. 평강공주의 안목과 평원왕의 그 그릇 큼도 다시 한번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흔히, ‘똥별로 불리는 정치 군장성이 많은 지금의 우리 나라. 그리고 공주라면 평강공주 정도는 되어야 제대로 된 공주라는 점도 놓칠 수가 없다.

     4. ‘바보야의 김수환 추기경

       그분에 관한 일화도 참으로 많다. 군사정권시절, 핍박받은 민주화 운동 인사 등이 명동성당에 숨어들자, 그분은 다 받아 주었다. 전투모를 쓰고, 총칼을 들고 들이닥친 군인들에게 호령한다.

    정히 그들을 잡을양이면 나를 밟고 지나가시오.”

    그 길로 명동성당은 민주화 성지(聖地)가 되었다.

    말년에 이른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잘 났으면 뭘 그렇게 크게 잘 났겠어요. 다 같은 인간인데, 안다고 나대고 어디 가서 대접받길 바라는 게 바보지. 어이쿠. 그러니 내가 제일 바보스럽게 살았는지도 몰라요. “

    노년에 이르러 추기경께서는 위와 같이 스스로를 바보라고 칭했다. 그분은 혜화동 주교관에서 하루 만에 자화상을 그렸다. 그게 바로 바보야.  이 바보야!” 하며 자신을 탓하는 말일 수도 있다. “나는 바보야!”라는 말일 수도 있다. ‘자신을 높이면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면 높아진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고자 애썼던 분. 그러기에 스스로를 바보라고 하셨을 것이다. 그분에 관해 더 이상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것조차 바람직한 짓이 아니 듯하여 여기서 그친다.

    5. 바보 노무현

    단언컨대, 내 살아생전 그러한 멋있는 대통령을 두 번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다. 그분은 소탈하였고, 시골 사람들에게서 종종 느끼는 다정다감이 묻어났다. 아내가 졸라 그분 퇴임 후 김해 봉하마을 생가에 두 차례씩이나 갔으면서도 정작 그분을 지근거리에서 뵙지 못하였다. 그게 못내 아쉽다. 그분을 바보 노무현이라고 한다. 나는 그 바보란 말이 어느 젊은 네티즌이 최초로 부친 별명으로 알고 지낸다. 그분은 낙선할 걸 뻔히 알면서 출마하여 고배를 연거푸 마셨다. 92년 부산 총선에서, 95년 부산 시장에서, 96년 서울 종로구에서 내리 낙방을 한다. 그런 모습을 본 그 젊은이는 애정을 담아, ‘바보 노무현이라고 최초로 글을 적어 공개적으로 그분께 부치게 된다. 그분은 바보라는 애칭을 좋아했다.  참으로 흥미로운 점은, 96년 서울 종로구 국회의원 출마 건이다. 그때 상대는 이명박 후보였다. 그러했던 이명박 국회의원은 선거법 위반으로 국회의원직을 잃고 해외로 달아났다. 그랬던 그가 그 많은 전과기록에도 불구하고 후일 대통령 자리에 앉자, 정적이었으며 전직이었던 노무현 대통령을 그렇게 모멸감을 줄 수가 없었다. 자기가 하지 않은 듯, 졸개들을 풀어 마구 물어뜯게 이른다. 심복들이 그렇게 하자고 해도 말려야 했으며, 그런 낌새가 보이면 고 김대중 대통령이 그랬듯 불호령을 내렸어야 했거늘. 시골 농부로 내려가 이웃들과 사람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며 다정다감하게 지내는 이가 그리도 눈꼴 사나웠을까? 모든 눈과 귀가 김해의 그 작은 마을에 쏠려 있었고, 인기도가 청와대에 앉은 자신보다도 더 높으니 배가 아팠던 모양이다. 그러한 점에서도 그 집단은 비열하기 그지없었다.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바보 노무현이가 고향으로 낙향하지 않고 그 많은 전직 대통령들처럼 서울 등지에서 여생을 보냈더라면, 그러한 불행은 생겨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여간, 앞으로도 한 동안 낙향해서 땅콩재배를 하였던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같은 분은 나타나지 않을 것만 같다. 본디 자존심이 강하기로 유명했던 그분. 그분은 유서에다 모든 게 운명이다.’라는 구절을 적었다. 업보(業報)를 깊이 생각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권위적이지 않고, 서민들에게 친구처럼 가까이 다가가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맘 놓고 하며 지내고자 했던 것이 물거품이 되었으니… . 사실 그분은 어떤 면에서 대통령감이 아니었다. 아니, 대통령을 하지 않았더라면… . 그 논리정연하고 철학이 담긴 달변(達辯)이 아니었던들… . 그저 진짜배기 바보로만, 바보천치로만, 앞뒤 꽉 막힌 맹꽁이로만 살았더라면 아직도 이승에 계실 터인데… .

    나는 그분을 떠올릴 적마다 나 자신의 모습이 곧잘 오버랩 된다. 나도 손해 볼 걸 뻔히 알더라도, 할 말은 해야 한다. 아닌 걸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면 무슨 짝에 쓸 수 있냐고? 잔머리를 한참 굴러, 이해관계를 따져 말을 빙빙 돌리는 거. 나는 그러한 이들을 경멸하기까지 한다. 번히 보이는 데도 짐짓 못 본 듯 고개를 돌리는 거. 그것은 비겁한 짓이다.

     이제 나의 이 글을 마무리 짓기로 하자. 나는 위 세 분의 바보스러움에 경의를 표한다. 특히, 나와 닮은 꼴 바보 노무현이 다시 그립다.

     

    * 이 글은 본인의 블로그, 이슬아지 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한국디지털도서관 본인의 서재,

    한국디지털도서관 윤근택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본인의 카페 이슬아지 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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